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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막연한 예감이지만 서서히 시가 기운을 회복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부터 시에게 강요된 문화적 방출 이래 정신적 사막으로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겪어야만 했던 시들이, 저마다 당도한 곳에서 주거지의 주춧돌을 놓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정확한 지형도를 작성하는 일을 숙제로 남겨두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사막에서 생존할 시의 야수들이, 단순히 예전의 정신주의나 서정시학, 민중시, 실험시 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신의 고통 끝에 진화한 것임은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어림으로 말하자면, 시는 당연히 있어야 하고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자연성을 시인들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으며, 따라서 시란 있을 만한 것인가라는 자신의 존재이유에 ..
예심을 통해 올라온 모든 시집을 다 말하지는 못하고 그 동안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몇 권 골라 손끝 가는 대로 느낌을 두드려 본다. 김기택의 『소』는 환희는 물론 아니지만 슬픔도 아닌 세계, 어떤 몇 개의 정서들로 결코 요약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전율적인 실감을 자아내고 있는 세계를 현상한다. 그 전율적인 실감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모든 감정이 배제되었는데도 억눌린 감정의 응집체 같은 것이 묘사의 울타리를 압박하고 있다. 그 세계는 결코 다른 것으로 변환되지 않고 눌어붙기만 하는 일과(日課)의 세계, 삶이라는 노역이 막막히 덧쌓이기만 해서 형성된 세계이다. 삶이 왜 이 모양인가? 모든 존재와 사물들과 사건들이 철저히 이질성의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만남이 있으나 교통이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