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25)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을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김혜순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
목구멍 옛날에 나를 켕기게 만들던 우리 식구 목구멍 하나 둘 셋 그것을 채우던 내 노동 일년 이십년 한평생 뼈빠지게 고생하던 옛날에 울분 삭히던 가슴에 쐬주 고이던 뻥 뚫린 구멍 하나 둘 셋 지금은 내가 채울 목구멍이 세상 도처 내 몸보다 크구나 제 혼자 허한 목구멍 자본가의 거대한 목구멍 정치가의 거대한 목구멍 역사의 거대한 목구멍 그러나 켕기지 않네 채우기에 노동자 이 가슴 모자랄 뿐이네 그것이 노동자 나를 구멍보다 거대하게 키우고 성장이 넘쳐 목구멍도 뒤집히고, 경사나겠네 (김정환 시집,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 1993, 실천문학사)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가난을 잊고 살고 있다. 80년대에 소비사회가 시작되고 90년대에 문화 산업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일상적 향유는 무람없는 일이 되었다. 봉지..
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 목욕탕에서 옷 벗을 때 더 벗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나에게서 느낀다 이것 아닌 다른 생으로 몸 바꾸는 환생을 꿈꾸는 오래된 배룡나무 탕으로 들어가는 굽은 몸들처럼 연못 둘레에 樹齡 三百年 百日紅 나무들 구부정하게 서 있다 만개한 8월 紫薇꽃, 부채 바람 받는 쪽의 숯불처럼 나를 향해 점점 밝아지는데 저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 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 불티 같은 꽃잎들 머리에 흠뻑 쓰고 나는 웃으리라, 서울서 벗들 오면 상처받은 사람이 세상을 단장한다 말하고, 그들이 돌아갈 땐 한번 더 뒤돌아보게 하여 저 바짝 藥오른 꽃들, 눈에 넣어주리라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수년 전, 시집으로서는 예외적으로 베스트..
아침 출근 이를 닦는다 지난밤을 닦아낸다. 경황 없이 경험한 꿈들을 하얗게 씻어낸다. 모든 밤의 장식을 씻어낸다. 밥상 앞에서도 허황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동작으로 숟가락에 담는 현실. 출근, 출동 혹은 충돌! 하루의 모든 충돌이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상처가 만져지기 시작하는 우리들 나이의 이마. 피 흘리지 않고 모든 충돌이 불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최근에 읽은 마종기 시인의 몇몇 시편들이 내 마음 속에 남긴 감동의 여운이 자못 깊어서 그의 옛 시집들을 다시 들추어보게 되었다. 「아침 출근」은 ‘수필적 서정성’라고 불리는 마종기 시의 특징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 시이다. ‘수필적’이라는 말은 생활의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솔직담백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서정성이라는 것은, 그에 대..
한 눈빛 어머니 병원 가시고 난 지 일주일 창 밖 후박나무 가지 위에 웬 이름 모를 멧새 하나 찾아와 종일을 앉았다가 날아가곤, 앉았다가 날아가곤 한다 어머니 아예 먼길 뜨시려고 저러는 걸까 새는 날아가고 날아간 새의 초점 없는 희미한 눈빛만이 가지 끝에 앉아 밤새도록 흔들거리며 나를 굽어보고 있다 (이시영 시집, 『사이』, 창작과비평사, 1996) 어머니가 입원하신 것과 창 밖에 새 날아온 것이 서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인간의 사건과 자연의 광경을 정면으로 맞대놓고 시침 떼는 것은 후반기 이시영 시의 아주 특징적인 면모이다. 그 두 세상 사이의 관계를 눈치 채기 힘들어서 독자는 종종 어리둥절해지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때로 내밀히 조응하는 연결이 숨어 있어서 복잡한 심사를 귀신처럼 드러낸다. 새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