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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프랑스의 여성시

‘프랑스의 여성시’를 번역 소개하면서

비평쟁이 괴리 2021. 1. 5. 07:59

계간 『시사사』(한국문연)의 요청으로, 2020년 겨울호 부록으로 번역 • 게재한, ‘프랑스의 여성시’를 블로그에 올린다. 아래 글은  ‘서문’에 해당하는 글이다.

문학의 기본 꼴이 서양 문학의 방식으로 재편된 이래, 즉 근대 이후의 한국 문학장()에서, 프랑스의 시는 한국의 시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5세기의 프랑수아 비용François Villon으로부터,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폴 발레리를 거쳐, 얼마 전 작고한 이브 본느푸아Yves Bonnefoy에 이르기까지 수다한 시인들의 시가 한국시에 전사(傳寫)되어 창조의 영감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 여성 시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치 프랑스에는 여성 시인은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그러나 그렇지 않다. 프랑스 문학이 라틴문학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꼴을 갖추게 된 것이 12세기 무렵인데, 이때 최초의 시인은 프랑스의 하급 귀족이었던 앙리 플랑타쥬네Henri Plantagenet ’, 즉 헨리 2세가 통치하던 영국 궁정에서 활동한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여성 시인은 꾸준히 출현하여 장구한 자율적인 문학사를 형성해 왔다.

우리는 오늘 프랑스의 여성 시인들을 일람함으로써 그동안의 무지와 편견에서 해방되는 첫걸음을 내딛고자 한다. 시기는 중세에서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이며, 시인들의 수는 31인이고, 시편은 모두 48편이다. 이들은 프랑스 여성에 의해 씌어진 시들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비교적 독자들에게 알려진 시인들을 중심으로 선한 것이다.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들은 처음 그 향기를 맡아 보는, 썩 두터운 다발의, 언어의 푸른 장미가 될 것이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한두 사람 정도 이름을 들어봤을 뿐, 직접 읽는 경험은 이 자리가 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더 나아가 세계의 독자들에게 이 시인들의 명성이 상대적으로 희박했다면 그것은 프랑스 문학권 내부에서 이들이 소수문학의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실로 상당수의 개략적 프랑스 문학사에서 이들의 상당수는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은 이들의 시가 열등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지배적인 시어체와는 다른 방식의 언어 조직을 만들어서 독자적 생명체로서의 여성시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귀띰하고 싶은 얘기가 이 사정에 숨어 있는데, 왜냐하면 직접 읽어 보시면 느낄 수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은, 이 시들의 대부분의 언어가 매우 복잡한 이중의미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들에는 직설이라고 착각되는 우언(迂言)들이 법석인다. 찬송 속에 냉소가, 경건 속에 관능이, 진심 속에 책략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도 시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 읽는 척하면서 그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파롤들, 외침과 비명과 신음과 꼬임과 저주와 어르고 달래고 두드림을 자화전음술(字話傳音術)로 독해하시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새로운 시형과의 만남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적 지평이 안전에 전개되는 일일 터이다. 거기까지 전진하시기를 역자는 소원한다.

각 시인들의 신원과 문학 세계, 그리고 시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정보는 훗날 단행본으로 묶일 기회가 있을 때 보충하고자 한다. 우선은 언어 그 자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숨결을 호흡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