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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미의식의 탄생 – 이태준과 황순원

비평쟁이 괴리 2016. 9. 15. 03:37

지난 호들을 통해 1930년대에 행동과 관조의 분화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원인과 성격과 양태들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이 사건의 근원에는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이 동시에 있다. 특수한 원인이란 한반도의 현상에만 작용하는 원인을 가리킨다. 그 특수한 근원을 ‘3.1운동의 좌절’, 즉 독립선언의 실패에서 보았다. 보편적 원인은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개재하는 것이다. 어떤 현상의 탄생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행동적 층위와 성찰적 층위, 좀 더 일반적인 용어로 바꾸어, 존재 층위와 의식 층위로 분화된다는 것이다1). 이 얘기를 하는 까닭은 특수한 원인이 자칫 이 분화를 부정적으로 인식케 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오히려 이 분화는 성장의 표지이다. 이것은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지, 부정적 상황의 수동적 반영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양태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다. 그 분화의 실제적인 양태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로부터 현실에 대한 기묘한 반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산포되어 있다. 김영랑으로부터 발원했다고 내가 주장하는 한국적 서정시는 그 하나의 양태이다. 그런데 이 다양한 양태들을 포괄하는 공통된 성격이 있다. 물론 그 성격은 한반도의 문학에 해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삶의 부면들에 대해서까지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다. 여하튼 그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어 문장에 처음으로 ‘미’에 대한 자각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미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발견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금세 의아하다는 반응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전 세대는 ‘미’를 몰랐다는 것인가? 그 말이 아니다. 다른 가치들과 미를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령 한용운의 시 「이별은 미의 창조」를 읽어 보자.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 시는 ‘미’에 대한 묘사가 아주 여실하다. 우선 표준적인 미가 있다. 그것은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이다. 첫 두 현상이 난해하긴 하지만 뒤의 두 현상에 근거하면 해독이 가능하다. 미는 ‘황금’과 ‘비단’이되, 아침 햇살이나 칠흑의 밤이라는 주변 정황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는 저 스스로 성립하며, 따라서, “푸른 꽃”도 가능하다. 미는 독자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이별의 미는 그런 표준적인 미에 더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은 바로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나”게끔 하는 힘이다. 미는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데, 따라서 현실과 무관한 것 같지만, ‘이별의 미’는 현실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만해가 ‘이별의 미’에 집중하는 이유다. 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이겨낼 힘이었으니까.

그 점에서 만해는 미의 자율성을 인식한 최초의 한국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헌데 우리는 이 시에서 ‘미’를 ‘진리’나 ‘도’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진리는 모든 현상 너머에 있으면서 현상을 제어하고, 도는 모든 규정을 넘어서면서 유명한 것들에게 이정표로서 기능하니까 말이다. 만해에게 ‘미’는 그가 묘사하는 미적 현상의 특별한 구체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좋은 것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렇다는 것은 만해의 미학이 선불교적 전통을 통해 내려오는 진리관과 호환되고 있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그리고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

1930년대는 그에 대해 결정적으로 다른 견해를 품은 시대다. 바로 즉 ‘진’과 ‘선’으로 대체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 때였다. 그것을 간명하게 정의한 게 이태준의 『문장강화』(1940)이며, 그 모범적 사례로서 출현한 시들이 황순원의 『골동품』(1936)에 모여 있다.


언문일치 문장은 민중의 문장이다. 개인의 문장, 즉 스타일은 아니다. 개성의 문장일 수는 없다. 앞으로 언문일치 그대로는 예술가의 문장이기 어려울 것이다.2)


이태준은 한반도의 문학이 한글을 매체로 삼았을 때 그 출발점이 언문일치이었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인식은 그만의 것은 아니리라. 한문의 오랜 문자적 지배로부터 벗어났을 때 한국어의 문자로서의 한글은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삶의 문자이어야 했고, 당연히 언문일치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글자를 말에 일치시키는 것은 글자의 표현을 언어공동체의 생활 감정에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언문일치의 문장은 틀림없이 모체문장, 기초문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문일치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은 세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는 개인의 문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은 삶 너머의 다른 차원에 대한 투시를 훼방한다는 것이며, 셋은 문자를 결국 생활 감정을 ‘전달’하는 수레, 즉 도구의 지위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태준은 그 문제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첫 번째 문제를 그는 명료히 의식하고 있었고 두 번째 문제를 그는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언문일치 문장의 완성자 춘원으로도 언문일치의 권태를 느낀 지 오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권태문장으로부터 해탈하려는 노력”이 “문장의 ‘현대’”를 탄생시키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즉 그는 언문일치가 문장을 정체시키고 새로운 문장은 언문일치로부터 해방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문장의 현대’를 ‘새로운 세상’으로 치환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안에 복잡한 경유로가 설치되어야 하겠지만. 여하튼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가의 문장은 일상의 생활기구는 아니다. 창조하는 도구다.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대상의 핵심을 집어내고야 말려는 항시 교교불군(矯矯不群)하는 야심자다.”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도 이태준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문자’가 일반적으로는 ‘문장’일 수 있으나 ‘말 그대로 문자’가 문학, 더욱이 문예에선 ‘문장’일 수 없다는 말이 ‘현대’에선 성립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말을 그대로 적은 것, 말하듯 쓴 것, 그것은 언어의 녹음(錄音)이다. 문장은 문장이기 때문인 것이 따로 필요한 것이다. 언어형태가 아니라 문장 자체의 형태가 문장 자체로 필요한 것이다.”

문자의 독립성, 그것은 말이 품고 있는 의미(그것이 생활감정이든, 데리다가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로고스’든, 아니면 간편하게 ‘시니피에’라고 지칭하든)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문자가 그 자체로서 의미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거기에 문학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이론화한 사람은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이었다. 야콥슨은 언어의 ‘메시지’에 시적 기능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야콥슨은 이 말을 통해 언어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통째로 뒤집었는데, 무엇보다도 ‘메시지’가 언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언어의 물질적 덩어리라는 완전히 역전된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 메시지라는 요소에 집중할 때 ‘시적 기능’이 활성화된다고 말하였다3). 언어의 물질적 덩어리가 그 자체로서 의미 덩어리로 화하는 사태, 그것이 시라는 것을 적시했던 것이다. 바로 “운문의 힘은 언어가 ‘말하는’ 바와 그것이 ‘존재하는’ 바 사이의 불확정적인 조화로부터 기인한다4)”고 한 발레리Paul Valéry의 언명이 마침내 그 논리적 구조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황순원의 두 번째 시집, 『골동품5)』에서 야콥슨의 이론적 진술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시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골동품』의 시적 성취에 대해서 이미 글을 쓴 적이 있으니6) 그에 대한 분석은 여기에서는 삼가고자 한다. 다만 이 시집은 1930년대 한반도 문인들의 미에 대한 자각이 실천적 역량을 동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뚜렷한 보기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지나치기로 한다. 이 시집이 그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러니까 1930년대 행동과 관조의 분화라는 사태의 문학적 성격은 ‘한국어’의 미적 존재론의 개시, 혹은 한국문학에 있어서의 미의 자율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격의 구체적인 양태는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모두(冒頭)에서 말했다. 우리는 이 양태들을 좀 더 음미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음미를 통해서만, 그 이후 한국시의 전반적인 주조로 자리잡은 듯이 보이는 서정주·박목월 류의 서정시 혹은 그것으로부터의 형식적 계승과 내용적 분기를 보여주는 소위 민중시(정확하게는 민중적 서정시) 외의 여러 다른 종류의 시들이 가능할 수 있었고 또 발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한국시의 진화적 역선으로 작용한 것은 바로 그런 소수자의 시들이라는 것을. 김수영이 그 모범적 실증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그 진화적 역선은 김소월·한용운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근대시의 역사적 소명이 주파해나간 발견과 갱신의 곡절에 해당한다. 자기 발견과 자기 갱신, 세계 변혁과 세계 발견, 그리고 그 자기와 세계, 발견과 변혁의 역동적 상관작용이라는 그 역사적 소명 말이다7). (『현대시』 2016년 8월호)


1) 존재 층위와 의식 층위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아주 간명한 해설은 박이문, 『시와 과학』(일조각, 1975)이다.

2) 이태준, 『문장강화』 (임형택 해제), 창비, 2005, 351-52쪽.

3) 이에 대해서는 로만 야콥슨, 『문학 속의 언어학』, 신문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9 중 특히 「언어학과 시학」을 참조하라.

4) Paul Valéry, Œuvres II - éditions établi et annoté par Jean Hytier (coll.: Pléiade), Paris: Gallimard, 1957, p.637. 제라르 쥬네트에 의하면 말라르메로부터 발원하는 이 비슷한 이론적 언급들은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é의 일치라는 현대 구조주의적 개념, 더 나아가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는 자동사이다”라는 언명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내력을 꼼꼼히 검토하고 있는 글이, 그의 「시적 언어, 언어의 시학Langage poétique, Poétique du langage」(in Gérard Genette, Figures II, Paris: Seuil, 1969)이다.

5) 황순원, 『골동품』, 한성도서주식회사, 1936.

6) 「1930년대 황순원 시의 선진성」, 『제12회 황순원문학제 세미나』, 제 12(권)/호, 양평 소나기 마을 황순원 문학제, 2015.09.11, pp.5~15,

7)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초·중등 교과서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언급된 소위 한국적 서정시와 민중적 서정시들이다. 그러니 순진한 문학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새로운 신천지에 개안한 충격으로, 그 동안 공들여 베껴 썼던 한국시 공책을 태워 없애버릴 수밖에 없는 것은 불가피한 입사제의다. 그런데 교과서가 왜 그런가? 그것은 한국 교육의 현재적 본성을 그대로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