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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시인, 그들의 시론’, 「기획의 말」 본문

울림의 글/문학일반

‘철학자와 시인, 그들의 시론’, 「기획의 말」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3:50

 


 




철학자는 시를 꿈꾸고 시인은 진리를 소망한다.



플라톤이 자신의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하려 했다는 것은 오래된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관념은 과장된 것이다. 그는 시인을 추방하려하기보다 시인에게 제한을 두려고 했다. 흔히 거론되는 공화국, ‘10’(플라톤의 공화국의 인용은, OEuvres Complètes, Tome VI~VIII, Textes établis et traduits par Émile Chambry, SOCIETE D'EDITION LES BELLES LETTRES, 1974~1989에 근거한다.)의 첫 머리에서 그는 자신이 세우려는 공화국이 최고의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단 그것을 위해서는 시를 규제할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규제는 모방 안에 있는 시의 어떤 부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 어떤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 이어지는 풀이에 의하면 모방을 실행하는 비극 시인들 혹은 여타 저자들모든 작품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영혼의 파괴를 유발하기 때문에 해독제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독제는 그 작품들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였다.

플라톤이 시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경계를 한 것은 그가 시를 열등한 모방기제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국가의 건설 및 유지에 직접 관련되는 것으로 보았다. 가령 그는 메논에서 국가를 다스리는 능력은 교육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신으로부터 부여되는 천품임을 적시하면서, 그 점에서 통치자들은 예언자들과 다르지 않고, 그들이 하는 말은 시적 희열délire”이고 그것은 신의 숨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énon, 99 b/c, OEuvres complètes, Tome III, 2ième partie, Textes établis et traduits par Alfred Croiset, SOCIETE D'EDITION LES BELLES LETTRES, 1984, pp. 278~280.) 그가 비난하는 것은 시라기보다 시인, 그것도 모방을 수행하는 비극적 시인 및 그 비슷한 존재들인데, 그것은 그들이 폭군을 찬양”(공화국8, 568 b)하기 때문이다. 반면 시 자체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주 시의 소중함을 기렸고 그때는 한결같이 모방과는 다른 각도에서 시를 보았다.

 

선생은 아이가 좋은 서정시 작품들을 배워 시타를 연주하며 그것들을 익히도록 해서, 아이의 영혼에 리듬과 선율이 스며들고 아이들이 그에 동화되어서, 리듬과 조화의 영향 아래 아이들의 말과 행동이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삶은 조화와 리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프로타고라스Protagoras, 326 a, OEuvres complètes, Tome III, 1ière partie, Textes établis et traduits par Alfred Croiset, SOCIETE D'EDITION LES BELLES LETTRES, 1984)

 

게다가 플라톤의 글쓰기 자체의 아름다움은 또한 어떠한가? 한 주석자가 플라톤은 철학자인만큼 시인이다. 그는 삶을 추상에 의탁하는 재능과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게 하는 재능을 한꺼번에 가졌다”(공화국8, 553 c의 주. 위의 책, Tome 7 , 2ième partie, p.20.)고 기록한 걸 읽게 될 쯤이면, 플라톤은 시인을 미워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선망한 게 아닌라, 라는 생각까지 해볼 수 있다.

실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은 두 가지이다. 하나.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하려 한 게 아니라 규제하려고 했다. 적어도 그는 특정한 시인들은 추방하는 댓가로 시의 덕성을 더욱 선양하려고 했다. , 그는 시를 규제하는 방안을 시에 대한 인식에서 찾았다.

이성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성격을 제하고 읽으면, 우리는 플라톤의 의지가 시의 한계에서 시가 생생히 살아있게 하고자 하는 특별한 의욕임을 알 수가 있다. “시에 대한 인식을 지금의 맥락에서 풀이하자면, 시에 과학적인 정의를 주는 게 아니라, “시의 본성을 되새기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시가 잘못된 일에 쓰이는것을 막으려 했다. 그럼으로써 시의 최초의 생기이자 최종적인 불멸을 시의 숨결로 불어 넣고자 했다. 그것은 그가 시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시의 숨결이 신의 숨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철학자가 시에 품은 이런 소망이 최초의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후대의 철학자들이 시원의 아버지를 따라 끊임없이 시에 개입하려 한 흔적을 무수히 찾을 수 있다. 가령, 데리다가 일본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1983710일의 편지, Jacques Derrida, 프시케 - 타자의 발명들Psyche - Inventions de l'autre , Galilée, 1987, pp. 387~93.)에서 해체déconstruction’를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 속에 모든 정의의 부정을 거듭 행하고는, 즉 어떤 다른 용어로도 대체시킬 수 없음을 직접 실연하고는, “해체는 본질적으로 대체 연쇄 속에서 대체될 수 있는 단어라고 천연덕스럽게 결말을 내리면서, 실상은 해체는 오직 대체 연쇄 속에서만살아남을 수 있는 어사라는 얘기를 은밀히 속삭이면서, 따라서 ‘déconstruction’이라는 프랑스어가 어떤 아름다울일본어로 대체될 수 있을 것임을 제안한 후, “내가 이러한 [프랑스어 déconstruction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일본어로 된] 다른 단어의 글쓰기에 대해 말할 때, 나는 분명 위험으로서의 번역la traduction comme le risque’ 그리고 시의 기회la chance du poème’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 하나의 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라고 메지를 낼 때, 독자는 자신의 철학을 시의 반열에 놓고자 하는 철학자의 욕망을 너무도 생생하게, 다시 말해, 전율적으로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욕망 속에서 태어난 게 바로 데리다의 철학이었으니, 그는 실로 어떤 철학적 원리도 물려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어떤 읽는 방식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즉 데리다의 철학은 적용할 게 아니다. 그것을 항구화시키고 끊임없이 다시 펼치는 게 중요한 것이다라는 베닝톤의 진술(Geoffrey Bennington, 요컨대 읽기를 가르치기 (Apprendre à lire enfin), Le Magazine littéraire, No 498, 2010.06, p.64), 범박한 진술로 그 희한한 존재론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획에 수록된 글들은 바로 그러한 철학자들의 시 되고자 하는 욕망(시인이 되고자 하는 건 아닐지라도)을 읽고, 그 욕망이 시의 존재에 끼치는 효과를 읽으려는 시도들이다. 정독한 독자는 그 욕망이 한없이 다양하고 동시에 한결같음을 알 수 있으리라. 동시에 그 욕망은 실은 시의 작업 자체라는 걸, 또한 언급된 시인들의 시론 혹은 발언을 통해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철학자와 시인은 너무나 생생한 증오 속에서 하나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험한 관계도 끝없으리라. (쓴 날: 2010.7.22.; 발표: 현대시20108, 기획, ‘철학자외 시인, 그들의 시론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