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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문학일반

한불문학교류의 어제와 오늘(액상 프로방스 한국문학포럼 발표문)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3:32

한불 문학 교류의 어제와 오늘

 

 

한국과 프랑스 간의 최초의 문학 교류는, 아마도 홍종우가 춘향전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é이라는 제목으로 불어로 번역한 사건(E. Dentu Éditeur; PARIS, 1892)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회적 사건이 프랑스의 독자들에게 한국문학의 존재를 일깨운 것 같지는 않다. 그 대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서양 문물의 동진과 더불어서 서양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언어문화가 일본을 경유해 한국으로 광범위하게 유입되었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극동의 지역에서 문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문학 중에서 프랑스 상징주의는 한국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초엽 한국시의 기초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김억인데, 김억은 특히 보들레르Baudelaire, 베를렌Verlaine, 구르몽Gourmont, 사멩Samin 등의 시인들에게 매료되었고, 그들의 시를 모아서 오뇌의 무도라는 시집을 내었다. 그때 이후, 한국문학은 프랑스 문학을 영감의 양식으로 삼아 왔다. 정치·경제적일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문화 및 일상적 감각의 차원에서도 한국과 가장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그러나 문학에 관한 한, 프랑스 문학이 압도적인 것이다. 작년에도 한국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외국문학은 프랑스 문학이었다. 다만 이 교류는 1990년 이전까지는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한국은 프랑스를 지나치게 알았는데, 프랑스는 한국을 거의 몰랐다.

한국과 프랑스 문학의 본격적인 교류가 오늘날처럼 활발해 진 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인이 동시적으로 작용한 데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1990년 대 초엽의 소수 번역자들의 선구적인 시도와 혁신을 추구하는 프랑스 출판사들의 협력이 주효했다. 최윤과 파트릭 모뤼스가 이문열의 금시조, 이청준의 예언자, 당신들의 천국등을 악트 쉬드 출판사에서 냈고, 오정희의 바람의 넋, 김원일의 바람과 강등이 필립 피키에 출판사에서 출간됨으로써 한국문학의 조직적인 프랑스 진출이 시작되었다. 금시조예언자등에 대한 언론의 주목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La mort à demi-mots에 이어, 이승우의 생의 이면이 호평을 받았다. 2004년에 출간된 황석영의 손님은 한국문학을 프랑스의 독서 시장에 정착시켰다. 황석영은 그 후 프랑스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 왔다.

둘째, 번역가들의 시도는 한국의 문화 기구를 자극하였다. 1993년 대기업 교보 생명의 지원을 받은 대산문화재단Daesan Foundation’한국문학의 세계화를 핵심 목표를 삼으며 출범하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 및 소개를 위한 각종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한국문학 번역금고1996년 출범하여 2001한국문학번역원으로 개명하면서 한국정부의 법정기관으로 등록되었고, 그 이후,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번역 및 교류, 그리고 번역가 양성에 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해 오고 있다.

셋째, 한국문학을 프랑스에 알리는 데 기여한 또 하나의 원천은, 한국 문학에 호의를 가진 작가들, 특히 르 클레지오Le Clézio와 클로드 무샤르Claude Mouchard의 한국문학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 소개였다. 2006년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이해서, 프랑스 문인들과 한국 문인들이 함께 모인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르 클레지오는 한국문학이 프랑스 문학에 앙가쥬망engagement’(참여, 혹은 구속으로 번역됨)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일부 한국작가들을 당황하게 만들긴 했으나, 한국문학의 가치를 확인하는 발언이었다. 또한 시 부문에서 끌로드 무샤르는 한국 유학생들을 통해 한국시에 접했고 곧바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현대시, 특히 황지우, 김혜순, 기형도, 송찬호 등의 시는 세계시의 보편적 경향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훨씬 역동적인 비유와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한국시를 프랑스에 알리는 데 전력을 기울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넷째, 문학과 인접해 있는 다른 예술과 문화 부분의 성취가 한국문학의 이해를 도왔다. 특히 한국 영화는 자국에서 헐리우드 영화의 세계적 지배에 저항한 모범적 사례로서 특별히 프랑스 영화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등의 영화에 대한 프랑스 영화평론가들의 적극적인 평가가 한국영화를 세계 영화의 독자적인 한 영역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문학 내적인 요인일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양국문학교류를 위한 가장 큰 지침이 될 것이다. , 문학의 교류는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 얻을 것이 있어야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문열의 금시조에 대해서처럼 한국의 고유한 미의식(예도[藝道])의 발견이 되었건, 혹은 이청준의 예언자에 대한 미셀 브로도Michel Braudeau의 해석이나,

 

예언자의 방식은 바타이유와 폴린르 레아즈의 그것에 가깝다. 그러나 O의 이야기의 주제와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예언자와 그 작가 생각으로는, 노예 상황 속에서는, 개인을 위해서건, 군중을 위해서건 어떤 행복도 없다.” - 르 몽드1991.11.22.

“Celle du Prophète est proche de Bataille et de Pauline Réage, mais s'oppose radicalement à la thèse de l'Histoire d'O. Pour le prophète et son auteur, il n'y a aucun bonheur dans l'esclavage, ni pour un homme ni pour un peuple.”, Le Monde, le 22 novembre 1991


황석영의 문학세계에 대한 르 클레지오의 반응과도 같이, 보편적 세계인식의 확장적 이해나 환기로 이해하건, 한국문학이 프랑스 문학에 대해,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양국문학교류가 활발해진 데에는 프랑스와 한국이 서로에 대해 무언가 취할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서로를 위해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아직 아쉽고 우리가 더욱 노력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좀 더 문학적인 깊이가 있는 작품들이 교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선 프랑스 문학의 한국수용의 경우, 그렇게 많은 프랑스 문학이 번역되는 데도 불구하고, 가령 프루스트Marcel Proust나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아라공Louis Aragon이나 쥘리엥 그락Julien Gracq 등과 같은 고급한 문학이 불문학 전공 연구자들 외에 일반 독자들에게 거의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 독자들이 아직 깊이 있는 문학작품을 소화해낼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독자들이 깊이 있는 프랑스 문학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섬세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양국언어의 호환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을 한탄해서는 나아질 게 없다. 한국의 번역가들은 그 점에서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호환성 제고의 필요는 한국문학의 프랑스 수용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이다. 비교적 활발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아직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생각의 굴곡이 복잡하고 감각의 깊이가 깊어서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작품들이 제대로 소개되고 있지 않다. 가령, 벨멩-노엘Jean Bellemin-Noë̈l씨는 최인훈의 광장이 가진 문학적 가치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이 소설에는 무언가가 마치 현실인 것처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 놀라고, 거기에서 새로운 문학의 계시같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통찰은 번역의 불투명성을 걷어내는 힘겨운 작업을 동반하였다. 아마도 나는 그가 정신분석비평을 하기 때문에, 그런 여과작업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통찰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우며, 일반 독자의 차원에서는 아직 고급한 한국문학이 소개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또한 가리킨다.

이러한 문제는 좋은 번역가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양국의 언어를 모국어의 수준에서 사용하고 문학작품을 섬세히 음미할 능력을 가진 좋은 번역가들이 배출될 때, 비로소 한국문학의 실질적인 대표 작품들이 프랑스의 독자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조나탕 리텔Jonathan Littell착한 여신들Les Bienveillantes이 오샹Auchan(프랑스의 대형 수퍼 마켓 중의 하나)에서 베스트 셀러로 팔리는 프랑스에서, 최인훈이나 서정인의 작품이 팔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제는 두 나라 언어의 호환성을 여하히 증대시키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문학 번역원이 번역자 양성 프로그램을 아주 중요한 사업으로 운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 프랑스의 아늑한 남쪽 나라로 날아 온 한국의 작가들은 지금의 필요에 가장 부응하는 사람들이다. 소설가 이인성씨와 조경란씨는 많은 독자 대신에 고급한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따라서 그만큼 비평가들의 존중을 받고 있는 작가들이며, 한국문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작가들이다. 지금까지 번역된 이인성씨의 두 작품에 대해서는 벨멩-노엘씨의 훌륭한 비평적 분석과 더불어, 유럽Europe지를 통해서 그 문학적 수준이 소개된 바가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번역자인 최예영과 벨멩-노엘 두 분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지적 이해가 언젠가는 일반 독자들의 감각기관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조경란씨의 에 대해서도 역시 달리 말할 게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나는 이 자리에 나와 계신, 한국문학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신 모든 프랑스 독자들에게 하나의 호소로서 건네고자 한다.(쓴 날: 2011.4.18.; 발표: ‘프랑스 액상 프로방스Aix-en-Provence 한국문학포럼 (2011.05.03.~05.9), 2일째, 아비뇽 시립도서관(Médiathèque Municiplae d’Avign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