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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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추천사 등

2004년 중앙 문예 평론부문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5. 08:49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비평의 삼박자를 독해와 착상과 논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해는 작품의 뜻과 울림을 이해하고 느끼는 일을 가리키며 착상은 독해의 결과를 삶의 문제와 관련시켜 독자가 공유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짓이고, 논증은 독해와 착상 사이에 교량을 설치하는 작업이다. 비평은 이 세 가지 악기로 화음을 연출하거나 한 가지 악기만 가지고 독주를 할 수도 있으나 그 어느 쪽이 됐든 독주의 자기 완결성과 합주의 조화를 동시에 느끼게 해줄 때 좋은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이되 하나이어야 하며, 하나이되 셋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비평이 강박관념이 되는 건 또한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한국비평의 문제점은, 어느 원로 비평가가 줄기차게 꾸짖듯이, 독해의 훈련이 안 된 상태에서 나머지 두 역할마저 해내겠다는 욕망으로 넘쳐난다는 데에 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라는 상어와 벌인 사투 끝에 비평가에게 남는 것은 갈가리 찢겨진 개념의 그물과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한두 점의 의미일 뿐이기 일쑤인 것이다.

본심에 올라 온 열 네 편의 평문들에서도 심사자들은 늘 똑같은 문제들이 되풀이 되는 광경을 보고야 만다. 다만 여느 때보다 훨씬 강렬하게 느껴지는 비평에 대한 자의식들은 참 인상적이었고 그것이 다섯 편의 글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커피를 곱으로 마시면서까지 장시간 토론을 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정의 들끓는 욕망들, 혹은 들끓는 악몽들은 미노타우르스의 미궁과도 같은 김혜순의 시세계를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욕은 높이 사줄 만 했으나 개념이 설익었고 성실한 읽기보다 감상이 먼저 튀어나오고 있었다. 반면 오규원의 시들을 차분히 따라 읽은 전병준의 길의 안과 밖, 시의 안과 밖은 독서의 길섶에 독창적인 풍경을 보여주지 못했다. 강유정의 끝없는 갱신, 위장된 그림자의 글쓰기는 김영하 소설의 변모를 파고든 글이다. 일상의 요괴스러움이라는 착상은 신선하고 설득력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작품을 쥐불놀이의 깡통처럼 휘두르는 꼴이 되었다. 그렇게 휘두르다 보면 작품은 실체는 사라진 채 오직 표지들로만 남아 비평가가 미리 세운 의미의 건축물에 겨우 장식재로 쓰일 뿐이게 된다. 그건 작품을 살리는 길이 아니며 작품이 죽으면 비평도 못 산다. 허병식의 진정성의 서사와 주체의 귀환은 최윤의 세 편의 장편소설들을 정체성의 파탄과 자아의 분열로부터 정체성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치유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는데. 논지의 전개가 조직적이고 예증도 그럴 듯하였다. 게다가 최윤 소설을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의 의식의 변주를 비추는 동경(銅鏡)으로 쓰는 은근한 솜씨까지 가지고 있었다. 다만 결론을 미리 예정하고 있는 도식적 구성이 글의 맥을 빼놓고 있었으며, 따옴표가 붙지 않은 타인의 진술들이 간간이 눈에 띠었기 때문에 마지막 선택에서 손을 거두고 말았다. 정영훈의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타자의 윤리학으로는 개념구성의 작위성 때문에 일찌감치 제외될 뻔 했던 글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성으로 볼 수도 있었으며, 그 구성 위에서 풀어놓은 논리의 전개는 자못 끈질긴 데가 있었다. 비평은 작품과의 대화라면, 그것은 끊임없는 질문과 발견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심사자들은 그 성실하고 집요한 자세에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첨언: 심사대상이 된 대부분의 평문들이 작가와 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한국문학이 어떤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암시하는 징후로 읽힌다. (권영민정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