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소설읽기 (103)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4회 독회를 통해 작성된 독회 의견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이갑수의 『외계 문학 걸작선』(문학과지성사, 2023.02)은 우선 썩 다양하고 풍요한 지식을 소설적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그리고 그 지식들은 상식적 선에서 대체로 온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판타지’와 ‘사이파이 S/F’를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기준은 공상적 지식에 근거하는가, 과학적 지식에 근거하는가 여부이다. 이갑수의 소설들은 분명히 ‘사이파이’에 속한다. 반면 이갑수의 지식에는 과학적 지식과 문화적 지식이 혼잡하게 뒤섞여서, 난삽한 잡학의 더미를 이루고 있다. 이 넘치는 지식 자체는 좋은 창작적 자원이다. 한데, 과잉의 중..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3회 독회에 대한 심사의견의 인터넷 용 원고로 작성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두 가지를 추기한다. 임국영의 『헤드라이너』(창비, 2023.01)를 후보작에 올리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다. 한 위원은 이 소설집에 ‘B급’이라는 등급을 매기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원래 영화에서 비롯된 ‘B급’이라는 용어는 ‘저예산으로 다발 상영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와 더불어 널리 알려진 이 용어는 “비관습적인 소재와 제재, 그리고 일탈적인 주제가 기술적인 미숙함을 통해 거칠게 표출되어 있지만, 미래의 예술을 예견케 하는 것” 정도의 뜻으로 흔히 쓰인다. 임국영의 소설은..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3회 독회에 대한 심사의견의 인터넷 용 원고로 작성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문학과지성사, 2022.12)는 아주 이색적인 작품들을 모아 놓고 있다. 여기에는 사건이 없고 상황만이 있다. 사건이 원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배경에는 엄청나게 격렬한 사건들이 큰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여파로 현재 인물들의 삶은 매우 곤란하고 궁핍한 처지이다. 그런데 소설 텍스트의 문면에서는 그 사건들은 좀처럼 발설되지 않는다. 은폐되거나 얼버무려지거나 함구되거나 외면된다.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격한 일들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인물들은 마치 그것들을 병풍 그림들처럼 스치며 관조한다...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3회 독회에 대한 심사의견의 인터넷 용 원고로 작성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꽃샘 추위는 봄을 재촉하는 간지럼이었다. 이제 곧 아지랑이가 오를 것이다. 자연의 이치다. 한데 여기에서 시간을 빼보자.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흐르지 않고, 겨울이 통째로 그냥 봄이다. 추위 속에 열탕이 끓고, 햇살이 냉동고다. 이런 구상을 한 사람들이 옛날부터 있었다. 그런 생각의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아이 밴 노파’ 점토에서 보인다. 러시아의 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은 이 테라코타를 두고 ‘신생아를 품은 죽음’이라고 풀이하고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노장 강석경의 문학적 열정이 이와 다..
윤형진의 「책을 먹는 남자」(『문학과 사회』, 1998년 겨울호)는 지식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우화(allégorie)이다. 지식과 정치의 관계를 다룬 소설들은 드물지 않았으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으나, 그 형식은 주목을 요한다. 왜 우화인가? 이 형식의 선택은 표현의 개발 혹은 퇴화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상투적인 비유 혹은 사물 혹은 동물을 빌어 행해진 인간 세계에 대한 풍자로서 흔히 이해되고 있는 우화는 본래 신의 뜻을 인간적 등가물에 의해 표현하는 것을 뜻했었다. 그러니까 알레고리는 수직적 이데올로기의 표현법이며, 수식으로는 단일성의 시니피에와 잡다한 시니피앙들 각각 사이의 나눗셈으로 이루어진다. 비유 혹은 일화의 수는 무한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