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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지난해[1992]의 문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이른바 상업주의 소설이 당당히 제 권리를 주장하며 문화의 장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소설이 완벽한 소비 상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상품은 알짜배기 상품이어서 즐거움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도 주고 긍지도 주며 지식도 주고 교훈도 준다. 아니, 준다고 주장되고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 소설이 주지 않는 것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고통이다. 분명 그 소설들에도 난관과 시련은 있으나 그것은 훗날의 또는 마음의 영광을 보상하기 위한 중간 절차일 뿐이고, 그곳에 몽롱한 방황은 있으나 가슴을 찢고 머리를 빠개는 괴로움은 없다. 글쓰는 괴로움은 있는지 모르겠으나(원고지 메우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고뇌는 없으..
잊혀진 사실을 찾아가기는 최윤 소설의 특징적 주제이다. 등단작품인 『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부터 『회색 눈사람』을 거쳐 오늘 소개되는 「워싱턴 광장」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지속적으로, 그러나 언제나 첫 경험의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돌이켜보고 있다. 잊혀진 사실을 찾아간다고 했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찾아간다기보다는 되살려낸다. 왜냐면, 그에게 잊혀진 과거는 망각의 강을 건너지도 않았고, 역사의 시간대 저쪽에 요지부동으로 놓여 있는 고고학적 과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돌이켜 떠올리는 그것은 명백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서, 언제나 현재를 향해 엄습한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그것들은 시커먼 안경을 쓴 것처럼 흐릿하게 지워져버려서, 결코 또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혹은 거..
이 특이한, 특이하다기보다는 지저분하고, 지저분하지만 어쨌든 그것을 누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래서 독자를 무척 엉거주춤한 의식으로 몰아넣는 것이 소설의 제목에 등장했던 적은, 내 기억으로는, 예전에 유정룡이 「똥」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래, 두 번째다. 작가는 그것을 그의 두 번째 작품집의 표제로 삼았는데, 거기엔 까닭이 없지 않아 보인다. 내가 그것을 먹으로 삼아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탁본을 떠 읽은 것이 있다면, 녹천의 ‘똥’은 풍자의 매개물이나 해학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적 사유의 표지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 이창동의 소설은 사실주의적 계열에 속한다. 그는 우리 현실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휘말린 사람의 삶을 사건의 추이를 좇아 기술한다. 그러나, 핵심은 사건의 기록에..
이 늪 속에 빠진 사유, 참말(眞言)과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저 희원은 한국문학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자기 동일성의 주변을 하염없이 맴도는 사유의 똬리는 특히 여성작가들에게서 두드러졌던 한국적 문체의 한 표본이며, 삶의 정화(精華)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해탈을 꿈꾸는 희원 또한 한국문학의 일상적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낯설다. 흰 소가 끄는 수레에는 무언가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나 4년 만에 집필을 재개한 작가의 변모가 그 자체로서 한국문학의 변화를 자극하는 사건인 것 같은 놀라움을 준다. 그 ‘무언가’는 문체의 흐름, 사유의 운행을 휘몰아치는 속도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서 수레를 끄는 흰 소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은 찾을 수 없다. 정반대로 ‘낭만적 격정’이라고 이름 붙일 수..
모든 문은 다른 세상으로 통한다. 그리고 모든 지리적 경계는 언어의 경계이다. 문을 건너는 것은 곧 의미의 문턱을 넘어서 가는 것이다. 「산문」은 그 문의 본질에 육박한 소설이다. 그것이 단순히 구도의 소설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산문(散文)’을 거쳐 ‘산문(山門)’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산문이란 지리멸렬한 것인데(‘이 산문적인 세상’하고 푸념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그런데 산문이란 비의가 열리는 통로인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 「산문」의 산문은 상징적 기호로 충만해 있다. 그침 없이 내리는 비가 이 작품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고 깊은 무늬이듯이, 지네와 제비와 반디와 버섯과 승검초 등의 동식물들은 사건의 양념이 아니고, 주지 무이와 공양주 할멈과 부목 김씨도 두루 주인공 ‘법운’과 여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