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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비평은 창작의 지도자도, 하인도 아니다. 비평은 창작의 언어에 기대어 말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무슨 언어? 그 언어는 체험으로서의 논리의 언어이다. 창작의 언어는 삶에 관계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언어를 삶 그 자체처럼 드러낸다. 문학에 생생함, 구체성, 리얼리티가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처럼’이라는 토씨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문학작품은 현실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다시 살지만, 그 ‘다시 삶’은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다시 삶이다. 문학이 허구인 것은 그 때문이며, 작가는 그 허구의 삶을 통해서 현실의 삶의 부정성을 폭로하고, 보다 나은 새로운 삶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드러낸다. 그 현실에 대한 이해․판단과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의 복합체를 우리는 ‘세계관..
거기에 물이 흐르고 그 물 속엔 불꽃이 어려 있다. 거기란 오정희의 불꽃놀이(문학과지성사, 1995)를 말한다. 불꽃놀이는 물론 놀이이지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거기라 부른다면, 그곳이 물이 휘도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부딪치며 격앙된 물의 휘돎, 그것이 불꽃놀이가 가리키는 것이다. 오정희의 물의 표면은 인생이 비추이는 투명한 거울이다. 그 거울은 어찌나 투명한지, 그곳에서 인생은 문자 그대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되풀이되었고 새롭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 “깊게 상처받은 느낌”은 어찌된 일인가? 그 평온의 물 밑엔 상처입은 물, 꽉 막힌 물, 부패하는 물, 아편에 쩔은 물들이 난류(亂流)한다. 그렇게 어지럽게 흐르다가 문득 솟구쳐 오르고 추한 거품을 흘..
서정인의 문체 실험은 주목을 요하는 소설사적 사건이다. 그의 문체 실험은 『철쭉제』에서 시작되어 『달궁』에서 본격화되었고, 요즈음 발표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추구되고 있다. 그 문체, 아니 차라리 서정인적 ‘문체학’의 주 장치는 대화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보통 지문에서도 폭넓게 작동하고 있는 특이한 이음법이다. ‘말꼬리 잇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법한 그 특이한 이음법은, 한 사실 혹은 단언을 제시하고는 그것을 뒤집는 사실 혹은 단언을 뒤잇게 하는 기본 형식을 연속적인 사슬로 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때 이 단언들의 사슬은 간단히 서로 다른 두 견해의 대립의 개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랬더라면, 그의 소설은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한 일종의 ‘철학 꽁트’의 형태..
처음과 끝에 두 개의 길이 있다. 교도소 길목을 빠져나와 신작로 길로 내려간다. 그 사이에 공원이 있다. 도시도 있지만, 도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거기가 실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거기가 어딘가? 교도소가 도시다. 보라. 공원은 도시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교도소는 공원 아래쪽에 있는데, 저녁 때 해는 공원입구로부터 교도소 길목 쪽으로 비춘다. 그러니까 교도소는 공원 입구의 동쪽에 있다. 그 방향은, 만일 “공원 숲의 아래쪽”이라는 정보를 단면도상에서 읽는다면, 공원 숲의 동남쪽이다. 따라서 교도소는 도시와 같은 방향에 있다. 상징적 차원에서 교도소는 도시와 같은 장소성을 갖는다. 실제의 무대가 공원인 소설의 제목이 ‘잔인한 도시’인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감옥, “교도소 교도관들의 출퇴근 행사..
「남도 기행」은 서울 낚시꾼의 “행복한 방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방면’은 물론 석방의 다른 말이다. 그는 Y시의 남녘 바다에 바다낚시를 감으로써, “대도시의 진구렁”에서 방면되곤 한다. 그러나 방면은 탈출과 다른 말이다. 탈출과 달리 방면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다. 작가가 굳이 이 생경한 한자어를 쓴 까닭은, 서울 낚시꾼이 여전히 서울의 감시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일까? 과연 그는 바다에 와서도 ‘서울’의 표지를 떼어낼 수 없으며, 때가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그의 풀려남은 한시적이고 속박적인 것이다. 방면은, 따라서 해방이 아니라 해방에 대한 강박관념, 해방에 대한 열망과 절망이 뒤엉킨 감정의 덩어리를 지시한다. 그러나 서울 낚시꾼의 방면은 그가 준비하고 실행한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