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혜진의 『너라는 생활』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혜진의 『너라는 생활』

비평쟁이 괴리 2021. 1. 8. 11:07

※ 이 글은 '동인문학상' 2021년 1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나간 것이다. 조선일보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소설집, 너라는 생활은 너와 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편들은 거의 엇비슷한 형국을 이룬다. 이 작품들의 인물들은 상황에 휩쓸리는 연약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인물들은 거기에 나름의 반응을 하는데 의 반응의 강도가 다르다. 대체로 는 좀 더 세고 급한 편이고 는 좀 더 유보적이다. 이로부터 세 개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상황은 언제나 인물들을 앞서 나간다 의 시간은 의 시간을 앞서지만 상황의 시간에 부딪쳐 좌절하기 일쑤다. ‘의 시간은 가장 느리고, 그래서 상황을 시야에 담을 수는 있는데, 그러나 상황과 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무기력하다. 이 시간차 때문에 이 작품들의 세 인물(상황까지 포함하여)은 잘못 끼워진 마분지처럼 아무런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덜렁거린다. 하지만 김혜진 소설의 강점은 이 덜렁거리는 구도 내부의 섬세한 움직임을 포착하여 마음의 이랑을 그리는 솜씨에 있다. 작가는 각 인물들의 마음과 동작 하나하나에 곡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면서 그 결들을 촘촘히 복원해낸다. 때문에 전체의 구도 내에서 보면 두 인물의 허둥지둥은 무의미의 반복적 추락이지만, 각각의 내부에서 보면 생명 운동의 임계치에 다다른다. 독자는 그 사이에 일어나는 어긋남의 인식과 긴장의 느낌 모두를 애틋하게 느낄 것이다. 이때 종래에 상황과 인물들 사이의 어긋남을 증거하던 시간차의 여백은 독자의 생각의 포자들이 날아들어가는 정원으로 변모한다. 다만 그 구도가 작고 한결같기 때문에 생각의 경계도 좁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