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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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소설읽기

21세기에 출현한 ‘자유분방한 폐쇄성들’이라는 현상

비평쟁이 괴리 2023. 4. 19. 18:08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독회를 통해 제출된 독회 의견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오랜만에 보는 천운영 소설(반에 반의 반, 문학동네, 2023.02)의 새로운 모습은 과거의 소설과 유사한 면과 달라진 면이 두드러지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제재로 선택된 어떤 인생의 유별난 집중성은 과거의 소설적 특성을 유지하지만, 그 인생과 바깥 시선 사이의 근본적인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는 새로운 것이다. 이 변화는 작가의 체험과 연관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텍스트 효과는 그와 무관한 곳에서 발생한다.

첫 작품인 우리는 우리의 편이 되어에서는 방금 언급한 천운영 소설의 두 가지 기본 특성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관계 양상을 증언하는 데에 효력을 발휘한다. 젊은 조카의 자유로운 삶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관찰을 기록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관찰의 형식은 순수한 바라봄으로써, 조카의 인생을 조카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양태로 나타난다. 그렇게 표출된 조카의 삶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생기로 넘쳐난다. 그 모습은 그대로 이른바 MZ세대, 필자의 용어로 말하면, ‘모태인권세대가 모든 격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만의 생을 마음껏 구가하는 모습이다. 그것은 해방적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러나 바로 그 아름다움의 극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삶은 저는 항상 제 편이기 때문에라는 언술이 그대로 가리키듯 자신에게 갇힌 삶이며, 더 나아가면 사적인 유대를 통해서 형성된 우리 편이 된 우리에 갇힌 삶으로까지만 발전한다. 우리는 조카의 의식 속에서 소중한 사이이겠지만, 지난 독회에서 언급된 장희원의 소설이 환기시키듯, ‘축사의 뜻이 될 수도 있다.

이 철저한 폐쇄성은 오늘날의 해방이 일종의 전면성을 띨수록 더욱더 블록화되어간다는 아이러니, 벗어남이 갇힘이 되는 역설을 야기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일깨운다. 조카의 인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남녀평등자아실현으로 시작한 성 해방은 퀴어 해방으로 나아가면서, 우물 속에서 벌어지는 싱크로나이즈(아니면, 청개구리 울음)의 현상으로도 변형된다.. 그 폐쇄성의 원인은 당사자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생을 해독하지 못하는(이 몰이해에는 모든 걸 이해하는 듯한 제스쳐로서 나타나는 방관도 포함된다.) 바깥의 시선에도 있다. 또한 그런 폐쇄성이 방관의 물살을 타고 사방에서 자유롭게 떠다니기 때문에, 이 폐쇄성은 그 단어가 흔히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와는 달리, 감추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히 현시된다. 그것은 현시되면서 곳곳에서 현타를 유발한다.

아마도 이런 블록화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의 특정 강대국들의 안팎 모두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 된 듯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의 미국 사회의 이념적 분열에 대해서, 매튜 D. 루티그Matthew D. Luttig라는 심리학자가 쓴 폐쇄된 빨치산 마인드 미국 양극화의 새로운 심리학 The Closed Partisan Mind - A New Psychology of American Polarization(Cornell University Press, 2023)은 그 제목 자체로 폐쇄성으로서의 자유분방함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제목 번역 안에 한국적 뉘앙스를 넣은 것은 필자의 고의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이 갇힌 해방공간들과 그 안에서 들끓는 자기 몰입적 행동들. 옛날 극작가의 표현을 빌어 마법에 도취한 섬들의 향락, 미국이라는 이미지(미국의 현실이라기보다는)의 복본은 혹시 아닐까? 영화와 드라마, 인터넷 상의 각종의 스펙타클 더미들을 통해 전사(傳寫)되어 온 선진국 본보기들의 카피가 아닐까? 나의 이런 의혹을 누군가 카피 댓해주었으면 좋겠지만, 이 꼬인 문장들을 풀어주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리라.

여하튼 지금 문제가 된 것은 이런 폐쇄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폐쇄공간들이 저마다의 풍선이 되어 지구상의 대기를 가득 떠다니고 있어서, 그것들의 마찰 때문에, 혹은 내부 기압의 팽창과 배출된 유해 물질의 미방출로 인해, 어느 순간 대 폭발이 일어나고 그것이 연쇄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천운영 소설들에서 공히 나타나는 두 번째 양태는 그런 두려움 앞에서 은밀히 감추어진 채 발을 동동 구르는 현상을 초래한다. 첫 작품에서 강렬하게 드러난 첫 번째 양태가 집중된 삶의 최밀도의 표현이라면, 그것의 두 번째 양태는 순수한 관찰이 실은 하나의 연동자shifter’가 되어 전이transfert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모가 읽은 조카의 삶은 이모의 시상(視床)에 모인 후에, 측두엽으로 퍼져나간 부분이 이모의 과거를 끄집어내게 하고, 편도체를 자극하며, 그 자신의 인생을 재편하도록 충동질한다. 아버지의 야릇한 인생은 자식들에게 전이되어 아버지 역할을 하게 하거나, 누군가에게 아버지 되기를 재촉하게끔 한다. 그러나 전이의 충격은 썩 아련하고 모호해서, 그 의미의 문자적 내용을 쓰는 자 스스로 판독하지 못해 답답해하며, 전이를 통해 관찰자에게 일어난 새로운 행동, 즉 부지중에 일어난 반응들과 응답들도 막연한 의욕(이른바 정동[情動]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마음 상태)의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이라서, 그 나머지들은 아주 짙은 안개에 쌓인 양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고, 무작정 시도하기도 어렵다. 이런 안개 속에서 헤어질 결심이나마 일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작가의 트라우마에 연원을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어렴풋한 짐작을 하게 하는 이 모호성을 딛고, 작가가, 자신이 성취한 생동하는 생의 감각 덩어리들 안에, 날카로운 회전 송곳을 집어 넣고 더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호성은 구성의 실패 쪽으로 작품을 기울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끽담(喫談):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가면서, 필자는 초끈이론의 사회적 현실태를 마침내 보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눈 앞에 보인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사회라는 막에 근거해 형성된 3차원의 세계라면, 그 안에 말려 있는 여섯 차원 중 적어도 셋은 중력자처럼 닫힌 끈의 형태를 갖는다는 것을 천운영 소설의 자유분방한 폐쇄성은 강렬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 숨은 차원들 중 적어도 셋은 평행 우주다. 그리고 평행우주들은 안 만나는 게 아니라 상시적 충돌 위험 속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매우 센 파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그래. 알겠다.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