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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리얼리즘의 개가 - 정영선의 『아무 것도 아닌 빛』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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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리얼리즘의 개가 - 정영선의 『아무 것도 아닌 빛』

비평쟁이 괴리 2023. 5. 30. 07:43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5회 독회의 결과물로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먼저 발표되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정영선의 『아무 것도 아닌 빛』(도서출판 강_)은 세목들의 핍진한 묘사로 돋보인다. 빨치산 활동으로 인해 장기수로 복역하고 상시적 감시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 히로시마 피폭에서 생존한 인물, 일본인과 한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박탈자’로 살아온 사람 등의 사연들을, 번갈아 소개하고 또한 교차적으로 엮으면서, 전달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런데, 인물들이 겪은 사건들의 적확한 복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인물들이 갖는 기억과 감정들과 추리들이 끊임없이 대조되고 복원되고 수정되어 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주밀하게 좇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심리적 리얼리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속에서 인물들의 마음은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서의 상태라기보다 스스로 격렬하게 굽이치는 심리 상황이 된다. 이 심리적 리얼리즘은 그 배경에 놓여 있는 사실의 모호한 리얼리티와 어긋나면서, 독자에게, 그 어긋남에 대한 관찰로부터, 사실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 기억의 추이에 대한 음미, 그리고 그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유발할 차후 행동들에 대한 궁금증들을 북돋고, 이 작품의 전개를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이런 부지런한 마음의 흐름은 꽤 굵고도 팽팽한 긴장의 리듬을 형성하니, 그 위에 올라탄 독자에게 이 작품을 단숨에 읽게 하는 유인력으로 작용한다. 이 점이 이 작품의 최고의 장점이라 할 것이다.
반면, 인물들의 사회적 처지가 사실상 동일하고, 또한 그들의 현실 판단도 모두 엇비슷해서 이미 정해진 주제에 작품의 풍경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약점이라 할 것이다.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좋은 작품은 선과 악을 일도양단식으로 가르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의 스펙트럼의 편이들을 복합적으로 생산하면서, 선한 삶들에 깊이와 넓이를 부여하고, 악들에도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때 선함에 대한 의지는 악과의 정당한 대결을 개시할 수가 있다. 악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을 퍼붓는다고 해서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로지 악의 극복은 악 그 자신의 합리적 논리의 궤멸과 자기 수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아주 단편화되어 있긴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한 인물 유형에 대한 새로운 버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에 값한다. ‘고문자’가 그것이다. 이 작품의 고문자 ‘점박’은,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이 도출해낸 생계형이지만 그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생각 없는 고문자’도 아니고, 임철우의 『붉은 산, 흰 새』가 고발하는, 따뜻하고 온화한 가장 아버지라는 또 하나의 존재가 덧붙어 있는, ‘분열증자로서의 고문자’도 아니라, ‘참회’의 모습이 그 자체로서 자기 합리화로 기능하여 일상 속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변신한 고문자’이다. 이 고문자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이 고문자들이 세상 안으로 스며들어 왔을 때, 그 사회적 여파는 무엇일까, 는 우리가 계속해서 탐구해야 할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