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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30주기 추념 좌담: 비평가 김현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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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30주기 추념 좌담: 비평가 김현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

비평쟁이 괴리 2022. 11. 26. 18:42

※ 아래 좌담은 김현 선생 30주기를 추념하여 나눈 좌담이다. 상당히 길지만, 필요한 독자가 있을 것 같아, 블로그에 올린다.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 고(故) 홍정선 전 인하대 교수, 김연권 전 경기대 교수, 이철의 상명대 교수, 그리고 정과리가 참여했다.  2020년 4월 9일 문학과지성사 회의실에서 진행되었고, 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에 실렸다. 블로그에 올리는 것을 허락해준 좌담 참여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인간 김현과의 첫 인연, 그리고 문학의 시작

 

정과리 : 올해(2020)가 김현 선생님 돌아가신지 30주기입니다. 627일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개월 상으로는 조금 남아 있습니다마는 이 좌담이 출판되는 게 여름호이니까요. 김현 선생님의 30주기에 딱 맞춰서 나가는 셈이 되겠습니다. 김현 선생님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까 김현 선생님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계 쪽에서 양적으로 축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문학 쪽에서의 접근이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우, 김현의 문학 비평에 대한 도식적인 재단이 많아 우려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도식적 재단의 원인으로는 사회사적 정황에 근거한 사전적 프레임화 그리고 김현 비평에 대한 선입관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왜곡된 김현상을 만들고 있다는 게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또한 그동안 김현 연구는 있는데 김현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인간 김현과 비평가 김현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 김현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까 비평가 김현을 잘못 그리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30주년을 맞아 세 가지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김현의 한국문학 비평에 대해 좀 더 촘촘한 논의를 모아보는 것입니다. 둘은 그동안 가장 소홀했던 부분으로서, 김현의 불문학 연구에 대해 해당 전공자들이 탐구를 하는 것입니다. 셋은 김현의 일상생활을 구성적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탐구는 불어불문학회비교한국학회에서 올해 7월 초에 공동 심포지엄의 형태로 학술대회를 열어 발표를 모두어 늦가을에 학회지에 싣는 작업을 진행중입니다. 마지막 기획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김현 선생님과 이런저런 인연으로 밀접한 친분 관계를 맺으셨던 분들입니다. 문학과 사람 양쪽으로 연결되었던 분들이지요. 김인환홍정선 두 분 선생님은 불문학을 하시지 않았는데도 김현 선생님과 연이 닿았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김연권이철의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조교를 하면서 김현 선생님을 지근에서 모시면서 선생님의 아주 사소한 사생활까지 다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오늘 의미 있는 사생활은 다 공개를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의미 없는 것은 안 하셔도 됩니다. (웃음) 우선 회상을 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인환 선생님께서 김현 선생님과 제일 먼저 친분을 쌓으셨던 거로 생각이 듭니다. 몇 년도였나요?

 

김인환: 1971년도인데요. 1970년에 문학과 지성이 나왔어요. 2호에 김붕구 선생님의 사르트르론이 실렸는데 제가 그 글을 읽다가 존제와 무를 존재와 허무로 보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존재란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규정하려면 무를 개입시켜야 한다는 의미의 독자투고를 보냈어요. 인간이 무를 세상에 끌어들여서 규정할 수 없는 아페이론apeiron인 존재를 한정하는 것이다. 색채는 연속되는 파장이므로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빨강과 파랑이 구별되지 않지만 인간이 그 파장 사이에 무를 개입시켜서 빨강과 파랑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는 수학의 허수와 같은 인식의 단위이지 허무가 아니다. 대체로 이런 의미였습니다.. 김현 선생이 이 독자투고를 71년에 나온 문학과 지성 3월호에 실어 주셨어요. 그 때 저는 대광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있었는데 김현 선생께서 학교로 교무실로 전화를 해서 종로 5가의 실로암 다방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몇 달에 한 번씩 전화를 하셨습니다. 72년에 제가 월간 문학에 김수영론, 현대문학에 박두진론을 응모하여 추천을 받은 후에 김현선생이 부르셔서 서정주론 한번 써 보라고 하시고 그것을 문학과 지성에 실어 주셨어요.

 

정과리: 술도 함께 하신 적이 많으시지요.? (일동 웃음)

 

김인환: 술도 사주셨는데, 하여튼 선생님은 문학 이야기 이외의 말씀은 거의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러 나갈 때는 아예 공부 얘기를 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나갔습니다. 이런 책을 읽어봐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정과리: 김현 선생님이 김인환의 문학교육론을 꼭 읽어봐야 된다,라고 쓰신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웃음) 한참을 명성만 듣고 읽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김인환: 74년에 제가 진주 경상대학 국어교육과의 전임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선생님이 제게는 좀 어려워서 연락을 못 드리고 그냥 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왔더니 어머니께서 김현이라는 분이 집에 오셔서 네가 요즈음 뭐 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하시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오래 안 보이니까 선생님께서 저희 집을 찾아 오신 거예요. 너무나 죄송스러웠습니다. 그 후로 거리를 안 두고 모시게 됐죠. 진주에서 저는 학교 사정상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한문을 가르치느라 5년 동안 현대문학에 관한 글은 전혀 못 썼어요. 유신 때를 한문 가르치면서 편하게 살았죠. 79년에 서울로 왔는데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어요. 휴교 기간에 너무 무료하고 해서 대충 급하게 써서 문고본으로 낸 게 문학교육론이었습니다. 그것도 12·12사태 직후에 검열에 걸려서 배포가 금지됐어요. 정지용 인용과 매판자본 운운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해요. 선생님께 한 권 갖다 드렸더니 선생님이 너무 좋아하시면서 큰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한국의 문학 선생들 특히 대학 교수들은 자기 잘난 줄만 알지 학생들을 위해서 문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꼭 나와야 할 책을 썼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제가 쓴 책 가운데 누구에게 칭찬을 받아 본 것은 김현 선생께 칭찬받은 문학교육론한 권뿐입니다.(웃음) 지금도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면서 문학교육 연구를 계속 해보라고 하시던 모습이 기억나고 그 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정과리: 사소한 질문이긴 합니다만, 김현 선생님이 선생님께 반말을 하셨습니까? 존댓말을 하셨습니까?

 

김인환: 반말과 존댓말의 중간이라고 할까요. 어느 날 무슨 얘기 하다가 문학 얘기를 여쭤보셔서 내가 국문학 얘기를 조금 했더니. ‘하하 역시 방법이 없네. 전공 나오니깐 긴장하는구나.’ 그러면서. ‘김 선생도 전공 얘기하니깐 바짝 어네.’ 이렇게 아주 반말은 아니더라도 대충 말을 놓으셨죠. 존댓말 들어본 기억은 없는 것 같아요. 아주 낮춤말은 아니고 오생근 선생을 대하시는 것과 거의 동등하게 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정과리: 제가 홍정선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도 김현 선생님을 통해서였던 것 같아요. 1980년대 전반기에 무크지 한다고 그랬었는데, 김현 선생님이 홍정선 교수를 반포치킨으로 부르셔서 첫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김현 선생님 어떻게 아셨어요? 그때 저보다 더 잘 아셨는데.

 

홍정선: 그게 정확하게.. 확인을 해보겠습니다만 한 85년경.

 

정과리: 83년이지

 

: 문학의 시대1호가 8312월 말경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84년 초에 김현선생이 이 책을 보고 저를 불렀다고 봐야겠죠. 73년 대학 1학년 때부터 김현 선생의 글을 읽고 사숙하면서 먼 거리에서 볼 때마다 , 저분이 김현 선생님이구나.” 이러면서 나름의 어떤 환상이나 생각을 가진 적이 참 많았죠. 73년 교양 과정부에 다닐 때 김윤식 선생하고 같이 한국문학사문학과지성에 연재하고 있었어요.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이 나오자 마자 사서 목차를 보면서 김윤식 선생 집필부분은 K, 김현선생 집필 부분은 H라는 표시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 그걸 구별했어요?

 

: 그랬다오. (웃음)

 

: 왜 구별을 했습니까. 이상한 취향이네.

 

: 왜냐면 문체가 너무 달라 가지고. (일동 웃음) 읽으면서 김현 선생님의 글은 이렇게 쉽고 유려하구나. 그러면서도 그런 게 어떤 전형적인 서울내기의 특성 말하자면, 서울의 우수한 사람들 특성, 이런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더 콤플렉스를 가지는 거고. 그런데 1학년 들어와서 나하고 주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이 불문과 학생들이 제일 많았는데요 한 반에. 이인성을 비롯해서 지금은 가까운 친구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걔들이 대부분 경기 출신에 전형적인 서울내기들인데 얼마나 빤질빤질해 보이는지.(웃음) 나하고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이런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문리대 교정에 드나들 때도 보면 김현 선생님이 걔들 데리고 앞으로 나가요. 미라보 다릴 건너서 술 마시러 가는 걸 부럽게 쳐다보고..

 

정과리: 동숭동 말인가요?

 

홍정선: 네 동숭동. 우리는 김현 선생님 같은 분이 없었지요. 그때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양대 잡지가 폐간이 되고. 그리고 저는 그때 신춘문예는 하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었고. 잡지로도 등단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한모 선생님이 몇 번이나 추천을 해주시겠다고 자네 리포트 가지고 현대문학이나 현대시학에 내가 추천하면 어떨까.” 뭐 그랬는데, 계속 거부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가 문학의 시대라는 무크지를 만들었는데요.. 주로 촌사람들과 함께지요. (웃음)

 

정과리: 평론하는 송승철, 김태현, 소설 쓰던 유양선 등과 함께지요?

 

홍정선: 그리고 영문과 출신으로 희곡과 소설을 쓴 이현석, 이런 친구들과 82년경부터 작당을 해서 무크지를 만들었어요. 풀빛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어 이 책을 누가 읽겠나 이런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치도 못했는데, 이인성이 찾아왔어요. 김현선생이 너를 보고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려고....

 

: 그때 정한모 선생님 조교를 하고 있었어요?

 

홍정선: 정한모 선생님 방 조교와 학과조교를 거쳐 823월에 한신대학 교수가 되긴 했지만 박사과정 재학 중이라 매주 서울대학에 오면 정한모 선생님 방에 조교처럼 앉아있고, (웃음) 그랬습니다. 어쨌든 제가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가졌던 이인성이 찾아와서 나를 보고, 걔는 다정한 어투로 말하는 친구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었지만(웃음) 다짜고짜 김현 선생이 반포치킨에서 너 좀 보잔다는 말을 툭 던지고 갔어요. 그래서 반포치킨에서 김현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거지요. 거기서 김치수 선생, 유평근 선생도 뵙고. 그게 이인성, 정과리, 권오룡, 진형준, 성민엽 등과 어울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현 선생의 목적대로 된 거죠.

 

정과리: 문학의 시대에 쓴 글이 뭡니까?

 

: 문학의 시대에 쓴 글이 70년대 비평의 정신과 80년대 비평의 전개 양상이란 제목으로 <문지><창비>를 비교하며 분석한 글인데 그걸 김현 선생이 보시고 좋게 생각했던가 봐요. 나중에 김병익 선생님도 아주 재밌게 읽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김현 선생님 외모는 전부터 많이 봐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쨌건 보름달처럼 부드럽고 둥근 얼굴을 가진 분이 앉아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이야기를 듣고 계셨죠. 그리고 저를 보고 앞으로 문지에 자주 나와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라고 하시고. 그래서 문지에 나가서 김병익 선생님하고 인사를 하고 김병익 선생님이 바둑 둘 줄 아냐고 해서 조금 둔다고 해서 김병익 선생님하고 바둑을 두기 시작하고 그랬지요. ‘문지에서 김현 선생님은 약간 구석진 데를 차지하시고 책을 촤라락 넘기시면서 (웃음) 대단히 빠르게. 책을 굉장히 빠르게 읽으셨죠.

 

정과리: 그렇죠. 거의 한 10초 단위로 한 장씩 넘기시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홍정선: 그리고 연구실로 가끔 김현 선생님을 찾아뵈러 올라갔어요. 그러면 약간 조명을 어슴프레하게 해놓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계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점심때쯤 이인성과 같이 가서 식사를 함께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김현선생 말씀이 아침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원고 40매를 아직도 못 끝냈다고. 이런 말을 듣고는 또 질렸죠(웃음). 그러니깐 두 세시간이면 40매 정도를는 썼다, 이런 이야기 같은데요. 지난 밤에 늦게까지 술 마시고 아침 출근해서 오전에 글 한 편을 끝낸다는 이야기잖아요.

 

정과리: 김연권 선생은 저하고 동기이고, 김연권 선생 처음 뵌게 불문과에서, 19762학기에 불문과에 진입을 하고나서 처음 뵈었죠? 그 이후에 조교하면서 김현 선생님을 곁에서 모셨습니다.

 

김연권: 옛날 얘기부터 하자면, 저희 때는 입학 후 3학기를 교양과정에서 머물다 2학년 2학기에 전공을 선택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저는 인문계열 소속으로 인문대 소속학과들이 개설한 다양한 전공 탐색 과목을 듣고 불문과를 택한 경우입니다. 제가 원래는 서양사학과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문과 전공탐색과목인 <불문학개론>이라는 과목을 듣고 방향을 튼 셈이죠. 당시 불문과에서는 동일한 과목을 김현 선생님과 유평근 선생님 두 분이 담당하셨는데 10여분의 불문과 교수님들 중에서 가장 젊은 분들이셨지요. 1975년도에 서울대학교가 관악산으로 이전하면서 교양과정부에 계셨던 김현 선생님과 사대에 계셨던 유평근 선생님께서 인문대 불문과로 소속변경을 하신 즈음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인문대 신입생들에게 김현 선생님에 대한 입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고 유평근 선생님도 큰 눈을 껌벆거리시면서 매우 흡입력 있는 강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당시 두 분의 연세가 아마 30대 중반이었을 것 같아요.

 

정과리: . 42년생이니까.

 

김연권: 정말 젊으셨던 건데 그 당시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으로 여겼죠. 그리고 그 당시에 학과장이 정명환 선생님이었어요. 정명환 선생님이 학생들을 자유롭게 너그럽게 보듬는 분위글 조성해주셨습니다. 그때 불문과 분위기가 굉장히 정말 리버럴했던 것은 정명환 선생님이 학과장으로 버텨주시면서, 그 후 성심여대(가톨릭 대학)로 떠나셨지만, 젊은 교수님들이 학과 내에서 당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참 좋았고 저희 학생으로서는 그 당시에 불문과 다녔다는 게 참으로 행운이다, 이런 생각을 저는 하고 있어요. 그 혜택을 사실을 그 앞에 서정기, 이인성, 정과리, 저희들, 후배들까지 다 불문과의 어떤 자유롭고, 교수 학생들 간의 서슴없는 소통. 그때 교실에서 배웠다기보다는 선생님하고 바깥에 나가서 술 마시면서 던져주시는 말 하시는 말씀 말씀들, 성경 구절 듣는 것처럼 귀 쫑긋하고 감격스럽게 듣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강의실에서는 학부 때 두 과목을 들었더라구요 제가. 성적표들 떼어 봤어요.(웃음) 그때 강의실에서 3학년 때 들었던 과목이 <불문학 비평사>, 4학년 때 <현대 불문학 비평>. 이걸 강의를 하셨어요. 근데 그 당시에는 사실 불어책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교보문고나 범한서적에서 어렵게 구할 수는 있었지만, 비평서라는 것이 학생들로서는 읽을 능력도 안 됐고. 그때 김현 선생님이 생트 뵈브Sainte-Beuve에서부터 뗀느Hyppolyte Taine까지, 실증주의까지 하시고. 그리고 현대에서는 신비평논쟁서부터 나중에는 뒤랑Gilbert Durand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강의는 당신이 일주일 동안 혹은 그전에 다 읽어놨던 노트를 거의 천천히 읽어가면서 설명해 주시고 저희는 받아쓰기. 그 당시에 강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는 프랑스 문학 비평사를 통시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시고자 하는 오랜 준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과리: 석사과정 시절까지 말씀해주세요.

 

김연권: 사실 제가 대학원에 입학해서 어떤 공부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광주 항쟁의 와중에서 사회문제에 아무래도 관심이 높아 정과리 선생하고 골드만, 루카치 등의 책을 읽기도 하던 와중에, 어느 날 술자리에서 선생님께서 김선생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조교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이셨습니다)은 무엇을 공부하려는지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아직 뚜렷하게 정하지 못해 고민 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정신분석을 한번 해 봐라. 정신분석적 연구가 중요한데도 아직 정신분석적 연구를 제대로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시며, 영어로 된 정신분석 개설서를 두 권 주셨어요. 그런데 읽어보니 정말 재미가 없더라구요.(웃음) 사실 저는 프로이트보다는 융이나 바슐라르에 훨씬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임무를 주셨으니까 아무튼 정신분석학적 문학 연구를 나름 박사과정까지 지속적으로 공부했습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에서도 프로이트에서 라캉에 대한 문학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것을 보면 선생님께서 10년 후를 내다보시면 저에게 임무를 주신 셈이시오. 제가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정과리: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초보적이었으니까요. 이철의 선생은 우리보다 4년 정도 후배시잖아요? 그때도 사실 김현 선생님이 여전히 학생들하고 가까우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나중에 편찮으실 때는 조금 멀어지셨지만. 한번 기억나는 대로..

 

이철의: 제가 79년에 입학을 했고, 두 분 선생님과는 달리 같은 계열이래도 일 년 하고, 그러니까 두 학기만 하고 2학년 때 전공 배정을 받았는데. 운 나쁘게 80년이 됐죠. 7910.26 터지고, 이듬 해 봄에 과 배정을 받은 거예요. 저희 학번 때는 학부과정에서 김현 선생님 전공과목 수업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주 뵐 수는 없고 글로만 알고 있는 김현 선생님께, 아까 콤플렉스라고 말씀하셨듯이, 굉장히 주눅이 든 상태였죠.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저희가 과에 진입했을 때 김현 선생님과 유평근 선생님 두 분께서 우리 학번을 단체로 신림동 술집에 데리고 가셔서 성대한 진입생 환영회를 베풀어주셨어요. 밤늦게까지 계시면서 두 분이 술 사주시고 이야기 나누어주시고. 그 분위기가 굉장히 놀랍고 좋았습니다. 전공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김현 선생님께 프랑스 비평사 중심으로 몇 개 강의를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83, 84년 받은 느낌은 적어도 강의 시간에 김현 선생님께서 굉장히 냉정하시고 건조하셨던 것 같아요. 문학론에 관한 열정적이고 멋진 얘기라든지 문학과 현실과 연결시킨 그런 뜨거운 이야기는 전혀 안 하셨던 것 같아요. 정말 하실 말씀만 딱딱 하시고 나가셨어요. 좀 차가우시구나. 이렇게 느꼈죠. 나중에 선생님의 글을 통해 되돌아보자면 그런 강의실의 분위기는 80년 광주 이후 국면과 관련이 있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특히 저로서는 발자크와 엥겔스의 리얼리즘의 승리 같은 것을 연결시키는 공부를 대학원에서 하고 싶었는데, 그런 제게 김현 선생님은 좀 멀리 계셨죠. 김현 선생님을 가까이 뵌 것은 박사과정 들어가서 조교를 할 때였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학과장을 맡아 하셨기 때문에 저로서는 거리감을 많이 좁힐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저희 학번들은 지금 생각하면 서운하다고 할 수 있는데, 윗세대 학번들보다 김현 선생님이 그렇게 관심과 애정을 주실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로서는 김현 선생님과의 인연이 좀 늦게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죠.

 

: 그러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특히 76학번 이후부터는 김현 선생님이 조금 냉정하게 대하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김연권: 김현 선생님께서 강의실에서 딱딱해 보인다는 인상에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강의실에서의 김현 선생님하고 사적으로 혹은 술집에서 뵙는 김현 선생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 있어 보여요. 특히 제가 학부 대학원 다닐 때 김현 선생님이 비평사 책을 준비하기 위해서 공부하신 것을 저희들에게 강의하실 때의 모습은...

 

정과리: 옛날엔 다 그랬죠

 

김연권: 그러다 보니까 그 강의가 다소 재미가 없었던 거죠. 그래도 존경하는 김현 선생님의 강의니까 일종의 경외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나름 열심히 따라갔던 거죠. 프랑스 시와 문학 상상력을 다루는 유평근 선생님 강의는 흥미진진하고 흡입력이 있었떤 반면, 김현 선생님 강의는 다소 건조하다는 그런 느낌은 들었어요. 그런데 김현 선생님 <프랑스 비평사 : 근대편> 서문을 다시 읽어 봤더니 선생님 본인도 비평사 강의를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괴롭게 하셨던 것 같아요. 이런 구절이 있어요. “이론 서적을 뒤지기보다는 작품을 앞에 두고 연금술사들의 고독한 몽상를 즐기고 싶다.” 비평사 서문을 쓰시면서 나 이거 하기 싫은 일이었다라고 고백하신 것 같아요.(웃음)

 

이철의: 70년대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80년대 강의실에서의 김현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은 나중에 다른 분들 글 읽어보고 선생님 글 읽어 보니까, 그때가 내적으로 괴로우실 때고. 강의 주제가 당신께서 프랑스 비평사라든지 르네 지라르라든지, 푸코라든지 연구하고 계신 분야를 수업시간에 학생들한테 요점 위주로 전달하시는 식이라서 굉장히 건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중반. 알고 보니 다 사연이 있으시고...

 

탁월한 조직가 김현

 

정과리: 말씀을 안 하셨지만 그 당시에 광주에 대해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으셨고 그게 나중에 르네 지라르 연구로 나오고 미쉘 푸코 연구인 <시칠리아의 암소>도 연관이 있는데, 내색을 전혀 안 하신 면이 있었죠. 그 얘기는 다시 하게 될 것 같구요. 공부 쪽 얘길 더 헤보죠. 김현 선생님의 또 다른 능력인데, 능력과 의욕이 있는 사람들 불러다가 모임을 만들고 공부시키는데 아주 달인이셨던 것 같아요. 선생님 자신이 산문시대로부터 시작해 68문학』 『사계를 거쳐서 문학과 지성을 만들 때까지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후학들에게도 그걸 노골적으로 종용하곤 하셨죠. 김인환 선생님께서 오생근 선생님 등과 계간지 외국문학(전예원 간, 1984-1988)을 하게 된 것도 그 뒤에 김현 선생님이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인환: 네 그랬습니다..

 

정과리: 그 당시 김현 선생님이 외국문학에 대해 칭찬하시는 걸 여러번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나온 외국 문학 연구로서 세계적 수준의 잡지를 하고 있다라구요. 그때 편집위원이 오생근, 이성원, 김인환, 안삼환 네 분이셨지요. 그런데 오생근 선생님과 김인환 선생님을 묶어주신 게 김현 선생님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 한 번 거기에 대해 회상을 해주실 수 있는지.

 

김인환: 김현 선생님이 오생근이라고 너랑 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시고 자리를 만들어 만나게 해 주셨어요. 그때 오생근 선생이 서울대 조교를 하고 제가 고대 조교를 해서오선생이 고대에도 오고 제가 서울대도 가고 하면서 띄엄띄엄 만났습니다. 성균관대 골목 어디서 만나 문학 얘기를 하던 일과 고려대 도서관에서 심훈 전집을 빌려서 갖다 준 일이 기억납니다. 그러다가 저는 진주로 가고, 오 선생은 프랑스로 갔습니다. 오래 서로 못 만났었는데 어느 날 오생근 선생이 전화를 해서 <외국문학>을 같이하자고 했습니다. 즉답을 안하고 망설이고 있었더니 오 선생이 이런 일이 있어야 가끔 만날 것 아니냐고 다시 권하기에 같이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다지 아기자기한 사이는 아니지만 오 선생과 저는 40년 넘게 물처럼 담담하게 같이 읽고 같이 웃고 같이 늙고 있습니다.(웃음) 특별히 기억할 건 없는데 그래도 꾸준히 만나고 만나면 좋아서 웃고 이러면서 지금까지...

 

정과리: 제가 생각해 볼 때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고 함께 다룬 최초의 잡지였다는 게 김현 선생님의 찬사의 근원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함께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표지가 오생근 선생님과 김인환 선생님 아니었을까 합니다.

 

김인환: 오생근 선생이 주로 모든 계획을 하고 일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맡게 하는, 그런 식이었죠. (웃음) 저는 오 선생이 한 세 번쯤 시키면 그 중에서 하나쯤 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오생근 선생이 누구누구하고 같이 만나자 해서 만난 사람이 꽤 많아요. 자기 불문과 친구들하고 저하고 묶어서 불문과와 국문과가 모인다고 불국사모임으로 하자고 한 적도 있어요.(웃음) 오생근 선생이 사람을 모아서 같이 일하는 걸 좋아해요. 스타일은 달라도 김현 선생하고 비슷한 점이 있는 거죠.

 

정과리: 홍정선 선생도 김현 선생님이 연락을 해서 <우리 시대의 문학>과 연결이 되었는데, 그게 홍 선생에겐 행운이었습니까? 불행이었습니까?

 

홍정선: 글쎄, 나로서는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정쩡한 인간의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인데요. (웃음)

 

정과리: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보시죠.

 

홍정선: (여기 계신) 선생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서울대 국문과라는게 정말 재미없는 실증주의. 아무런 감정도 뭐도 없는 그냥 그런 글을 쓰게 만들던 곳이거던요.

 

정과리: 이거 공개됩니다.

 

홍정선: 괜찮습니다. (일동 웃음) 그런 실증적 글을 쓰던가 아니면 단순하게 문학과 역사, 문학과 사회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서 문학 작품을 설명하는, 저급한 속류 사회학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분위기에 놓여 있었는데요. 물론 약간 예외적인 김윤식 선생님이 계시긴 했지만 그분은, 자신이 인정하는 극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무척 단호하고 무서웠습니다. 김윤식 선생은 <현대문학> 평론 추천 소감에서 나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사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썼잖아요. 학생이 맘에 안 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워놨다가 말 한마디 안 하고 내쳐버리고...... 인격모독적 용어나 발언을 (웃음) 가차 없이 내뱉으시니까. 저는 다행이 예외적 학생으로 인정받아서 형편이 나았습니다만, 그래도 국문과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서야 될지 발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런 저가 서울대 국문과에서도 아웃사이더가 되고, 그렇다고 불문과 소속도 못되었으니 어정쩡한 인간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정과리: 선배인 최원식 교수 등과 잘 지낸 것으로 아는데........?

 

홍정선: !, 그건 서울대 야간부와 관계가 있습니다. 서울대 밖에서 서울대의 실증적 학풍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스스로를 서울대 야간부라 지칭했어요.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갈등 때문에 국문과가 체제비판적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분열하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 좌장분이 임형택, 최원식 선생이고 나중에 연세대 이선영 선생이 거기에 가세하면서 민족문학사 연구부소를 탄생시켰지요.

 

: ~임형택, 이선영 교수님이 주도 인사셨군요?

 

홍정선: 김명호 선생, 김사인 선생, 정치인 김도연도 멤버고...... 데모하다 잘린 학생들 혹은 서울대학에서 아웃사이더로 몰린 사람들이 주축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모임에 나가면서도 이쪽에도 저쪽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현 선생님이 손을 내밀어 왔고, 김병익 선생님의 따스한 인품에 감동하면서 나라는 어정쩡한 인간이 탄생한 거지요. 우리 세대의 문학을 하던 이인성, 정과리 등과 어울리며, 언어와 문학, 상상력과 인간의 관계 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고.......

 

정과리: 어정쩡하다기보다는 집을 찾으셨군요.

 

홍정선: 김현 선생은 이런 저의 모습을 말없이 웃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다. 저는 어쨌건 김현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문학에 대한 근원적인 애정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배려를 배웠는데, 국문과에서 누구에게도 배울 수가 없던 것들이었습니다(웃음). 김현 선생을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 된 문학의 길, 풍요로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아야 옳겠지요. 선생님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분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술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차츰차츰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글을 어떻게 써야할까 등을 모색해 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인간의 욕망을 함축한 비유적 언어라는 것도 제대로 깨달았고요.

 

정과리: 아마 제 생각에는 홍정선 선생을 우리하고 만나게 해주신 것은 김현 선생님이 생각하셨을 때 국문과에 장점이 있다면 아주 실증적인 정확성. 지금도 홍선생은 그 점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마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저는 사실 실증이라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김수영론을 등단 직후 썼을 때 김수영의 생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독자한테서 항의 전화도 받았어요. 그 정도였는데 아마 김현 선생님은 실증적인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저처럼 그런 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하고 맺어 줌으로써 양쪽의 장점을 같이 보완하게끔 해주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김인환: 김현 선생께서 저에게 <한꾹문학사>에 부록으로 붙일 서지 목록을 만들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서지목록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 주신 거죠.

 

홍정선: 당시 서울대 국문과에서는 논문의 기본적인 생명력을 실증성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불문과 중심의 이 친구들을 보완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김현과 술

 

정과리: 술 얘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희는 김현 선생님이 반포치킨에서 자주 술 사주신 게 일종의 감염이 되어서, 김연권 선생님도 잘 알겠지만 저희들은 석사학위만 받고 대학교수가 된 세대였는데, 대학교수 되어서 제일 먼저 한 게 학생들하고 술 먹는 일이었어요. 전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충남대학교에서 오라고 해서 갔는데 가서 한 일이. 복학생들 나이가 저하고 비슷했었어요. 그 친구들 데리고서 계룡산에 가서 술 먹고 그러고 살았습니다. (일동 웃음) 김인환 선생님이 말술이셨던 것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인환: 그때 저는 술을 잘하지 못했어요. 선생님이 제가 김붕구 선생님 독후감을 써냈더니 나오라고 해서 술을 사주시면서 몇 차를 갔는지 몰라요. 그리고 나중에는, 서울대 문리대 옆에 있는 동숭동 김붕구 선생님 댁으로 갔어요.(일동 웃음) 가서 얘가 바로 독후감 쓴 김인환입니다하셨더니 김붕구 선생님께서 ‘300매 글을 10장으로 비판해? (일동 웃음) 그러시면서 좀 언짢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김현 선생님이 그래도 얘가 나이에 비해 그렇게 본 게 용감하지 않습니까하시고 김붕구 선생님 댁에서 나오셔서 니가 좀 버릇없게 쓰긴 했어’(일동 웃음) 하시더라구요. 가끔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셔서 기보면 인사동 어딘데 최인훈 선생님, 고은 선생님 이런 분들이 계셨어요. 같이 술을 마셨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죠.. 선생님하고 저하고 둘이 한 적은 몇 번 안 되구요. 대체로 모이시는데 저를 데리고 가셨거든요. 제가 가던 이태원에 몇 번 모시고 간 적은 있지만 술을 저와 둘이 하신 적은 거의 없는 것같아요. 80년 무렵 어느 날 반포치킨에서 술을 드시다가 전라도는 천형이야라고 하시던 말씀에 마음이 아팠던 일이 잊히지 않는군요.

 

홍정선: 그런 얘길 들었습니다.

 

정과리: 김인환 선생님이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하셨는데 김현 선생님이 <불꽃의 말>이라는 글에서 술 이야기를 하시면서, 술은 대화를 위해서 마신다는 점을 강조를 하셨지요.l 선생님 술자리는 거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먹는 자리였습니다. 단 둘이 마시는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여럿이 마시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문학 이야기하고. 그 당시에 김현 선생이 개발한 작품 감상에 관한 단어로서 재밌다였습니다. ‘니 작품 재밌더라.’ ‘니 글 재밌더라.’ 이런 얘기 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황동규선생님은 되게 싫어하셨어요. ‘재밌다니 감동했다고 해야지.’ (일동 웃음) 어쨌든 이 술자리를 언제나 문학적인 대화의 자리로 만드셨던 기억이 납니다. 술에 대해서 혹시 기억나시는 것 있으면 (홍정선 선생님) 말씀해주시죠.

 

홍정선: 김현 선생님이 처음으로 불러낸 것도 반포치킨의 술자리였지만. 하여튼 김현 선생님을 술을 안 마시는 자리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작고하시기 일주일 전이었던가, 정과리, 이인성 선생 등과 찾아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때 김현선생은 산발이 된 머리와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누워계셨는데, 우릴 보더니 사모님 에게, ‘윗도리 지갑에 수표가 들어있으니까 20만 원만 꺼내서 얘들 주라고 그러시더라구요. 당신은 함께 못하지만 밖에 나가 술이나 마시라고.

 

정과리: 그러셨지요.

 

홍정선: 그 말씀이 너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와서.....김현 선생님에게 술이라는 것은 뭐랄까 문학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술은 물이 아니고 불이다. 그래서 마시는 사람의 가슴을 뎁히고 그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뎁히고 그 말은 따듯하게 상대방을 감싼다. 술자리 분위기는 대화의 분위기지 남을 헐뜯는 자리가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싫다.”(불꽃의 말) 저는 기금까지 선생님의 그 말을, 술을 마실 때마다 평생의 신조로 되새기고 있습니다.

 

정과리: 김연권 선생님, 이철의 선생님도 김현 선생님과의 술 인연이 깊죠? 조교를 하셨으니.

 

김연권: 그렇지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선생님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있었죠. 제가 대학원 석사과정 들어갔을 때 이인성 선생님이 선임 조교였고, 저는 후임 조교였죠. 그 당시 김현 선생님, 유평근 선생님께서는 조교들 고생한다고 술자리에 데리고 가시곤 했습니다. 술 먹으러 가는 시간은 통상적으로 좀 이른 편, 대체로 오후 4시경 이었습니다. 특별한 일정, 예컨대 문학과 지성사 가시는 날을 빼놓고는, 거의 언제나 반포치킨으로 향하셨죠. 사실 반포치킨은 그리 좋은 술집은 아닌데 왜 반포치킨일까 생각을 해 봤는데. 우선 선생님 댁이 반포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안주 부담 없이 술값이 싸기도 했고 외상이 가능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선생님께서 거의 모든 자리의 술값을 지불하셨고, 어떨 때는 밀린 외상을 한꺼번에 갚기도 하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조교 하던 때가 광주 항쟁이 일어난 직후인데, 바로 김인환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전라도가 천형인가라는 말씀을 술자리에서 19805, 6, 7월에 특히 많이 하셨어요.

 

정과리: 기억납니다.

 

김연권: 그때는 공식 언론에서는 전혀 보도가 안되고, 외신에서 전하는 실상이 이렇다더라 하면서 굉장히 마음 아파 하셨어요. 그 후에 연이어 일어난 일이지만 문지 폐간과 김치수 선생님 해직을 두고 더욱 상심하셨구요. 저의 기억으로는 1980년 상반기에는 문학 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을 토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선생님께서 크게 화를 내시지는 않으셨어요. 내적으로는 엄청난 고통과 분노에 휩싸였는데도 말이죠.

 

이철의: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은 저희가 과에 진입했을 때 밤늦게까지 술을 사주셨어요. 굉장한, 희한한 경험이었어요. 김현 선생님과 술자리의 감화력 하면 그것 말고 각별히 기억나는 게, 80년 봄에 저희 학년 데리고 대성리인가로 MT를 가셨는데, 제 동기 중에 대구 애가 있었어요. 이 친구가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아주 대단한, 착실한 모범생이었어요. 이 친구가 김현 선생님의 그 MT 하룻밤 술자리에서 180도로 바뀌었어요. 술 절대 안 하고 정말 학교공부만 하며 교회 열심히 다니는 그 친구가 그날 김현 선생님과의 술자리 만남 이후 확 바뀌었어요.

 

김인환 :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철의: 그 친구 그 이후 굉장히 험난하고 세속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는데 지금도 만나면 술잔 기울이며 김현 선생님 이야기를 해요. 80년 봄에 김현 선생님께서 그때 얼마나 복잡하셨을 때였겠어요. 학생들도 마찬가지구요. 마지막으로 제가 선생님과 술자리를 같이 한 거는 88년 김붕구 선생님 정년퇴임 하실 때 학교 행정과 관련한 일을 처리할 때였어요. 김붕구 선생님이 아끼는 제자가 김현 선생님과 유평근 선생님이니까. 또 그때는 유평근 선생님이 학과장일 때에요. 김현 선생님 바로 다음에. 그걸 처리하러 가셨는데, 저를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저를 왜 데리고 가지? 나중에 알아보니까 사모님 계시는데 사모님이 얼마나 학교나 과에 서운하시겠어요.

 

정과리: 그렇지요. (일동 웃음)

 

이철의: 그런데 김현 선생님과 유평근 선생님만 가시면, 두 분은 제자잖아요. 사모님이 볼 때도. 그래서 한참 어린 저를 데리고 가신 거 같아요. (웃음) 이건 제 추측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한 두어 시간 참 저로서는 굉장히 불편한 자리에 있다가 반포로 돌아왔는데 두 분이 아마 심사가 복잡하셨는지 술을 많이 드셨어요. 저랑 셋이. 그때가 아마 거의 마지막 술 드실 때였던 것 같아요. 그때도 제가 경험한 바로는 술자리에서 선생님은 모든 것이 긍정적이세요. 제가 그때 무슨 엉뚱한 말인가를 하니까 예의 그 웃음을 터뜨리시며 쟤는 리얼리즘 공부한다고 저렇게 해석하는 거야 맨날.’ 그렇게 좋게 말씀해주셨는데. 나중에 돌이켜 보니까 선생님께서는 술자리에서 정말 그렇게 다 꾸짖고 싶고, 못마땅해 보여도 늘 좋은 방향으로만 말씀해 주셨던 것 같아요.

 

김연권: 못마땅한게 분명 많이 있으셨을 텐데 야단을 치지 않고 말씀하시더라도 굉장히 완곡어법으로,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할 정도의 완곡어법으로 넌지시 가리키셨지요.

 

이철의: 감화력이 대단하셨습니다.

 

김연권: 저희들이 술을 먹으면 70년대 말도 그렇지만 80년대도 거나하게 취하면 기분 좋으면 어디서든 노래 부르고 그랬었어요. 김현 선생님이 부르는 노래는 꼭 하나 애창곡이 하나 있었어요. <엽서>.

 

: 지금 한번 불러보시죠 (웃음)

 

김연권: 아뇨 아뇨. 그게 정윤선이라고 하는 가수인데 가수 이름도 생각이 안 나서 한번 찾아봤어요.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만 미련을 갖지 말아요.” 이런 노래인데, 노래 부르는 모습도 입을 크게 안 벌리세요. 지그시 눈을 감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여성적으로 부르세요. 술 먹고 취하면 소리 지르고 그러는데, 술을 굉장히 취하셨을 때도 고상하게 앉아서 입을 적게 벌리고 고운 목소리로 부르시는 게, 참 되돌이켜보면 그게 인상적이에요.

 

홍정선: <청량리 부르스>. 부르셨던 것 같은데?

 

정과리: <청량리 부르스>는 김현 선생님이 부르시긴 했는데 황지우씨가 좋아했어요.

 

김연권: 그래서 오는 길에 사실은 <엽서>라는 노래를 유튜브로 계속 들으면서 왔어요.(웃음) 왜 선생님이 애창곡으로 즐겨 부르셨을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하여튼 그 노래를 즐겨 부르셨어요.

 

홍정선: 작고하시기 직전에는 전라도의 민요에 관심이 많으셨지요.

 

정과리: 클래식으로는 바흐를 좋아하셨는데. 그런데 제가 이것은 얘기를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현 선생님 따라 반포치킨에서 참 여러 번 마셨습니다마는 나중에 말씀을 해주신 건데 1977년도 가을 때부터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포치킨에서 술을 드셨다고 그러셨거든요. 왜 그러셨냐고 여쭤봤더니, 백낙청 선생의 역사적 인간과 시적인 인간이라는 글 얘기를 하시는 거에요. 그게 표면적으로는 롤랑 바르트를 비판한 글이지만, 실은 김현 선생님을 겨냥하고 쓴 글이에요. 백낙청 선생이 1974년에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을 발표하면서, ‘민족문학이라는 노선을 선포하지요 그 이후 이론적 발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마도 4.19 세대에 속하면서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한 문학과 지성에 대한 대결의식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문지의 중심에 놓인 김현 선생을 타격하신 거죠. 어쨌든 김현 선생은 그렇게 읽으셨어요. 제가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을 다시 읽어 봤는데, 역시 1970년대 특유의 단순 이분법에 근거해 역사와 사회에 투신하지 않는 입장을 주관론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한 글입니다. 김현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 공격에 대해서 반론을 쓰기가 괴로웠어요. 논리적으로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그에 대해 반론을 펼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담스러우신 거에요. 당시에는 모든 걸 흑백논리로 재단하기가 일쑤이니까. 자칫하면 보수반동의 입장으로 몰릴 수도 있고 또 백낙청 선생이 정치적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는 마당에 장애가 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니 그대로 무방비 상태에 처하고 만 거죠.

 

홍정선: 당시에는 수난자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김연권: 그게 40년도 전 일이네요.

 

정과리: 그렇죠. 당신이 때마다 얻는 마음의 상처를 안으로 삭이는 일이 습관화되셨고, 음주가 그걸 외현하는 행위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술드시는 모습이 그토록 부드러웠다는 건 김연권 선생하고 이철의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술이 분노를 드러내기보다는 다스리는 역할을 했으며, 술을 드심으로써 어쨌든 간에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를 쓰셨던 거 같다,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저는 참 안타까워요. 그때 술을 좀 자제하셨더라면...하는 마음이 있는 거지요. 나중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1990년도만 해도 암에 대한 한국 의학의 지식이라는 게 거의 속수무책이었어요.

 

김연권: 사실은 술 드시는 거에 이외에 몇 가지 다른 여가 활동도 하셨어요. 자주는 안 하셨지만. 그 당시 80년대 전반기쯤에 김치수 선생님 해직되고 나서는 김치수 선생 따라서 산을 다니셨고, 야구장에도 좀 가셨어요. 프로야구 출범하고 고교야구도 가셨지만 해태 타이거즈 응원하러 가셨는데 그때 이청준 김치수 선생하고도 가고 서정기 등 제자들과도 가셨죠. 저도 같이 가서 응원 구호도 외치고 했지요. 야구광은 아니셨던거 같고...

 

홍정선: 그때 김현 선생님이 해주신 재밌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제가 선생님 어느팀 응원하세요? 그랬더니 삼성하고 싸우는 팀이라고. 저는 야구는 좋아하진 않지만 삼성을 응원하고 있었지요. 저를 놀리신 것이기도 했고 언중유골인 면도 있었고. (일동 웃음)

 

김연권: 사실 저는 대전 출신이라 OB베어스를 응원했는데, 거기 멀쩡히 껴서 해태 타이거스 응원했지요 (웃음)

 

이철의: 그때 대학원생들한테 야구 장비 사주신 적도 있습니다.

 

김연권: 정명환 선생님 학과장일때죠?

 

이철의: 김현 선생님과 유평근 선생님 두 분이 돈을 대셨다고...

 

김연권: 그리고 영화도 많이 보셨어요. 어느날 연권아, 영화나 보러가자하시면서 데리고 가셨죠. 야구 얘기 나오니, 그 영화가 생각이 나네요. 더 내츄럴The Natural이란 영환데 야구영화예요. 야구선수, 굉장히 유능한 선수인데 킴 베이싱어한테 유혹당해서 다 털려서 나중에 폐인이 되었다가 재기하는 야구선수인데, 영화는 되게 황당하고 재미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왜 저걸 보러 가셨지? 선생님 취향 아니거든? 이게 뭔가 답답하셨으니까 그냥 개봉영화 보러 가자 그러신 거 아니었나 싶고.

 

김인환: 저도 어느 날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셔서 쑨원의 동지인 추근(秋瑾)이라는 여자 혁명가에 관한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제가 중국의 잔 다르크네요 했더니, 선생님께서 저를 똑바로 쳐다 보시면서 중국의 유관순이지라고 하셨습니다.(일동 웃음) 깜짝 놀랐어요. 그렇구나. 한국인이 한국인의 입장에서 봐야지 왜 서양인의 시각으로 보냐? 선생님의 한마디 말씀에 저는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간단한 말씀이지만 굉장히 오래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정과리: 늘 한국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셨어요.

 

김인환: 상당히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이철의: 강의실보다는 특히 술자리에서 영화 같은 거 이야기하실 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말씀을 하셨어요. 바둑 이야기도 종종 하신 것 같아요. 당시 화제였던 조훈현, 이창호 사제관계 얘기하시면서, 승부와 인간의 정리 같은 것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말씀을 해주시고요. 그런데 술자리하면 떠오르는 게, 조교 할 때 보면, 전날 많이 드셔도 아침 8시면 꼭 출근하시거든요. 그때 연세가 40대이신데 저는 김현 선생님이 술자리에서 취하신 모습을 못 뵀어요. 그래서 김현 선생님이 술을 잘 안 드시는 줄 알았어요. 술자리를 좋아하시지만 폭주는 안 하시는 분. 선생님은 술에 관해 굉장한 절제력이 있으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깐 밤에 술을 그렇게 드시고 아침에 글을 쓰시고. 체력 말고도 아마 의지, 정신력. 그런 걸 총괄하는 말이 절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김현 선생님하고 술자리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람을 바꿔놓는 능력과 늘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여주신다는 거, 그리고 절제예요. 제일 부러운 모습...

 

김인환: 출판사나 잡지사나 무슨 회의가 있잖아요. 저는 선생님이 늦으시는 걸 한번도 못 봤어요. 근데 알아보니까 보통 30분이나 한 시간 전에 일찍 오셔서 그 주변을 걸으시던가 어디서 책을 보시던가 하다가 시간 맞춰서 들어오시는 것이더라구요. 그것도 정말 놀라운 절제라고 하겠죠. 쉬운 것 같지만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김연권: 저는 정말 놀란 것 중에 하나가 반포치킨에서 술 많이 드시고 비틀거리며 귀가하셨는데, 제가 전해드릴 게 있어서 제가 뒤따라 댁에 들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조금 전만해도 비틀거리시던 분이 어둑한 거실 소파 속에 파뭍혀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안경은 머리에 걸치시고 책을 코 앞에 붙이신채 계시더라구요. (일동 감탄) 대개는 술 취하면 쓰러져 자는데 그게 참 놀라운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정과리 선생도 그러지 않아요?

 

정과리: 아니 나는 그냥 자죠. (웃음) 어쨌든 김현 선생님의 사회인으로서의 면모의 근본이 절제에 있다고 하셨으니, 자연스럽게 김현 선생님의 한결같은 일과를 짚어 보겠습니다. 우선 8시에 무조건 출근하십니다. 출근하셔서 연구실로 들어가면 책들이 좍 무슨 더미를 이루면서 쌓여 있습니다. 그게 전부 선생님에게 온 책들, 특히 시집들이죠. 그걸 하나하나 읽으시면서 읽을 게 별로 없는 건 탁 던지세요. 던진 것들이 거기 쌓여가지고 그렇게 일종의 무덤을 이루고 있었고 그중에서 뭔가 건질만한 게 있으면 꼭 월평이나 어디에 쓰시고 그러셨어요.

 

김연권: 술이 아무리 취하셨어도 일찍 오셔서 그거부터 넘겨 보시는 거 같았어요. 아침에 편지 전해드릴려고 문을 두드리면 시집들 보고 계시더라구요.

 

정과리: 그리고 그 다음 하시는 일이 프랑스에 체류하시는 불문과 동문이신 신모 선생님이신가? 그분이 르 몽드지를 부쳐주셨어요. 르 몽드주간판 Hebdomadaire’이었어요. 거기 서평란이 아주 알찼어요. 그걸 빠짐없이 읽으셨어요. 그래서 당시의 유럽에서의 문학적 동향과 사상적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을 하고 계셨지요.

 

이철의: 그건 김현 선생님만 보셨어요.

 

왕성한 독서가, 비평가 김현

 

정과리: 김현 선생님만 보셨죠. 그리고 나서 시간이 되면 강의하시고 그 다음에 4, 5시 되면 술 드시러 가십니다. 그리고 그전에 혹시라도 좋은 영화 들어오면 11시에 일찍 나가셔서 조조 영화를 꼭 보세요. 영화평은 많이 안 쓰셨습니다만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에 대한 글(겉멋부림의 세계)을 보면 짐작하시겠지만 영화에 대해서 상당히 조예가 깊으셨어요. 외국문학 전공한 분들 중에 영어로 나온 비평문을 대충 요약하시는 식으로 영화평 쓰는 분들 여러 차례 봤습니다만, 김현 선생님 영화평은 직관직설, 바로 보고 바로 해독하는 그런 거였습니다. 어쨌든 4시에 나가시면 늘 빠짐없이 술을 드셨고 저는 선생님 술 취하신 걸 딱 두 번 봤습니다. 어지간해선 술 취하지 않으셨어요. 말술로 엄청나게 드셨는데. 그리고 나서 어떻게 아침에 8시에 출근하시는지, 그게 너무나 신기했어요. 책 읽는 속도가 너무 빠르셔서 책을 건성건성 넘기시는 듯이 읽었는데 다 읽으셨거든요. 그래서 여쭤봤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냥 읽는다고 하시더라구요.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속독을 익히셨던 케이스인거죠. 제가 그게 정말 부러워서 배워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만 되지를 않더군요. 제가 60이 넘었거든요. 예순이 되니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듬성듬성 읽는 방식으로(웃음)

 

김연권: 물과 꿈에서 바슐라르가 나는 책읽다라는 동사의 주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김현 선생님도 몇몇 글에서 그 대목을 인용을 하셨더라구요. 스스로도 책읽는 자세에서 바슐라르와 공감되는 자세를 갖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이철의: 약간 여담인데 김윤식 선생님은 약주 안 하시죠?

 

홍정선: 거의 안 했죠.

 

이철의: 제가 아는 정말 생산량이 굉장히 많은 분이 김현 선생님인데, 정말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김윤식 선생님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이 쓰셨고 제가 전공하는 프랑스 작가 발자크도 어마어마하게 썼잖아요. 근데 발자크는 담배하고 술을 엄청 절제했어요. 정신을 갉아 먹는 거라 해서 특히 담배는 절대. 커피는 들이붓는 수준이었고. 셋 중에 유일하게 술을 즐기신 김현 선생님은 수수께끼예요. 물론 빨리 읽으시고 그런 게 있겠지만 어떻게 그런 생산량이 나올 수 있는지. 그것은 정말 지금도 경이롭습니다.

 

김인환: 비평가로서 시인이나 작가를 가장 많이 다룬 비평가 중 한 분일 거예요. 한국문학 이론서가 3권이고 프랑스 문학 연구서가 9, 비평집이 9, 산문집이 4권인데, 학생들에게 김현 선생님 평론집에 나오는 시인과 작가를 한번 세어보라고 했더니 150명이 넘는다고 하더라구요. 작가가 150명이니까 한 사람의 작품을 두세 개로만 계산해도 삼사백 편을 다루신 것이거든요. 우리나라 평론가 중에 그 정도 작품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돌아가신 연세를 생각하면 엄청난 양이지요.

 

정과리: 거기다가 눈썰미가 대단하셨기 때문에 더 일찍 돌아간 채광석 씨가 김현 선생님을 두고 김현 정도의 해결사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문법적인 것이든 의미나 내용상의 것이든 시문장의 애매성과 씨름하다 보면 시 전체의 흐름을 까먹기 십상인 것이다”(김정환의 예수)라고 깐죽거릴 정도로 정확히 읽는 정도가 감히 따라갈 수가 없었죠.

 

김인환: 우리가 봐도 수수께끼죠.

 

홍정선: 김윤식 선생이 김현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계셨는데. 근데 학생들 앞에 김현 선생님에 대한 언급을 하는 방법이라는 게, 김윤식 선생 어법이 엄청 독특한데요.

 

정과리: 뭐라고 하셨어요?

 

홍정선: 학생들보고 비평은 학문이 아니다. 술자리, 술집에서 하는 거지 연구실에서 하는게 아니다. (일동 웃음) 김현을 봐라. 그러니 제대로 비평가가 되려면 술집에 가서 해라. 이런 식으로 말을 해서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요. 제가 보기에 그런 어투에는 김현 선생에 대한 어떤 애정어린 콤플렉스와 함께, 학문을 하는 자신과 비평을 하는 김현 사이의 구별점을 찾음으로써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는 태도가 숨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과리: 김현 선생님 돌아가신 후에 김윤식 선생님이 저에게 전화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김현 교수를 꿈에서 봤다.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가만히 있었어요. 여하튼 김현 선생님의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라는 책을 다시 한 번 들춰봤는데 거기서 다룬 시인들 중 70프로 이상이 지금도 살아남은 거에요. 대단한 거지요 그 안목은.

 

김연권: 통찰력이라고밖에 할 수 없죠.

 

홍정선: 김윤식 선생은 김현 선생에게 나름의 존경심이 있기는 한데...... 그런데 국문과에는 문학비평을 하는 것을 폄하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걸 저에게 함부로 말하시곤 했지요. 외국문학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심부름이나 하는 자네 같은 사람이 문제라고(웃음)

 

김연권: 사실은 불문과에서도 몇 분 빼놓고는 문학 비평가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비평 활동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자면 김현 선생님 부르실 때 광남이는 말이지, 김현 선생 혹은 김현이라고 안 하고 김광남이는, 광남이는 이렇게. 그런 분위기가 지금 국문과 선생님들의 분위기하고 동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독교와 김현

 

정과리: 이제 종교 문제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김현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가셨지요. 기독교의 계율에도 충실하셨지요. 그래서 대학교 2학년때까지 술을 전혀 못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 때 술에 입문을 하셔서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갔다가 아버지한테 들켜서 섬돌에 무릎 꿇고 밤새도록 있으셨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이후에 계속 술을 드셨어요.(웃음) 그게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홍정선 선생이 아시는 게 있지요?

 

홍정선: 기독교 이야기를 김현 선생께 한두 번 여쭤 본 적이 있지만 김현 선생님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준 적은 없었습니다.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어릴 때 엄마 아버지가 <구약>에 관해 이야기해주시던 것을 일종의 한국의 설화 같은 것들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들을 써놓으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제 첫 직장이 한신 대학교였습니다. 한신 대학교는 기독교 장로회 사람들이 운영하는 학교인데, 그 기반이 전라남도예요. 전라남도가 교세의 90프로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요.

 

정과리: 만주가 아니고?

 

홍정선: 그 기원은 만주 용정 일대이지만 지금 현재의 교세는 그래요.

 

정과리: 아 그 당시에?

 

: 해방 이후 분단이 되면서. 기독교 장로회는 호남, 특히 전남이 핵심기반이 되었어요. 한신대 교수로 가자마자 당시 한신대학은 반체제 시국선언의 선두에 서 있었는데, 시국선언이 있을 때마다 불려가서 문장 만들고 다듬고 고치고 그랬습니다. 안병무, 문동환 이런 분들이 막후에 있었고. 고재식, 김성재 이런 사람들이 전면에서 이끌었었지요. 그때 이국선 목사란 분이 박형규 목사를 이어 저희 대학의 이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정과리: 아 그때 처음 인연을 맺었어요? 이국선 목사하고?

 

홍정선: 그렇지요.

 

정과리: 그전에 도시산업선교회쪽 일을 하신 게 아니고?

 

홍정선: 도시산업선교회는 이국선 목사가 고재식 목사를 데리고 인천에서 대성목재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시작한 겁니다. 이국선 목사가, 김현선생 가족이 많은 기부를 한 목포 중앙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다가, 인천으로 옮겨 와서 대성목재와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신자로 모아 도시산업선교센터를 만들었어요. 거기에서 이국선 목사의 양아들처럼 일하던 고재식 목사가 김현 선생님과 어린 시절 목포의 친구였지요.

 

정과리: 절친이었죠.

 

홍정선: 김현 선생님이 고향에 대한 애정이라고 할까, 고향과의 관계라고 할까, 이런 일단을 여기서 볼 수가 있는데요. 어느 날 이국선 목사가 날 보고 내가 문학하는 사람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광남이라고 아나?” 물으시는 거에요. (웃음) 김광남? 김현 선생님과 무척 가깝게 지낸다고 했지요. (웃음) 그랬더니 이국선 목사가 껄껄 웃으면서 광남이 이 자식 참 개구쟁이였다고, 어릴때 억세게 장난꾸러기여서 맨날 집 앞에 개골창에 얼굴을 쳐박아가지고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기어 나오곤 했다고. (웃음) 이국선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김현 선생님하고 이국선 목사가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김현 선생님 집안이 목포의 소문난 갑부였는데, 유서 깊은 목포중앙교회를 신축하고 짓고 하는데 큰 역할을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정과리: 외삼촌도 기독교가 호남에 전파되는데 무슨 역할을 하시지 않았나요?

 

홍정선: 그건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머니 아버님이 아주 독실한 신자여서 어릴 때부터 목포중앙교회에 계속 다녔지요. 그런 저런 인연으로 제가 한신대학 교수가 되니까 신학과 교수였던 고재식 목사님이 현이하고 한 번 만나야겠다고 해서, 여러 차례 반포치킨과 그 옆에 있던 녹원에서 함께 술을 마셨어요. 같이 술을 마시면서 나온 이야기가 문예창작과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김현 선생이 당시 한신대학의 실력자였던 고재식 선생을 부추겼고 저도 거들었지요. 그래서 그럼 문창과를 만들자.” 그리고 황지우와 임철우를 데려오자는 얼개가 만들어졌습니다.

 

정과리: 아 그렇군요

 

홍정선: 그 이후 이국선 목사가 작고를 했을 때, 김현 선생님이 전화를 해 가지고 같이 좀 가자고 해서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장지까지 함께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면서 김현 선생님이 목사가 되라는 압박을 가족들로부터 심하게 받았다는 얘기를 하시더군요. 그리고 이국선 목사의 설교문을 비롯한 글을 모아서 문학과지성사에서 책으로 묶고 싶다고 저보고 추진해 달라고 했는데 제대로 안됐습니다.

 

정과리: ‘고재식이 자기를 대신해줘서 고맙다라는 식으로 글을 쓰신 게(1986104일의 일기, 행복한 책읽기) 있어요.

 

홍정선: 그리고 김현선생 전집편찬 때 연보작성을 위해 목포에 갔었는데 조카라는 분이 김현선생은 기일이나 명절 때 목포에 오면 늘 호텔에서 자고 갔다는 이야기를 다소 불만 섞인 어투로 이야기하더군요. 아마도 김현선생의 내면에는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억압과 그에 대한 반발, 부모님에 대한 모종의 죄책감 이런 것들이 착종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그런 내면적 의식이 학문적으로는 르네 지라르 연구 등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김연권: 편찮으시고 나서 욥기, 욥에 대해서 쓰신 글이 있잖아. 말년에 당신의 고통이 욥으로 치환되는 그런 생각을 기독교에서 찾으신 것 같아요.

 

정과리: 제 생각에는 선생님에게 기독교적인 의식이 끊임없이 작용을 했다고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이 불교도 굉장히 좋아하셨지만 유달리 유마(維摩)에 애착을 보여주셨거든요. 유마가 결국 예수의 행적하고 비슷해요. 세상의 고통을 자기 몸 안으로 끌어 겨 대신 겪는 거니깐. 제 생각엔 그랬어요. 그래서 기독교를 나중에 버렸다고 하시지만 그걸 떠나신 적은 없었고 의식의 표면에서만 술이 종교를 지워버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웃음)

 

김연권: 반포치킨에서의 대화에서도 가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셨고, ‘라틴어를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도 하시고, 천주교의 그레고리 성가에 대한 취향도 표명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홍정선: 제 상상이긴 합니다만, 김현 선생하고 고재식 선생은 고향의 친구로서, 만나면 굉장히 따뜻하고 다정했지만, 당시 고재식 선생이 추구하던 과격한 해방신학의 길, 필요하면 총을 들 수도 있다는 노선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또 한신대학을 배후에서 이끌던 문동환, 안병무, 이런 분들에 대해서도 저에게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해방신학, 정치신학에 대해 공감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점은 당시의 사회참여적 문학 노선이 폭력에 또 다른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걱정, 그러면서도 방치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스러움과 일맥 상통하는 게 아닐까요. “문학은 꿈이다라고 용기있게 말할 수 없었던 당시의 그 고통스러움 말입니다.

 

정과리: 그런 생각의 일단이 폭력과 왜곡(분석과 해석)에 나타나 있지요.폭력과 왜곡이나 르네 지라르 연구서인 폭력의 구조에서 보이는 것은 인류사회에서의 폭력의 근본성이라고 할까요? 초석적 폭력을 통해서 사회가 성립을 한다는 지라르의 입장에 공감을 하셨던 것 같은데, 그 해결책이 사실은 안 보이는 거잖아요. 지라르 자신이 그것으로 고민을 많이 했고, 나중에 클라우제비츠를 완성하자에서 사람들이 예수처럼 살기를 소망했으나, 우리가 어떻게 예수처럼 삽니까. (웃음) 김현 선생님이 그 다음에 푸코로 넘어간 거는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시칠리아의 암소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해결책은 없으나 스스로 고통이 되어서 울음을 우는 것, 즉 고통을 껴안고 고통이 되어서 사는 것만이 행복을 향한 최후의 몸짓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홍정선: 그래서 이청준 작품에서 폭력의 종식에 대한 끊임없는 가능성을 찾았던 거고요.

 

 

서울대 불문과 교수 김현

 

정과리: 이제 선생님 말년의 불문과 풍경을 회상해 볼까요?

 

이철의: 김현 선생님은 수업시간이든 술자리든 기독교를 니체가 비판했던 신앙으로서의 종교로 접근을 하신 것 같지 않고, 아무튼 의도적으로 벗어나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게 또 불문학이 요구한 라이시떼(laï̈icité), 세속성의 전통이 아닌가 합니다.(웃음)

 

정과리: 제가 어디 가서 라이시테laïcité를 세속성이라고 번역해서 말을 했더니 어떤 젊은 번역가가 용어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그러더군요. 제가 젊은 사람이 날카롭다고 추켜 주었습니다만(웃음) 사전에는 정교분리라고 나와 있지만 좀 더 정확한 뜻은 종교로부터 자유로움정도겠지요? 원래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에서는 그게 종교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율적 가치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흔히 세속성이라고 번역하는 거지요. 그 세속성이 실은 프랑스 특유의 리버럴리즘과 연결되구요. 저나 김연권 선생이 처음 불문과에 진입하였을 때는 리버럴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면 선생님들이 담배를 피시면서 자네들도 피우게하시곤 했지요. 당시에는 담배의 해로움이 명확히 인식된 상태는 아니었고, 자유로움의 표지같은 역할을 했어요.

 

김연권: 선생님들하고 맞담배를 하는 건 유일했을 거예요.

 

홍정선: 국문과에선 큰일나죠.

 

이철의: 나중에 담배를 배운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담배를 권하곤 하셨죠.

 

김연권: 그런 분위기에는 정명환 선생님이 든든히 받쳐주셨다는 배경이 있었어요. 젊은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자유롭게 애들하고 놀 수 있는 마당, 체육대회하면 선생님들 돈 거둬서 야구 글러브 사주고 농구공 사주고. 다른 과에서 다 부러워했죠.

 

정과리: 체육대회만 하면 우리가 우승 했잖아요. (웃음)

 

김연권: 끔찍한 재앙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긴급조치 시대여서 사실 굉장히 혹독했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분위기를 견딜 수 있도록 선생님들이 배려를 하신 거죠.

 

정과리: 정명환 선생님 없었더라면 사실 불문과가 그렇게 유지될 수 없었죠.

 

김연권: 정명환 선생님 떠나시고 나서부터 균열이 시작되었다라고 봐요.

 

이철의: 꽤 늦게까지도 분위기가 나빴던 건 아니에요. 저희 학교다닐 때도 그렇고 마지막에 오현우 선생님 정년퇴임 하셨을땐가 잔치를 했어요. 학과 주관으로 했지요. 인문대 선생님들이 몇 분 오셨거든요. 그때 국문과 어떤 교수님이 무척 부러워 하셨어요. 성대하게 정년퇴임식을 해준다고. 그런 분위기는 87년 정도까지는 유지가 됐어요.

 

김연권: 김현 선생님이 제자들, 후배들한테 술 사주시면서도 위 선생님들한테도 참 잘했어요. 깍듯하게. 왜냐하면 건방지게 보일 수가 있거든요. 밉보일 수도 있는 부분인데, 정말 잘 당신의 스승들을, 선배들을 잘 섬겼죠. 티 안나게.

 

정과리: 2006년에 제가 연구년을 맞아 프랑스 갔을 때 파리 7대학에 계시던 최승언 선생님이 초대장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그 분이 최재서 선생님 둘째 아들이세요. 가서 뵙고 말씀을 들었는데 두 가지 말씀을 하셨어요. 하나는 김현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었어요. 최선생님이 유학 중일 때 김현 선생님이 편지 보내서 너 빨리 끝내고 와라. 함께 할 일이 많다라고 학위 취득을 재촉하셨다는 거에요. 최선생님이 그래서 서울대 불문과에 오셨었지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프랑스로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어려우셨던 것 같아요. 그 비슷이 말씀을 하셨지요. 또 하나 하신 얘기는 불문과가 마냥 리버럴한 건 아니었다는 말씀이셨어요.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습니다.

 

홍정선 : 김현 선생님의 술자리에 불문과 선생님들이 동석하는 경우가 많았었지요 제게 굉장히 다정하게 대해 주시곤 하셨지요. 그런데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늦게 써서 92년에 졸업을 할 때 불문과 교수님이 학장으로 학위를 수여했는데, 너무나 싸늘하게 대해서 몹시 놀랐습니다.

 

김연권: 제가 보기에는 김현 선생님은 두 가지 끈을 잡고 계셨거든요. 문학과지성으로 대표되는 문학계하고, 서울대 불문과 동료, 후배, 제자들이라는 두 개의 끈. 적어도 이 두 개의 끈을 김현 선생님께서는 서로 꼬이지 않고 잘 붙들고 계셨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홍정선 선생님은 1992년이라고 말씀하셨죠) 이게 꼬이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끈을 놓으실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특히 선생님의 말년에 가까울수록 그 현상은 불행하게도 점점 심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였구요.

 

정과리: 그런 분열이 특정 교수의 정치적 욕망에서 기인하였고, 김현 선생이 그런 욕망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게 분열을 악화시킨 원인이 되기도 했지요.

 

이철의: 김현 선생님이 학과장을 871학기까지만 하셨어요. 제가 87년부터 조교를 했는데, 87년에 학과장 놓으시고는 사실은 과에 거의 관여를 안 하셨어요. 근데 저는 선생님과의 사적인 인연이 있다면 학과장을 놓으신 그때부터 시작됐다라고 할 수 있는데, 87년 여름에 저를 문득 부르시더니, “너 이거 번역을 해갖고 와라라고 일을 맡기셨어요. 그게 바로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뒤에 보유편으로 실린 이방인의 새로운 재판을 위하여였어요. 원고지에 꾸역꾸역 메우는 데 품이 많이 들대요.

 

: 그때 원고지에 쓰셨구나!

 

이철의 : 원고지에 했어요. 르모라는 허접한 워드프로세서 정도만 있었고. 아직 PC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고. 그리고 89년에는 제가 불쌍해 보이셨는지 하여튼 (웃음) 문예 중앙에 프랑스 주제비평과 관련된 비평문을 번역해서 싣게 해주셨죠. 그때 데리다가 해체에 관해 일본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가 번역을 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아요.

 

김연권: 씩 웃는 인상이 재밌네.(웃음)

 

이철의 : 김현 선생님께서 그때 제네바 학파 연구서를 쓰셨으니까. 그 다음에 그 비평가들의 실제 비평을 한국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그 작업을 89년에 저한테 맡기셨어요. 맡기실 땐 그러셨어요. 그게 계간지죠? 문예중앙. ‘너 한 2~3년 해라. 계속 줄 테니까.’ 세 편쯤 한 거 같아요. 찾아보면 나올 텐데. 장 피에르 리샤르, 조르주 뿔레, 그리고 데리다를 했던가?

 

정과리: 내가 읽었다니까. 찾아보니 문예중앙 1988년 봄호에 데리다의 그 편지를 해체라는 말의 쓰임새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 호에는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했구요.

 

이철의: 정말정말 지옥 같았어요. 왜냐면 문장이 너무 난해하거든요. 제 마음이 급했죠. 발자크도 해야되고 하는데. (웃음)

 

정과리: 발자크도 난해해요. (웃음)

 

이철의: 발자크는 우선 양이 많잖아요. 아마 김현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그 일이 계속되었겠죠. 저를 아마 번역하는 인간으로 만드시려고 했는지. 근데 그게 거기서 중단된 거예요. 3회인가로.

 

정과리: 장기적인 계획이었구나.

 

: 김현 선생님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2. 2년이면 여덟 편 되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신 그거를...

 

정과리: 그때 이철의 교수 취직 했을 때에요?

 

이철의: 아니요. 그때가 조교 막 마쳤을 때지요. 그리고 나서 그 이듬해 돌아가셨는데, 그때 정과리 선생님께서 부르디외 번역하라고 했어요. 어려운 거만 제게 맡기시더라구요. (일동 웃음) 툴툴거리면서 하다가 상명대학교 취직이 됐어요. 그래서 3분의 1정도 한 걸 문경자 선생한테 넘긴거죠. 제가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여하튼 김현 선생님과의 인연이 그런 식으로 되려다가 만 건데. 그때 정과리 선생님이 저한테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시면서 쪽지를 껴서 주셨어요. 90년에. 솔직히 말하면 뭔가 감은 잡히는데, 저희 학번들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정과리: 저희 세대 중 몇 사람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루가 되어 있었어요. 이선생 세대는 그러지 않았지요.

 

이철의: 정과리 선생님이 박사학위 논문을 뒤늦게 책으로 내시면서 서문에 쓰신 얘기로 접고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이런 얘기가 유효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현 선생님이 학교가 두 개였잖아요. 하나는 문지학교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 불문과라는 학교인데. 홍정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문지 학교는 현장 비평가로서의 삶이고 서울대 불문과는 불문학 연구자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불문학 연구라는 게 그럼 현장 비평에 치였느냐면 절대 아닌 게, 정말 70년대 초중반 홍성사에서 주로 번역본으로 신비평 소개하고 이럴 때뿐만 아니라 프랑스 비평부터 시작해서 지라르, 푸코 지금 읽어봐도 대단하잖아요. 제가 읽는 프랑스 연구자들하고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요. 더 뛰어난 부분도 있구요. 그런 면에서 서울대학교의 선생이라는 연구자로서의 삶도, 기울어진 한쪽 저울이 아니거든요. 워낙에 한국문학계에서 현장비평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크다 보니까 언뜻 기울어 보일 수도 있겠지요. 제 생각에는 두 삶이 평형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문득 김현 선생님이 그 시대에, 70년대에서 80년대에, 두 개의 학교를 끌고 나가신 게 과연 김현 선생님 개인에게는 행복한 일이었을까, 김현 선생님의 모토가 행복이니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묻게 돼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행복하시지는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한순간에는 선생님은 두 개가 굉장히 잘 조화가 된다라고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겠어요. 그랬을 것 같고요. 그런데 그 순간에도 두 개를 같이 끌고 간다는 게 좀 어려울 수 있다는 걸 가끔 느끼시지 않았을까. 실질적으로 그런 일도 나타났고. 그래서 그게 과연 행복했을까 하는 이런 자문을 계속해요.

 

김연권: 거기에 대해서는 책 읽기의 괴로움도 있고 행복한 책읽기도 있으니까. 괴로움과 행복은 사실은 같이 가는 거지. (웃음) 그런 것처럼 나는 그 두 개를 지고 갈 힘이 있었을 때는 나름대로 행복하셨다고 생각이 들어요.

 

김인환: 김현 선생을 처음 만날 무렵에 저는 불문과 대학원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대 불문과의 강성욱 선생님께서 중세 불문학 하는 사람이 한국에 아무도 없으니 불문과 대학원에 들어와서 중세 불문학을 한번 해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문과가 재미없고 해서 그렇게 할 생각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김현 선생을 만나 선생님이 한국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함께 공부하시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포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늘 새것 콤플렉스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김현 선생은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동시대 문학을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매일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당대 문학의 역사성을 해명하는 것이 김현 선생의 과제였습니다. 불문학을 하셨지만 선생님의 가장 큰 관심은 한국현대문학 어떻게 하면 세계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선생님 뵙고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 같은 경우엔 독일 현대 철학사가 충분히 가능한데, 한국의 경우에는 어째서 한국현대철학사가 불가능한 것인가?

 

정과리: 불가능하죠.

 

김인환: 저는 한국에서는 한국현대비평사가 한국현대철학사를 대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해설가나 번역가는 있지만 독창적인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있는 철학자가 전혀 없어요. 그러나 비평가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자기 머리로 하는 자기 생각을 얘기합니다. 김현 선생님 뵈면서 철학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선생님도 처음부터 그 말씀을 계속하셨어요. ‘작품은 한국 거지만 얘기하는 방식은 세계수준으로 해야 한다.’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비평이 안 된다.’ 저는 그 말씀을 지금도 늘 생각하고 있어요. 작품은 한국 작품이지만 논의의 수준까지 한국적 특수성에 갇히면 안 된다. 선생님께는 프랑스 문학연구와 한국 문학비평이 같은 문제지 다른 문제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이철의: 저도 그 부분에서는 아까 말씀하신 두 학교의 기계적 균형이라던가 이런 건 아니구요. 제가 거기서 정과리 선생이 말씀하신 것과 결부시키면, 한국 대학 조직이 그것을 품어 안을 수 있을 만큼 유연하지가 않다는 얘기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김인환: 지금은 더 하죠. 옛날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하지 않아요?

 

이철의: 특히 90년대, 2000년대는 더 심해지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선생님이 이런 조직의 문제를 끝까지 행복하게 견뎌내실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다는 얘기였고. 그 다음에 그래서 제가 이건 또 나중에 혹시라도 대담에 그런 게 들어가야 된다면, 지금 김현 선생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너무 아쉬운 게 있잖아요. 살아계셨다면 어떤 일을 하실까.

 

정과리: 그렇죠. 많이 아쉽죠.

 

이철의: 그럴 때 김현 선생님이 80년대 말까지 하셨던 작업이 다른 불문학자들에게로 확산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정명환 선생님 같은 분은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 하시잖아요. 현실에 대해서도 발언을 많이 하시고. 그것들을 더 풍요롭게 하는.

 

정과리: 그점에서 불문학과의 침체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다시 살아나야 할 텐데요.

 

이철의: 제가 드리고자 했던 말씀이 그거였습니다.

 

김연권: 불문학 글쓰기에 대해서도 비평사에서부터 각주를 고루하게 다는 걸 지양하시고 APA스타일 도입하신 것도 새로운 시도였어요. 보수적인 사람들은 왜 이거를 이런 식으로. 저도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상당히 간명하고.

 

정과리: 괄호 열고 참고 문헌의 숫자 쓰고, 콜론에 쪽수쓰고 하는 거요.

 

김연권: 김현 선생이 쓰시기전엔 APA스타일을 우리는 전혀 몰랐지요. 인문학 글쓰기에 처음 도입하신 분이 김현 선생님입니다.

 

정과리: 신선했지요. 아래로 눈길 주지 않고 쫙 줄글을 따라 읽게 하는 효과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요즘 다시 각주로 돌아가고 있어요. 각주의 매력이 따로 있어요. (일동 웃음)

 

홍정선: 김현 선생님이 작고하시기 몇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연구실로 찾아뵈면서 요즘은 어떤 데 관심을 가지고 계시냐고 여쭈었더니 한국문학의 변모를 대 여섯 개 정도의 세계관이 서로 상응하면서 변모해 나아가는 틀로 구상해보고 있는 중이다,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물론 저는 그 말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정과리: 한국 사상사를 인물들의 세계관의 모험을 통해서 보고 싶어 하신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폴 베니슈Paul Bénichou를 열심히 읽으셨어요. 편찮으시는 바람에 이어가질 못하셨지요. 제가 한 번 이어서 그걸 해볼 생각이 있어요. 한국 사상사를 그런 쪽으로 해보고 싶은데 김현 선생님과 저의 차이를 얘기하는 건 우스꽝스럽긴 한데 김현 선생님 세대는 모든 게 인물 중심이에요. 저희 세대는 일종의 정황 중심적인 면이 강하죠.

 

김연권: 이철의 선생 얘기한 것처럼 사실은 불문학계가 학문적 후속세대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어요.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학부제나, 신자유주의 이런 것 때문에. 사실은 후학들이 예를 들자면 문학 평론가로서의 김현은 여전히 담론으로 한국 문학계에서 살아나고 재생산되지만, 불문학자로서의 김현에 대한 평가는 사실 거의 전무하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정과리: 그래서 이번에 심포지엄을 통해서 홍성호 교수가 김현 선생의 문학사회학에 대해 쓰고. 이철의 선생도 김현 선생의 불문학 연구에 대해서 한 번 하시고. 또 다른 여러분도 김현 선생의 불문학 연구에 렌즈를 들이댈 예정입니다.

 

이철의: 불문학자로서 김현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불문학자 김현의 작업과 작금의 문학(연구)의 위기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도 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은 하나의 트렌드예요. 2000년 이후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위기는 늘 기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요즘 프랑스에서 나오는 책들을 모아보고 있는데요. 여러 갈래로 논의가 진전되는 것 같아요. 대충 공통점은 문학 자체의 위기는 아니에요. 이야기 생산으로서의 문학은 여전히 주목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문학연구의 위기, 문학교육의 위기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사실 문학이 꼭 제도권 학교를 터전으로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위기 담론은 중등교육에서의 문학 교육 이야기도 많지만 대학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위기를 더 많이 말하는 것 같아요. 대학 주변에서 우리가 요즘 논의하는 거하고 굉장히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정리를 하면서 김현 선생님은 혹시 그와 관련해 어떤 발언을 하셨는지 살펴보고 싶었어요. 일단 문학의 고유성이든 학제간 연구든 김현 선생님 글에 그런 문제와 관련해 아이디어나 우리가 취할 전망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정과리: 제가 아까 김현 선생님 교수생활에서의 고통을 꼭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게 사실 선생님이 행복을 추구하시고 행복에 대해서 말씀도 자주 하셨고, , 말년으로 가실수록 훨씬 표정이 부드러워지시고 글도 더욱 부드러워졌었어요. 젊었을 때는 공격적이기도 하셨어요. 여기 홍선생이 잘 알고 계시지만. 사실 그 밑바닥엔 엄청난 개인적인 고통과 그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가 있었다라는 점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 게 김현 선생님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 아닐까. 지금 살아 계셨더라면 정말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 아쉬움이 많으니까 제가 자꾸 그런 얘길 하는 거에요.

 

이철의: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수합해볼 필요는 있죠. 여러 가지 정황들을.

 

김연권: 마지막으로 정과리 선생하고 관련 된건데, 내가 정과리 선생이 보내준 책. 예전에 읽은 것 중에서 김현 선생이 바슐라르 식으로 얘기하면 어느 물질적 이미지에 가장 가까우냐. 거기에 김연권이가 집과 대지 쪽에 제일 가깝다고 그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쓴 대목이 기억나요. (웃음) 어느 책인지는 몰라.

 

정과리: 추억의 집이라는 글입니다.문신공방첫 번째 책에 수록되어 있어요.

 

김연권: 그에 대한 답을 생각을 헤봤어요. 곽광수 선생하고 관련된 부분이기도 한데, 곽광수 선생은 모범적인 학생으로서 바슐라르를 읽었다면, 김현 선생은 바슐라르 식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어요. 바슐라르의 사유방식을 김현 선생이 나름대로 내면화 하시지 않으셨나...

 

정과리: 그런 면이 있죠.

 

김연권: 바슐라르 연구자 망수이Mansuy가 바슐라르를 일컬어 굳이 4원소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가 하면, ‘대지라고 그랬거든요. 집과 공간에 대한 취향. 나는 김현 선생님도 유사한 취향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해요. 커다란 소파에 파묻혀서 독서하시는 모습은 요나 콤플렉스에 연결된다고 봐요.

 

정과리: 정신분석을 하신 분이라 날카롭게 보시는군요(웃음)

 

김연권: 그 다음에 느리게 산보하시는 걸 좋아하셨죠. 점심 드시고 나서 교수회관쪽으로 한 30분 내지 한 시간 빠른 걸음도 아니고 느릿느릿 산보하시는 그것도 바슐라르적이면서 대지적이지요. 또 김현 선생님이 단절과 감싸기를 말씀하셨는데, ‘감싸기enveloppement의 번역이지요. 그것도 요나콤플렉스와 연관이 있다고 봐요. , 대지와 공간 안에서의 휴식의 몽상이 김현 선생님의 무의식적 소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정과리: 요나 콤플렉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맺는말을 해주십시오.

 

김인환: 김현 비평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시고, 사람과 얘기하기 좋아하시고. 만날 때마다 너 요즘 뭐하냐? 이런 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이렇게 말씀하신 게 몇 번인지 몰라요. 이 사람이 이런 걸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선생님을 만나면 늘 제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지금 제가 돌아보면 선생님 아니었으면 오늘의 제가 이만큼이라도 되기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 조금만 더 오래 사셨으면 제가 지금보다 좀 나은 좋은 비평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과리: 이제 대가를 이루셨는데요.

 

김인환: 김현 선생께 제일 죄송한 것은 학교 일 그만하고 글 쓰는 데 전념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선생님 모시고 공부를 더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까운 시간을 쓸데없는 학교 일에 다 허비해버린 걸 생각하면 창자에 땀이 날 정도로 후회가 됩니다. 그렇게 가실 것을! 조금이라도 더 자주 뵙고 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참 많아요. 선생님을 생각하면. 받은 건 굉장히 많은데 해드린 건 전혀 없는, 그런 죄송한 마음입니다.

 

홍정선: 제가 한 사람의 비평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김현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분이 내민 따뜻한 손길이 저를 어설픈 관념적 민중주의자의 생활에서 끌어내어 좀 더 보편적인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약 제 글에 이해와 공감의 온기가 다소나마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김현 선생님 때문입니다. 또 평생 동안 문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김현 선생님의 모습 때문입니다. 저는 김현 선생님이야말로 자신의 전 생애를 한국문학에 바친 순교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문학과 문학인에 대한 저버릴 수 없는 애정으로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순교자의 길을 재촉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문학에 대해 마침내 저버릴 수 없는 약속이여!”의 길을 사신 겁니다.

 

김연권: 처음 정과리 선생으로부터 좌담 요청 전화를 받고 무심코 응해 놓고 생각해보니 제가 그동안 참으로 무심하게 살아왔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잊혀졌던 40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김현 선생님과 함께 보냈던 10년의 세월이 제 인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김현 선생님께서 온전하게 쥐고 계시던 두 끈이 말년에 엉클어지고 끊어짐에 따라 제가 기댈 곳도 없어지고 취직해서 대학에서의 불문과의 위기와 씨름하며 살다보니 불문과에 대한 애정도 무뎌져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처음 대학 선생이 되었을 때는 김현 선생님을 본받아 참된 스승이라도 되어보자고 다짐했지만 반의 반도 실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 30주기에는 꽃이라도 사들고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은퇴 후 제 삶의 방향을 재정립할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이철의: 김현 선생님께서는 제자에게 이러저러한 분야의 공부를 이러저러한 식으로 해보거라, 라고 말씀해주셨던 참으로 드문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도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그런 통찰로 학문의 지도를 그려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그러한 선생님이 계신다는 것이 제자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됐습니다만, 지난 30년이 선생님의 그 통찰이 계속 진행 중인 시간이었더라면 제 공부도 조금은 덜 누추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쉽고 안타깝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기억과 흔적은 후학에게 비평과 연구에서 뜨거운 열정이 무엇인지, 냉철한 분석이 무엇인지 내내 되묻게 해주는 행복한 자극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듭니다.

 

정과리: 긴 시간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원 의도가 비평가 김현의 사생활을 복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생활들 하나하나는 모두 공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되짚어 본 것이었습니다. 독자들께서 그 점을 고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한 김현 선생님에 대한 찬사가 일방적이지 않은가, 라는 의혹도 있을 수 있습니다. 추억의 자리는 그리움의 자리여서 그렇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뛰어난 인물에 대해 논의를 할 때, 이스라엘인들 식으로 후츠파chutzpah’의 정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사의 진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자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7월에 열릴 심포지엄에서는 좀 더 냉정한 거리가 유지되리라 기대합니다. 훗날 우리의 담화가 입체적이고 깊은 김현 연구를 위한 재료로 쓰여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