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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이 글은 『연세소식』의 요청에 따라, 백양로에 대한 느낌을 적은 것이다. 백양로를 걷을 때면 나는 세상 먼지를 씻은 마음의 시원함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그런 느낌은 무엇보다도 곧게 뻗은 길의 길쭉함에 그 이름이 연상시키는 청결함이 보태어져 생기는 듯 보인다. 이 한 줄기 길은 당연히 두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데, 각 방향을 걸어가는 기분이 저마다 달라 흥미를 자극한다. 북쪽 방향의 길은 정문에서 출발하여 학교의 내부로 잔잔히 스며드는 길이다. 이 길의 저쪽 끝에는 담쟁이 넝쿨로 뒤덮이고 벽돌빛 고담(古淡)한 언더우드관이 함초롬히 앉아 있다. 그 자태가 신비하여 눈앞에 빤히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구름에 감싸여 어떤 까마득한 높이에 떠있는 신기루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때문에 감성이 풍부한 사람..
구효서의 『동주』(자음과 모음, 2011)는 오랫동안 윤동주에게 씌어졌던 상투적인 이미지를 벗겨버리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요컨대 작가에 의하면 윤동주는 ‘민족시인’이라기보다, ‘세계시민’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조선인이 됨으로써 세계인이 되기 위해 깊이 고뇌한 사람이다. 그런 윤동주를 작가는 ‘언어’에 근거해서 상정할 수 있었는데, 즉, 그의 모어는 조선어이지만, 그가 익힌 언어는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라는 것이다. 언어가 정신의 거처라는 생각은 꽤 설득력 있는 생각이며, 이에 근거해서, 작가는 아이누 여자의 야성성-각 인물들의 민족성-윤동주의 세계성이라는 구도를 잡고, 새로운 윤동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구도의 각 항목들은 적당했으나, 그 구도의 각 항목들을 잇는 연결선은..
젊은 무덤 — 윤동주 유 재 영 지난해도 무성했던 망초꽃 하얀 들길 들불까지 지난 자리 덧없는 그 자리에 겨울을 물고 떠나는 쇠기러기 한 떼가...... 흙집에 누워서 몇 십 년 또 몇 십 년 아무도 오지 않는 젊은 무덤 하나 있어 오늘도 공짜 달빛만 출렁이고 있구나. 조국아! 흙을 다오 큰 삽으로 던져 다오 무너지는 봉분이 참으로 부질없다 이 밤도 멍이 든 몸이 왠지 더욱 푸르구나. (유재영 시조집, 『햇빛 시간』, 태학사, 2001) 갑자기 윤동주가 생각난다. 내가 생각하는 윤동주는 순수에 대한 갈구와 시대의 불우 사이를 방황하다가 돌연 일경에게 체포되어 숨져 간 창백한 청년이다. 그의 죽음은, 내게, 역사의 포충망에 붙잡혀 포르말린 처리된 나비를 떠올리게 한다. 피를 다 빼고 바스러질 것만 같은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