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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위악성이 담론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때 - 손보미의 『사랑의 꿈』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언어의 위악성이 담론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때 - 손보미의 『사랑의 꿈』

비평쟁이 괴리 2023. 5. 30. 07:39

※ 이 글은 동인문학상 제 54회, 제 5회 독회 결과로서 제출된 글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먼저 발표되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손보미는 ‘언어 위악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특이한 문체적 표현들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무난하고 자연스런 대화의 흐름 속에 문득 특정한 패턴을 형성하는 규격화된 언어들이 튀어나와, 전반적인 말의 흐름과 긴장을 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병든 닭 같아, 너.”


“안녕, 나는 영예은이라고 해. 앞으로 잘 도와줄게.”

이런 말은 일상 대화에서 흔히 쓰는 어법이 아니다. 이는 특정한 대화 상황에서 한 당사자의 말들이 내포하고 있는 심경을 의식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에 의해서 구성된 말이다. 이때 발화자의 ‘심경’은 폭력적이며, 발화자의 언어는 점잖다. 첫 번째 문장에서는,  

“야! 이 병든 닭아”

라는 고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심경이다. 이를 그대로 텍스트 표면 위로 노출하면 이 말은 매우 자연스러운 말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격한 감정으로 충만한 것이다. 작가가 보기에 발화자는 작중인물로서 그렇게 거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표출된 문장이 바로 “병든 닭 같아, 너”라는 심드렁한 어조에 실린 얄궂은 비난조의 말이다. 그러니까 ‘언어위악주의’라고 필자가 지칭한 어법은 언어의 위선성을 도드라지게 느끼는 효과를 낳기 위해 도입된 기술(記述)상의 일탈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를 미묘하게 왜곡하는 이 ‘언어 위악주의’는 명백한 ‘지향성intentionality’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김승옥 소설에서의 ‘위악성’이 4.19의 좌절 이후, 변질된 ‘시민사회’의 다양한 왜곡들을 반영했다면, 손보미의 고의적인 언어 왜곡은 현대인들의 자연 언어에 감추어진 고정관념들과 대화의 형식이 형식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평화’(대화는 말 그대로 대화자들 간의 화목을 기본 전제로 한다. 말다툼조차도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는 발생하지 않는다)의 위장 속에 감추어진 공격성을 ‘폭로’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언어의 유별난 사용은 이번 소설집, 『사랑의 꿈』(문학동네)에서 담론 수준(문장을 넘어서 텍스트)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이런 구절을 보자.

외삼촌은 말수가 많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별로 없어서 일터가 아니면 집에 머물렀다. 외숙모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법도 잘 없었다. 엄마는 수다쟁이는 아니었지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아빠를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는데―특히 내가 외삼촌 집으로 오기 한두 달 전에―내 기억에 아빠가 속시원하게 대답한 적은 없었다. 그 기억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한동안 나는 남자 어른들은 말하는 걸 싫어하는 부류인 게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정도였다. 엄마는 말로 내뱉을 수 없는 생각이라면 머리와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양심이라는 거야!” 외숙모는 수다쟁이였지만 외삼촌의 과묵함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찾아냈는데, 외숙모가 엄마처럼 질문을 던지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숙모는 진정한 수다쟁이였다.

외삼촌 부부와 부모 사이의 다름이 묘사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인용부의 첫 부분은 엉뚱하게도 외삼촌과 엄마를 대비시킨다. 외삼촌은 말이 없고 엄마는 말이 많다. 언뜻 보아 대비 항목들의 관계가 이상하다 싶은데, 뒷부분에 가면 이 대비는 결국 엄마 대 외숙모의 그것으로 귀결된다. 엄마와 외숙모는 둘 다 말이 많다. 그런데 엄마는 수다쟁이가 못 되고, “진정한 수다쟁이”는 외숙모다. 이 규정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외삼촌과 아빠가 공통적으로 과묵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엄마의 말은 주로 질문인데, 이것은 아빠를 괴롭히고 동시에 아빠에게 매달리는 엄마의 심리적 상태를 가리킨다. 반면 외숙모의 수다는 외삼촌과 무관하며, 따라서 이는 외숙모의 독립성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결국 이 대비를 읽게 되면 해당 소설의 주제가 ‘여성의 존재 형상’이며, 그 문제에 대한 탐구의 첫 돌로서 엄마와 외숙모의 대비가 제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인용부 첫 대목의 외삼촌과 엄마 사이의 엉뚱한 대비는 소설 주제에 대한 이해에 순기능적인가, 역기능적인가? 이해를 위해 필요한 성찰적 과정(통상적인 감정이입적 독서를 넘어서는)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비틀은 장면인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대목들이 한둘이 아니다. 필자는 지금 이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어휘들의 사용에 민감한 이 작가가, 언어유희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에, 동일계 내애서의 물질적·정신적 현상들 일체에 어김없이 적용되는 열역학 제 2법칙, 즉 ‘혼잡도 증가’의 법칙에 양보하지를 않기를 바란다.

※ 이 책은 ‘연작소설집’이라고 지칭되어 있는데, 용어상의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연작(連作) 소설은 서양의 roman-cyle, roman cyclique, suites romanesques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서양문학에서 이 어휘들은, 장편소설들 사이에 사건상의 연결을 이루는 일련의 작품들을 묶어서 지칭할 때 쓰인다(roman-cycle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비평가 알베르 티보데Albert Thibaudet이다). 단편소설이 우세한 한국에서는 사건 연관성이 있는 단편들을 모아 하나의 일관된 드라마를 구성하면서 장편 분량에 다다랐을 때, 그것을 ‘연작 소설집’ 혹은 ‘연작 장편’이라고 불러왔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가 대표적이다. 반면 사건 연관성이 없는 대신 유사한 주제를 공분모로 저마다 다른 사건들을 다룬 단편들을 모은 것은 통상 옴니버스Omnibus라 불러 왔다. 손보미의 이 책은 연작소설이라기보다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