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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메텔뤼스를 추모하며

비평쟁이 괴리 2014. 2. 4. 20:47

지난 16일 장 메텔뤼스 Jean Métellus가 타계했다. 그는 아이티의 시인이다. 프랑스의 저널들은 일제히 아이티의 위대한 시인이 돌아갔다는 제목을 단 기사를 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르몽드지 서평란을 통해 그의 시집을 샀다가, 서문에 나의 지인인 클로드 무샤르Claude Mouchard 교수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무샤르 교수에게 그에 대해 물어 보았고, 그가 무샤르 교수와 함께 젊은 시절 의대를 같이 다녔으며, 무샤르 교수가 의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돌아섰다면, 그는 의사도 되면서 시인도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무샤르 교수의 오를레앙 집에서도 한동안 머물렀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사연보다 그에 대한 관심을 키운 것은 그의 시의 야릇함이었다. 얼핏 읽으면 밋밋하고 시답지 않아 보였는데 자세히 읽으면 복잡한 구조가 그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오늘 그의 시 한 편을 음미하는 것으로 추모를 대신하고자 한다. (이하의 내용은, 21세기 문학2014년 봄호에 수록할 원고, '문학의 사회적 지평을 열어야 할 때'에 포함되었다.)

 

피부, 특수하고도 공유된 살의 스크린

으스대며 뽐내는 퍼레이드 혹은 조롱거리.

선과 악을 가르는 멜라닌 휘장

권력을 가졌는지 힘이 없는지 보여주는 문장(紋章), 덧없어라.

착시로 얻은 미의 가봉(假縫)

피부는 영혼을 숨겨준다.

 

복숭아 껍질, 오렌지 껍질, 바나나 껍질

천사 피부, 뱀 허물

 

메텔뤼스의 마지막 시집피부, 기타La peau et autres poèmes(2006)서시에 해당하는 시다. 한 때 유럽의 식민지였던 중남미 시인이 피부에 대해 노래하는 까닭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검은 피부가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괴로운 정신적 고통이었는가는, 수많은 기억과 통계와 문화적 체험과 그리고 자신의 피부를 탈색시키려고 갖은 애를 쓰다 죽을 때까지 양산을 쓰고 다녀야 했던 어느 가수의 일화 같은 사건들을 통해 세계인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독자의 눈을 따끔거리게 하는 것은 시의 이 나른한 어조와 아름작한 심리이다. 세제르Aimé Césaire의 겨레붙이이자 세제르의 추앙자인 그의 시는 세제르의 시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새벽 막바지, 가냘픈 만들이 싹을 틔우는데, 앙티유는 배고프고, 앙티유는 천연두 우박으로 뒤덮이고, 앙티유는 알코올로 폭발하여, 이 만의 진창 속에 처박혀 있네, 침울히 주저앉은 이 마을의 흙먼지 속에.

 

새벽 막바지, 가슴아파하는 척 하는 극단(極端)이 물의 상처 위에 부스럼 딱지로 앉는다. 순교자들은 증언하지 못하고, 피로 피어났던 꽃들은 시들어 무익한 바람 속에서, 종알거리는 앵무새들의 비명처럼 파닥인다. 미소를 가장한 낡은 인생, 퇴색한 불안으로 벌어진 그의 입술, 태양 아래 썩어가는 낡은 비참, 식은 종창들이 곪아 터진 낡아빠진 침묵,

우리 존재 이유의 끔찍한 부질없음.

 

로 시작하는 귀향 수첩Cahiers d'un retour au pays natal(1939, 1956)과 비교해 보라. 이 숨 막히고도 숨 가쁜 격정을 메텔뤼스의 시는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그런 직정적인 반응 대신 미묘한 망설임과 모호함이 미적지근하게 흐른다. 처음엔 인종 차별에 대한 냉소적인 아이러니가 돋보인다. 독자는 그런데 옛 식민자의 언어로 쓰여진 이 글의 이랑이 각성한 아이티인의 빈정거림인지, 반성하는 유럽인의 자조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 아니 차라리 두 마음이 함께 포개져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첫 연의 마지막 행에서 알쏭달쏭한 문장을 만난다. “피부는 영혼을 숨겨준다.” 무슨 뜻인가? 피부색 아래 어떤 보편적인 영혼이 숨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피부가 그것을 숨겨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리는 게 아닌가? 혹시 바로 앞의 진술 자체를 피부가 숨겨주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가령 피부색과 관계없이 누구나 보편적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누가 하는가? 바로 검은 피부를 가졌거나 반성하는 백인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피식민자의 영혼은 보호되는 듯 싶은데, 그러나 그 말을 통해서 그 영혼은 보호되기보다는 활용되는 건 아닌가? 아프리카 토착의 주술이 현대 예술로 변개하듯. 혹은 마사이 주민의 보행이 새 신발을 탄생시키듯. 아메리카 인디언의 포틀래취potlatch가 마치 전위적 인간관계인양 추앙받듯. 거기에 깃든 영혼은 정말 보편적인가? 그렇게 재개발된 영혼은 그 피부색의 인간들과 무슨 상관인가? 상관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거기엔 질료제공자와 가공자 사이의 아주 복잡한 심리의 교환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피부는 영혼(에 대한 환상으로서의 영혼)에 도피처를 제공해주는 게 아닌가? 두 번째 연은 그러한 우리의 짐작을 적절히 확인시켜준다. 사실 이 짐작이 아니었다면 두 번째 연은 전혀 음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보니, 피부는 맛난 과육을 보호하고 있다가 곧 용도폐기당하는 과일 껍질 같은 것이다, 천사의 피부인 듯하지만 뱀의 허물이다, 라고 두 번째 연은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니까 그 진술에는 각성한 독립인과 반성하는 옛 식민자의 시선들이 발양(發陽)한 원주민과 계산에 바쁜 모험가의 시선들에 굴절되어서 특이하게 일그러지고 겹쳐진 상들이, 그 아주 층지고 분산된 마음들이 윤곽을 톱질하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첫 연의 마지막 행의 진술이 그렇게 복잡한 마음의 굴곡을 말고 있다면, 이 진술은 또한 주제와 어법의 기묘한 교응을 보여준다. 내용의 복잡성은 시치미를 떼는 듯한 어조의 건조함과 맞물리면서 반성과 아이러니와 체념과 분노와 비애와 저항의 감정들, 어느 것도 아닌 듯이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 전부인 듯이 보이는 모호한 어조를 형성한다.

이 평범한 듯 보이는 이 시가 왜 이리 어려운가? 다름 아니라 피식민자였던 가난한 독립국민의 심사가 그렇게 복잡하기 때문이다, 라고 밖에는 달리 대답할 길이 없다. 이것을 두고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익숙한 사람은 대뜸 하이브리드라는 용어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복합성은 그런 용어의 뻔뻔한 매끈함을 무색케 한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문학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다.(쓴날: 2004.02.02.)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La peau, écran de chair singulier et pluriel

Parade ostentatoire ou dérisoire

Insigne mélanique du bien et du mal

Emblème éphémère de puissance ou de faiblesse

Enveloppe provisoire d'une beauté illusoire

La peau abrite l'âme

 

Peau de pêche, peau d'orange, peau de banane

Peau d'ange, peau de serp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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