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동인문학상 제 52회 2021년 1월 독회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동인문학상 제 52회 2021년 1월 독회

비평쟁이 괴리 2021. 1. 8. 11:02

※ 이 글은 동인문학상 2021년 1월 독회로 나간 글이다. 조선일보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 감회

동인문학상의 대대적 개편 원년부터 심사위원직을 맡으셨던 김화영 선생께서 지난 해를 마지막으로 퇴진하신다고 한다. 20년 이상 가까이 모시면서 동고동락했던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김화영 선생님은 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의 독회에 가장 열성적으로 작품을 읽어 오시고 당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셨으니, 저와 같은 후학에게는 한결같은 자극이자 비평적 모범이 되어주셨다. 때문에 지근거리에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자 축복이었는데, 아마도 더 큰 목표가 있어서 매달 수다한 책들을 읽고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노역을 벗어나기로 결심하신 듯하다. 사정이 그렇다면 별 수없이 자유의 획득을 축원드려야 할 것이나 미련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그동안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리며 부디 스스로 즐거운 일 속에서 열락하시기를 빈다.

▶ 전반적 인상

엄청나게 많은 소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방에서 상상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럴 게다. 그런데 양적 풍성함이 종류의 다양성을 보장해주는 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한국소설은 자기 이야기를 사회적 문제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이어가고 있다.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소설이 그런 게 아니라 한국 독자들이, 고급 독자들까지 포함하여, 그런 소설들을 원해 왔고 여전히 그러하다고 말하는 게 바를 것이다. 이 개인=사회의 협소한 울타리 바깥에 두 개의 경향이 여하튼 그게 무엇이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한 쪽에는 의 개입없이 오로지 세상 이야기를 하는 소설들이 있다. 이 방향의 작품들은 실제로 문학에 대한 사회적 담론으로부터 얼마간 비켜선 장소에서 끊임없이 양산되어 왔다. 체험의 깊이가 부여되지가 않아 통속적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한 소설들도 꾸준히 생산되어 온 것도 사실인데, 고급 독자들조차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 독서도 일종의 추세임을 보여주는 것인가? 반대 방향에서는 자기 이야기에 어떠한 사회적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일종의 자가 실험 속에 집중하는 소설들이 있다. 옛날엔 이런 소설을 두고, 자동사적 소설, 혹은 소통을 거부하고자 하는 시도로 흔히 해석해 왔는데, 그러나 이 소설들은 결코 자족적이지 않으며(즉 바깥의 어떤 지향이 있다), 또한 소통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소통을 적극적으로 갈망하는데, 그들이 꿈꾸는 소통이란 사회적 소통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범우주적이고 심장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내가 공적 결정과는 별도로,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을 지난해 최고의 발견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데, 한국의 독자들은 이런 소설들을 난해라는 딱지를 붙여 외면하거나 혹은 작품의 이해가 결여된 채로 그 돌출적 신기함에 대해 모호한 환대를 보여 왔다. 두 경우를 모두 아우른 무관심의 풍조는 실상 미만해 있다.

내가 두려운 것은, 그런 와중에서 새로움을 시도하는 작가들 자신이 일종의 무기력 혹은 매너리즘 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천둥 번개가 울리고 광포한 바람이 그들을 몰아치면 그런 고난이라도 먹고 생존할 터인데, 지금은 적막 속에서 곱은 발걸음을 서성이다가 먼지처럼 흩어지지나 않을까 우려스러운 것이다.

또 하나 최근의 작품들을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것은 개연성의 현격한 저하 현상이다. ‘환상이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태도가 꽤 퍼진 게 사실이지만, 현실 묘사에조차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일종의 범주착오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고유명사의 등장이 빈번해지는 것도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이다. 실존인물로서의 고유명사는 허구 세계의 양태들에 다양하게 개입하기 위해 치고 빠지는게 통상적인 기능인데, 요즘은 그보다는 일종의 뽐내는 장신구로서의 액세서리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어떤 세목이든 문학에서 장식으로 쓰는 건 타기해야 할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