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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국문학 포럼(2010) 발표문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2:58

한국문학을 읽을 때 알아야 할 두세 가지 것들



한국문학의 특수성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들을 때마다 난감해진다. 한국문학에 나름의 독자성과 특수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코드Code’(Roman Jakobson적 의미에서의)가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다. 그 환경 하에서 한국문학의 특수성은 아주 편협한 지방성으로 비치거나 혹은 거꾸로 특수성이라기보다 유럽 중심의 세계문학의 보편성의 복제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사정은 대강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문학은 자국어 체제의 발달과 함께 생장하였다.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나라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경우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한자를 공용문자로 사용해 왔던 한국인은 1894년에 한국어를 주 공용문자로 정하게 된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한국이 근대화를 향해 내딘 첫 시도들에 해당하는 정책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얼마 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1910.) 그럼으로써 일본어가 공용문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기간 중 한국어의 위상은 급격한 속도로 높아지게 된다. 피식민자로 전락한 한국인을 다시 정신적 독립인으로 소생시키고자 하는 계몽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운동 중의 하나가 문맹퇴치운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 이후에도 근대화를 향한 열망 속에서 가속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어의 문맹율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이것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문 예에 속한다.)

1945도둑처럼 찾아 온 해방”(함석헌)을 맞고 한국어가 다시 공용문자의 지위를 회복하였을 때, 한국문학이 확고한 자국어의 틀 안에서 진화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일본어가 세계어 경쟁의 레이스에서 탈락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일본어로 문학 수업을 했던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해방과 더불어 한국어를 다시 배워야 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하튼 이러한 언어적 바탕 위에서 한국문학은 근대에 어울리면서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고유한 자국어문학의 세계를 이룰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문학의 행운이었다. 이 행운에 힘입어 한국문학은 서양의 근대문학을 자기식으로 변용해 수용하면서 고유한 문학세계를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행운이 오늘날에는 한국문학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행운이었을 때, 한국어는 한국문학의 토양이자 동시에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이 일원으로 자신을 등록시키고 세계의 다른 문학들과 교통하려는 지금, 한국어는 매우 난감한 장애물로 기능한다.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한국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한국인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틴 아메리카나 아일랜드의 소설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에 위치한 한국소설가들의 상황이다. 이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처방은 한국작가들이 세계 중심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에 그런 주장과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처음 시도한 한국 작가는 금세 한국어의 중력이 너무 강해서 언어의 전환이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한국인은 세계중심어를 생활어로 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소설가에게 언어는 듣기와 말하기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존재의 집”(Heidegger)인 것이다.

한국문학의 세계적 교류를 위해서, ‘번역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까닭은 이와 같은 사정에 근거한다. ‘번역필수불가결한과정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전 파리 8대학 교수인 클로드 무샤르Claude Mouchard씨는 한국인 제자들이 번역해 준 한국시를 읽고 한국시에 열광하여 한국시를 프랑스에 알리기 위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분이다. 그가 2008년 한국에 와서 한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시는 번역될 수 없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번역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한국시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한국문학 번역원대산문화재단등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문학의 세계화, 즉 세계 중심어로의 번역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 안에는 뛰어난 번역의 장려를 위한 각종 포상제도, 번역가 양성, 세계 문인들과의 동시통역을 통한 만남과 대화 등의 사업들이 놓여 있다. 이러한 사업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게 바로 번역인데, 그러나 아직 이 일에는 많은 난관이 놓여 있다. 첫째, 한국의 세계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 게 사실이고, 그러다 보니, 한국어 전문 번역가를 희망하는 인력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아직도 충분한 양의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많은 번역가들이 번역하기에 용이한 작품들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의 복잡성을 실험한 작품들은 거의 번역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문학의 특성에 대한 오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셋째, 번역의 중요성 때문에, 번역의 질이 문학작품의 가치를 결정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어느 원로시인의 시집에 대한 프랑스어 번역이라든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 대한 독일어 번역은 잘 된 번역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반면, 한국의 문학장 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수준 낮은 번역으로 인해 해외에서 평가절하된 경우가 무척 많은 게 또한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번역의 문제는 사실 한국인들 자신의 문제이다. 따라서 여기 한국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신 스웨덴 여러분이 책임을 느끼실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이야기를 굳이 한 것은 한국문학은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외국의 독자들이 이 점을 감안하여, 현재 소개된 한국문학의 현 상태만을 가지고 예단하는 일을 삼가주십사 하는 당부를 드리고자 함이다. 앞으로 한국문학은 잘 훈련된 번역가 집단과 좀 더 조직화된 번역 시스템을 통하여 자신의 진면목을 서서히 드러낼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봐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다음, 한국문학의 특성을 짚어 말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은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인접한 두 나라와 상당히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나라와 같은 특별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동북아시아 3국에 공통된 문화적 보편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는 일본의 문화를 잔혹성의 문화혹은 기호의 제국’(Roland Barthes)이라는 말로 특성화할 수 있다. 일본 문화에서는 모든 것이 인공화되고 이 인공성은 그 자체로서 첨예해지고 극단화된다. 반면 거대한 나라 중국의 무궁무진한 문화는 일찍부터 도가적 신비주의라는 인상에 의해 안개처럼 감싸여진 채로 서양인에게 인식되었다. 한국인의 문화와 문학에 두 나라의 그것들에 비견할만한 특성이 있는가? 한국문학에는 그런 게 사실 보이지 않는다. 대신 한국문학에는 동북 아시아 삼국이 오랜 기간 동안에 공유해 온 문화적 태도, 그리고 서세동점 이후 공통적으로 겪었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성찰이 있다.

나는 방금 공유된 전통과 공유된 경험을 말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야할 것이다. 세 나라가 모두 서양으로부터 밀려온 모더니티의 충격을 통해 삶의 양식 전반이 재편되었으며, 3세계의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재빨리 그 모더니티를 생활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세 나라 사이에 매우 큰 편차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 세 요인의 결합에 의해서 동북아시아 3국은 독특한 문학과 문화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 말은 세 나라가 모두 서양의 모더니티를 생활화하였으면서도 자신들의 문화와 문학은 서양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의 독특한 결합을 통해서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어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한국의 문학과 문화는 그 결합이라는 작용 자체에 집중한다. 다른 두 나라가 그 결합의 결과에 더 집중하는 데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우선 여기에서 출발하여 서양문학과 한국문학이 어떻게 다른가를 본 다음, 다시 그것을 동북아시아의 다른 문학과 비교해 보기로 하자.

한국인이 서양의 모더니티에 일찌감치 매력을 느끼고 그것을 빨리 제것화(appropriation)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려 했다는 증거는 사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열망 자체는 곧바로 서양의 모던한 문학과 문화의 직수입을 낳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고 서양문학과 재래 언어문화 사이의 결합을 통해 유전자적으로 특이하게 변형된 변이형으로서의 근대문학을 낳았다. 몇 가지 특징적인 사례를 통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아래 두 문단의 내용 중 일부는, 최근 필자가 유럽Europe(No 973, 2010.05)에 발표한 글, 한국문학에 있어서의 1987(L'année 1987 dans la littérature coréenne)에 썼던 내용을 되풀이 한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의 초기에 가장 강력한 문학적 주제는 자유연애였다. ‘자유연애가 근대적 심성의 하나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심성은 자유에 관한 여러 다양한 실질적 요소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일방적으로 한국의 근대문학에 쇄도하였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문학적 주제는 18세기 프랑스의 마리보Marivaux가 보여준 것과 같은 감각의 탄생(naissance de la sensation)’을 동반하기보다 자유연애를 향한 뜨거운 정념(passion)의 탄생을 동반하였다. 다시 말해 자유 연애는 감각적 사실이라기보다 윤리적 사실이 되었다. 이 끓어오르는 정념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아비투스에 비추어 보면 도덕적으로 부정impure’한 것이었고,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을 권장하는 근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당한 윤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근대 초기의 문인들은 전통적인 유교 및 그것에 동조하는 태도를 비윤리적인 정신적 억압체로 비판하기 위해, 자유 연애를 상징적인 사례로서 활용하였다. 자유 연애는 세밀히 탐구되기보다 도구로서 기능하였다.

이 같은 사정은 근대 소설의 원칙을 적용할 때에도 비슷하게 작용하였다. 소설에 있어서 리얼리즘의 제 1의 덕목이 디테일의 정확성이라고 학습한 한국의 근대 소설가들은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실천할 수가 없었다. 사실을 추리고 관찰하고 실험하는 훈련이 채 숙달되지 않았던 탓이다. 대신 한국의 근대 소설에는 감정의 무늬에 대한 매우 세밀한 색상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디테일이라는 원리는 수용되었으나, 그것은 관찰과 검증의 사안이 아니라, 향유의 문제가 되었다. 디테일은 정확해지기보다는 다채로워지는 게 한국 작가들의 욕망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한국문학에 과도한 형용사의 발달을, 롤랑 바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징조단위(indices)'의 과잉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변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의 소유자에 관한 것이리라. 근대의 가장 중요한 이념은 천부인권과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개인주의의 이상적 덕목들일 것이다. 이 덕목들의 배경에 놓인 것은 신의 숨음(Dieu caché)과 이성의 승리이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이 인간중심적 사고를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 이 인간중심적 사고가 개성적 개인들을 출현시킨 반면, 한국의 근대문학에서 개인은 거의 대부분 민족으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한국 소설에서의 주인공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개인이라기보다 민족 혹은 그에 버금가는 어떤 보편적 이념을 대리하는 존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서양에 가장 먼저 한국문학의 존재를 알린 이문열의 금시조의 경우를 보자. 이 작품은 예술의 기능에 대한 두 화가의 입장의 대결이 핵심 주제이다. 이 대결은 언뜻 생각하면 예술의 사회적 참여라는 이념과 순수한 창조적 주관으로서의 자유로운 영혼 사이의 대결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대결은 금방 소포클레스 희곡에서의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즉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어떤 요구와도 무관한 개인의 고유한 소망을 중시할 것인가의 대립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핵심 대립이 국가와 개인 사이에 단절선을 긋고 있다면, 금시조는 사회와 예술 사이에 단절선을 긋고 있다. 사회 참여도 하나의 보편적 이념이고 예술의 고유한 길, ‘예도역시 하나의 보편적 이념이다. 그렇다는 것은 서양의 근대문학이 저 오래된 루카치적 정의가 가리켜 보여주듯이 자아세계의 대립과 대결에 근거하고 있다면, 한국의 근대문학은 이념과 이념, 세계와 세계의 대립과 대결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국 근대문학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인물들은 그 이념, 세계의 대리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양문학의 사회성과 개인성이라는 대립구도에서, 그 대립구도의 형식과 하나의 원소인 사회성은 수용되었으나, 또 하나의 원소인 개인성은 보편성을 띤 다른 원소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조셉 로스Joesph Roth끝없는 탈주La fuite sans fin(Gallimard, 1959)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파시즘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집단적 폭력에 단호히 저항하다 돌아간 이 작가는 프란츠 툰다Franz Tunda라는 주인공의 이색적인 생을 들려주면서, 어떤 관계, 어떤 삶에 대해서든 근본적으로 어떤 믿음도 가지지 않고, 어떤 인연에도 매이지 않으며, ‘허기죽음에의 공포에도 개의치 않으면서, 오직 자신의 내적 충동이 인도하는 대로 산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superflu 인간을 두고 개인주의자이며 근대인homme moderne”이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문학에는 이런 개인주의자, 즉 근대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문학의 개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즉 가족의 이름으로든 민족의 이름으로든,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든, 특정한 믿음(이념), 인연과 공동체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확인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석영의 손님이 한국전쟁에 대해서, 단순히 바깥에서 들어 온 좌우이데올로기에 들린 사람들이 그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어 동족상잔을 벌인 것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의 주관적 선택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지와 욕구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임을 암시하고 있다면, 동시에 그 의지와 욕구는 각 인물이 스스로의 내면의 움직임을 통해 키워 온 의지와 욕구라기보다는 가족과 종교와 당이라는 특정한 공동체에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얻어진 의지이자 욕구라는 걸 그 작품은 동시에 일깨우는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을 비롯해 많은 한국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끈질긴 생존력 역시 가족이라는 매개자를 통해서만 발휘되는 것이니, 그것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가족이라는 기본 단위 위에서 움직이는 주 인물들의 태도와 생각이 전혀 가족적이지 않고 개인주의적이라는 점과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다.

이상의 풀이는, 한국문학이 모더니티의 존재양식과 재래적인 습속 사이에 위치하면서 그 결합의 알고리즘에 대해 다양하게 실험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이러한 탐구를 좀 더 의식적으로 개진하면서, 그것을 언어와 현실 등의 모든 부면에서 동시에 끌고나간 작가들이 있음을 우리는 또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20세 초엽의 이상(李霜)으로부터, 20세기 후반기의 최인훈, 이청준, 이인성 등이 그들인데,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언어의 복잡성으로 인해 활발히 소개되지 못했다. 앞부분에서 내가 번역의 문제를 거론한 것과 연관된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동북아의 다른 나라의 문학과 어떻게 다른가? 다시 이문열의 금시조로 돌아가 보자. 그 작품에 대해 사회적 참여와 순수 예도 사이의 대립이라고 조금 전에 말했다. 우리가 예도라고 부른 부분, 그것을 사회적 참여라는 의무와 무관하게 순수하게 발전시킨다면 아마도 우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근대소설이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라는 근대소설의 구도를 받아들이되 자아를 탐미로 대체하는 한편, 대립 구도 역시 한 쪽에 대한 몰입으로 대체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일본에만 있다고 이야기되는 사소설의 경우를 보자. 그것은 말 그대로 개인주의의 의식을 철저히 드러내는데, 그런데 그 개인은 서양의 개인과 엄격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서양의 개인은 사회적 억압에 도전하고 사회의 명령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의지로 사회를 구성해나가는 개인인 데 비해, ‘사소설의 개인은 사회와 일체의 관계를 맺지 않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는 것은 일본의 사소설이 개인/사회의 근대적 대립을 받아들이되, 그 대립을 폐기하는 방식을 통해 개인만을 남기고 그 개인에게로 집중함으로써 태어난 특별한 소설 양식임을 보여준다.

이상의 얘기는 결국 동북아시아의 문학이 모더니티의 문화와 재래적인 언어문화의 결합을 통해 나타나는 특이한 변이형을 보여주는데, 한국 소설이 그 결합의 현장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묘사하고 성찰해 왔다면 다른 두 나라의 문학, 특히 일본 문학은 그 결합의 결과에 집중함으로써 결합의 과정을 지우면서 그 결과로 나타난 특이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일본의 문학이 특별히 신기한 문학으로 비치는 반면, 한국문학은 그 강도가 약하게 느껴지거나, 아니면 여전히 서양 모더니티의 압도적인 영향 하에 놓여 있는 복제품처럼 판단되도록 하는 요인이 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생활의 주된 양식이 서양적인 방식으로 재편된 모든 제 3세계의 문학이 겪고 있는, 모더니티와 재래적 습속의 이질적 결합(hybridization)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동북아라는 특별한 차원 위에서, 그리고 한국이라는 특별한 양태 속에서, 가장 정통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게 한국문학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은 어떤 점에서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따라서 그 특수성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보편성은 보편과 특수의 싸움이라는 오늘날 지구의 보편적 양상을 여실히 전형적으로반영한다는 점에서의 보편성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쓴 날: 2010.06.04.; 발표: ‘한국문학번역원 스칸디나비아 포럼’(2010.06.14.~17.), 2일째, 2010.06.15.)

 

추기: 이 글은 이 포럼을 위해 씌어지긴 했으나, 실제로 발표 당일, 나는 위 글과는 닮은 데가 거의 없는, 지극히 축약되고 단순화된 번역에 관한 부분만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