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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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글

손열음의 필력

비평쟁이 괴리 2013. 4. 14. 19:42

『중앙 선데이』는 판매자의 집요한 전화 공세에 떠밀려 구독하긴 했지만, 그래도 '보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게 하는 건 손열음의 칼럼이다. 나는 음악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젊은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뛰어난 기량의 연주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전달된 소식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다만  이 사람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지금까지도 내 몸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으며, 주일 간격으로 새로 실린 그의 글들과 공명을 한다. 그의 글이 주는 신선함은 그의 음악연주자로서의 체험에서 그대로 낚아 올린 듯 파닥이는 이야기가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낯선 정보와 한국의 예술가들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생각의 깊이를 동시에 담고 있다는 데서 온다. 오늘자 칼럼만 해도 나는 기준 음정의 미세한 선택적 차이들에 대해 이렇게 실감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바짝 흥미가 당긴 데 이어, 그러한 차이를 '시대정신'에 연결시키는 글쓴이의 과감성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과감한 게 아니라 정확한 것이다. 한 시대의 집단 무의식이 그걸 요구했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들의 압박이 몰아간 어느 임계적 지점에서 기준음정의 물리적 수치가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집단무의식의 그런 내역을 정확히 재현하고 분석하는 연구의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아직 제대로 나온 바가 없다. 물론 푸코의 『말과 사물』을 비롯한 일련의 역사적 저작들, 폴 베니뉴Paul Bénichou의 정신사 작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문화사가 탐구의 넓이와 사색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으나, 그들의 통로는 저마다 상이하고 공유하는 자원도 희박해 후학들이 그들을 따라가려면, 언제나 맨 처음부터, 그러니까 맨땅에 헤딩하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저 위대한 정신들이 주파한 거리의 반에도 못미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는지, 젊은 음악가는 "음정이 시대를 모방한 건지, 시대를 고양한 건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고 대범하게 덮고 있지만, 그의 이런 진술이 우리에게 주는 자극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세계의 지식과 문화와 정신을 탐구하기를 자신의 본업으로 선택한 세칭 인문학자들이 이제부터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런 정신적 운동을 집단적인 협력의 방향에서 탐구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개발하고 개별적 성과들을 보편적 의미로 치환하는 모듈화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다. (2013.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