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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저 순백의 치자꽃에로 사방이 함께 몰린다. 그 몰린 중심으로 날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쪽빛이 된 왕오색나비가 내려 앉자 싸하니 이는 향기로 사방이 다시 환히 퍼진다. 퍼지는 그 장엄 속에선 시간의 여울이 서느럽고 그 향기의 무수한 길들은 또 바람의 실크자락조차 보일 듯 청명청명, 하늘로 열려선 난 그만 깜깜 길을 놓친다. 놓친 길 바깥에서 비로소 破精 을 하는 이 깊은 죄의 싱그러움이여 ! - 고재종, 「장엄」(『그때 휘파람 새가 울었다』, 시와시학사, 2001) 서정의 극점을 비추는 시다. 극점이 보인다는 것은 서정의 표준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서정을 ‘자기의 순수한 제시’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이 시는 그 자기 표현의 끝에서 문득 자아의 소멸을 겪는다. “저 순백의 치자꽃..
재입원 이틀째 성긴 눈발 속에 바다로 가던 길이 모퉁이를 돌며 주춤주춤 멈춘다 마지막으로 한번 되돌아보듯, 하긴 살다가 나도 모르게 도달한 곳, 돌 성글게 박아 몸 뒤틀며 내려가는 좁은 길, 잎 진 나무 하나 앙상한 팔을 들어 눈을 맞고 있다. 팔꿈치에는 찢어진 그물과 팔등에는 새파랗게 얼어 있는 겨우살이 그 옆에는 마른 우물 들여다보면 가랑잎 얼굴들이 모여 있다. 가장자리가 온통 톱날인 얼굴들. 잎 진 나무 하나 마른 우물 모퉁이를 돌며 주춤주춤 멈춘 길. 돌기 전엔 성긴 눈 돌고 나면 밴 눈 하늘과 앞길이 대번 하얗게 질려…… (『버클리 풍의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0) 황동규는 주춤거리고 있다. 길은 늘 인생의 은유이다. 시인은 아팠고 그 아픔이 새삼 종착지에 이르고야 마는 길로서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