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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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05년 이산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5. 09:00

예심을 통해 올라온 모든 시집을 다 말하지는 못하고 그 동안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몇 권 골라 손끝 가는 대로 느낌을 두드려 본다.

김기택의 는 환희는 물론 아니지만 슬픔도 아닌 세계, 어떤 몇 개의 정서들로 결코 요약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전율적인 실감을 자아내고 있는 세계를 현상한다. 그 전율적인 실감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모든 감정이 배제되었는데도 억눌린 감정의 응집체 같은 것이 묘사의 울타리를 압박하고 있다. 그 세계는 결코 다른 것으로 변환되지 않고 눌어붙기만 하는 일과(日課)의 세계, 삶이라는 노역이 막막히 덧쌓이기만 해서 형성된 세계이다. 삶이 왜 이 모양인가? 모든 존재와 사물들과 사건들이 철저히 이질성의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만남이 있으나 교통이 없고 사태가 있으나 사연이 없으며 소리가 있으나 통화가 없다. 삶이란 타자를 알지 못해 저를 알지 못하는 것들의 무자비한 무차별적 진행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그런데 그 세상이 지금, 이곳이다. 아니다. 삶이란 저를 알고 싶어서 타자를 알려고 드는 것들의 악착스럽고 끈덕진 인내다. 지금, 이곳의 세상에는 비린내가 진동한다. 김기택의 시는 그 두 양태가 전격적으로 교대하는 순간에 최상의 장면을 보여준다. 김혜순의 한 잔의 붉은 거울아웃 오브 예술을 통째로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향연을 벌이고 있다. ‘한 잔의 붉은은 그 향연의 의지를 가리키고 거울은 그것의 방법론을 가리킨다. 그의 거울은 붉게 취해 있기 때문에 되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빨아들이는 거울, 빨판의 거울이다. 그 거울에 걸리면 모든 것들은 녹아난다. 이 빨판의 특징은 끝까지 간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들은 진이 다 빠진다. 저 거울 밑바닥엔 탈색한 넝마들, 무두질된 살가죽들, 빨래 조각 같은 유령들이 너울거리고 있다. 이 거대한 흡입구는 그러나 여전히 거울이다. 그 거울 밖으로 살가죽에서 이탈한 핏덩이들이, 넝마로부터 분비된 형형색색들이, 빨래가 게운 액체들이, 그게 알코올이거나 타액이거나 진땀이거나, 여하튼 휘황찬란하게도 뿜어져 나온다. 결핍의 지속은 과잉의 실린더를 가속시키고 존재의 심연은 생성의 우주를 팽창시킨다. 이 교섭의 현상학은 오로지 김혜순의 것이다. 나희덕의 사라진 손바닥은 서정시의 일반 유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관조적 거리, 대상에 대한 음미 혹은 헌신 그리고 대상을 통한 나의 각성은 한국의 서정시가 자주 보여주던 세계이고 나희덕의 시는 그런 세계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잘 빚어진 항아리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아니다. 서정시의 기본 방법론이 겉으로는 목표처럼 제시되는 대상과의 동화라면 나희덕의 시가 생산하는 것은 다른 대상의 환기이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묘사하는 바를 따라가다 보면 묘사되지 않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항아리는 항아리의 모양새를 뽐내기 위해서도 항아리 안에 달빛을 담그기 위해서도 제작된 게 아니다. 그건 언어라는 항아리 바깥의 말 못할 세계를 암시하기 위해 거기 있다. 반면, 박주택의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는 서정의 최종적 귀착지의 일단을 보여준다. 서정시가 씌어질 수 없는 시대에서 서정의 원형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 할 때 시인은 결코 풀릴 길 없는 말의 넝쿨 속에 친친 감긴다. 박형준의 은 하나의 직관적 이미지를 각성과 함께 풀어내는 요즘의 유행적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는 각성의 자리에 노동을 놓고 있다. 그 때문에 이미지는 운동한다. 그래서 춤이다. 각성제보다는 맨손체조가 확실히 낫다. , 입이 없는 것들에 와서 이성복은 완벽히 자기만의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완미한 독립적인 우주를 건설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시적 생산의 모든 것을 자체 조달하고 있다는 얘기다. 재료도 주제도 상상도 기교도 오직 그만이 쓸 수 있는, 다시 말해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들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독자마저도 내부에서 생산하고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그가 고달프게 천하로써 일을 삼지 않고, 쓸모가 없으니 곤고한 바도 없는 가죽나무의 몸통 속으로 자발적으로 유폐되었다는 의혹을 갖게 하는데, 그러나 감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것이 안타깝기는커녕 부럽다. 나도 이 참람해서 참담한 세상으로부터 어서 헤어나야 할 텐데 속세의 인연을 어쩌지 못해 장바닥에서 뺨맞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조은의 따뜻한 흙을 읽으니 존재란 아직 식지 않은 시체다. 저 온기를 끌고 가는 건 무엇인가? 꿈틀거릴 수 있을 때 꿈틀거리는 것은 도대체 무얼 바라는 것일까? 그걸 국부마취를 당한 듯한 말똥말똥한 의식이 막막히 견디고 있다. 자명한 산책에 와서 황인숙은 시의 혈맥이 환히 뚫린 듯하다. 예전에 세상이 온통 진동판이었던 그는 이제 진동 속을 유영하는 세상 그 자신이 되었다는 느낌이다. 그건 그가 무엇보다도 생의 서민이기 때문이다. 생의 서민에게는 모든 게 온통 경이이고 감동이고, 그리고 의로움이다. 무슨 의로움? 세상을 온통 경이와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의연함 말이다.

대 선배이신 다른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의견을 경청하다가 이번에 후보에 오른 시인들의 상당수가, 추천된 시집으로나 혹은 개별 시편들에 의해서, 최근 다른 상을 이미 수상하였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이산문학상 심사규정에 그에 대한 무시조항이 있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 사실과 규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도 심사 과정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