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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한국적 서정시의 다른 가능성

비평쟁이 괴리 2016. 8. 7. 15:16

「오감도 제1호」에서 보았듯이, 관조와 행동의 분리는 ‘한국적 서정시’에서만 진행된 게 아니다. 그것은 1930년대의 전반적인 흐름이었고,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유보하기로 하자. 우선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행동과 관조가 분리되었다는 것이 관조의 시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의 경우처럼 그 둘의 분리와 공존을 뚜렷이 자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령 김광균이 처음 쓴 시로 알려져 있는 「오후의 구도」의 마지막 시구를 읽어 보자.


바람이 올 적마다

어두운 커-튼을 새어 오는 보이얀 햇빛에 가슴이 메어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나리면


하이-헌 追憶의 벽 우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 소리뿐1)


에서 “어두운 커튼”은 “보이얀 햇빛”과 “여윈 두 손” 사이를 단절시키며, 그 단절로부터 일어나는 화자의 가슴이 “메”는 상황을 여실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그 단절보다 더 주목할 것은 이 상황 속에서 모든 현상들이 이중의 양태를 띤다는 것이다. ‘사이’에 놓이는 매개자가 “어두운 커튼”과 “창”으로 지시되어 단절과 연결이 중첩되고, 화자에게 다가 오는 것이 “별빛”과 “파도 소리”로 나뉘며, 다시 그 둘은 ‘빛’과 ‘소리’로 변별되는가 하면, 다가 온 것의 장소는 ‘추억’과 ‘가슴’으로 나뉘면서 한자 표기와 한글 표기로 대립된다. 이쯤 되면 ‘이중의 양태’라기보다 차라리 ‘두 개의 사물’, ‘두 개의 존재’가 한 상황으로부터 동시에 튀어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변별되면서 서로 삼투하면 모호해지니, 그것의 가장 뚜렷한 표상은 “어두운 커튼을 새어 오는 보이얀 햇빛”의 ‘보이얀’이 지시하는 모습으로, 이 모호성은 너무나 선명하여 모호한 만큼 거꾸로 두 양태의 대립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눈을 감으면”이라는 대목에서 눈을 감아 본 독자라면 그 선명함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시구는 김소월의


저 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유화」)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초혼」)


에서 표출된 행동의 불가능성과 김영랑의 순수한 기다림의 미학,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선명한 모호성 속에서 관조와 행동의 분리가 지각되면 될수록 행동에 대한 열망이 “처량”하게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저 처량함은 격렬하지 않지만, 그만큼 지속적이다.

그러니까 ‘한국적 서정시’가 등장하던 무렵, 즉 1930년대에 한국문학 전반에서 관조와 행동의 분리에 대한 지각, 혹은 자각이라는 사건이 피어났던 것이다. ‘한국적 서정시’는 그 사건의 특별한 효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 효과의 양상은 행동과 관조의 분리를 순수 관조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효과’에 불과했으나 전쟁과 분단 이후, 가장 지배적인 미학적 태도로 남한 사회에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서정주라는 탁발한 시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원인이겠으나, 심층적으로는 정치·사회적 정황의 영향이 아주 압도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하나의 ‘효과’였다는 것은 김영랑의 시가 당대에는 하나의 시적 가능성, 좀 더 좁혀 말해 ‘한국적 서정시’의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국적 서정시’는 통상적으로 정의되는 ‘서정시’와 구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기로 하자. 근대적인 의미에서 ‘서정시’는 근대 이후 모든 시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 ‘현실과의 불화’와 ‘절대적 자아’라는 두 개의 인수를 통해 만들어지는 언어문화이며, 이 두 인수 모두가 모더니티 이후 생겨난 감정 혹은 태도이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언어문화는 짧을 수밖에 없는데(따라서 대부분의 서정시가 짧은 길이를 가지는 것인데), 그것은 ‘현실과의 불화’라는 인수가 현실 내부에서의 장구한 개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을 재구성하는 상징체계로서의 언어 자체의 긴 전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상론할 문제는 아니지만, 때때로 긴 시들이 출현하여 항용 ‘서사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언어체들이 서정시의 기본 형식을 빌어서 다른 언어문화를 향해 나아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장르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자기 변혁의 자연스런 충동과 실행의 양태들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장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한다.

따라서 ‘서정시’와 모더니즘, 민중시를 구별하는 것은 정확한 인식 태도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구별의 기준이 세워질 수가 없다. 우리가 통상 ‘서정시’라고 부르는 것은 서정시의 아주 특별한 양태이자, 서정시 일반의 기준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을 ‘한국적 서정시’라고 불러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한국적 서정시’는 넓게 말해, 서정시의 ‘현실과의 불화’라는 인수를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인수로 치환한 태도로부터 태어난 짧은 형식의 언어문화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자연’이 현실에 대한 대립자로서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지배적인 양상으로 정착한 ‘한국적 서정시’는 ‘자연과의 교감’을 ‘자연과의 동화’로 다시 치환하였는데, 이 치환을 통해서 서정시의 일반적 정의로부터의 결정적인 이탈이 일어났다. 즉 자연과의 동화가 진행됨으로서 ‘절대적 자아’라는 서정시의 다른 인수가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영랑의 시대에 ‘한국적 서정시’는 다르게 갈 수도 있었다.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파’의 일원이었던 현구(玄鳩) 김현구(金炫耈)(1904-1950)의 시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늘에 쇠북소리 맑고 향기롭게 굴리어 가듯

비둘기 하얀 털이 도글도글 미끌리는 저녁햇빛

마음이 비최일 듯 환한 꽃잎이 언덕에 고이 지고

누리는 지금 빛나는 서름에 젖어 있다.


“누리의 아름다운 모든 것 그 빛난 목숨 짧아야

서러워하는 사람 마음 속에 길이 산다고“

때가 나직한 소리로 노래 부르고 지나가며

눈물같이 예쁘게 달린 꽃을 따 가 버린다2).



그의 시 「낙화송(落花頌)」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기본 정황을 공유한다. ‘꽃이 짐’과 그로 인한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시적 전개는 아주 다르다. 무엇보다도 김영랑의 기다림의 미학, 즉 ‘세계에 대한 태도’로서의 관조의 확립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에는 설움이 날 것 그대로 살아 있다. 첫 연의 생생한 묘사는 말 그대로 “빛나고” 있다. “찰란한 슬픔의 봄”이 오히려 여기에 이미 당도해 있는 듯하다.

즉 김현구는 꽃이 진 설움을 기다림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다스리지 않는다. 현실과의 불화가 무언가로 대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양상이 있다. 김영랑의 기다림의 미학을 실행하는 것은 ‘나’이다. “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 잠길테요”와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의 ‘나’가 그이다. 그러니까 ‘한국적 서정시’는 ‘나’의 발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체의 이미지로서의 ‘자아’의 발견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나’의 망실이라는 아이러니를 초래했다 하더라도 자아의 발견은 필수 요건이었다. 반면 김현구의 시는 이 점에서 김영랑보다 뒤쳐져 있다. 여기에는 ‘나’ 대신에 “누리”와 “때”가 있다. 시의 화자는 현실과는 다른 별도의 시공간이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지만, 그 시공간을 구상하고 기획하며 주도하고 실현해나갈 ‘나’가 있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이 작품에 한해서 하는 얘기다. 그의 시에 ‘나’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나’는 우선


나의 애달픈 한숨이여! (「풀 우에 누워서」)


에서 표명된 ‘한숨 쉬는 나’에서 출발하여


내 노래는

드을에 핀 ᄯᅡᆼᄶᅵᆯ내의 눈물갓치

그러케 애틋하고

[……]

이마를 흘너가는 바람결갓치

간 길도 모르게 사라져바리는

그러케 흔적업는 노래를

나는 부르고 십다.(「나의 노래는」)


‘한숨’을 ‘노래’로 진화시킨 ‘노래하는 나’로 발전한다. 그러니까 그는 서정적 자아로서의 시인임을 자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서정적 자아가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기획하고 도전하는 ‘나’의 문을 열고 나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즉 서정적 화자가 서정적 인물로 확산되었는지가 확실치 않다. 여러 비평가가 함께 인용한 바 있는


그리움에 애달른 나의 넋은 흰새가 되여

포르르 포르르 근심의 거리를 고이 떠나

늘봄의 물결사이에 기쁨을 노래하느니(「내 마음 사는 곳」)


에서 ‘흰 새’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자기 실현’의 의지를 표출하고 실행하는 것인가, 아닌가? 대신 앞서 인용된 시구에서 보이듯, 노래하는 나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한 흔적을 상당수 노출한다(시구의 문면은 “흔적없는 노래”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나의 흔적이 지워진 노래’라는 뜻으로 읽는 게 타당할 것 같다. ) 실로 그의 뛰어난 시들에서는 ‘나’의 흔적이 실제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나의 일차적 독후감이다. 그것이 숨은 것인지, 지워진 것인이지는 좀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김선태 시인의 발굴과 적극적 소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김현구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수일한 명편들을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마저 그 이름이 지워져 있었3)”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거기에는 개인적인 성향도 작용하고 있지만 아마도 한국의 정치사회적 정황과 연결된 문화적 분위기가 다른 선택을 더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이른바 ‘한국적 서정시’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졌더라면 한국 시의 역사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현대시』, 2016년 7월)


1) 오영식·유성호 (엮음), 『김광균 문학전집』, 소명출판, 2014, p.16.

2) 김선태 엮음, 『김현구 시전집』, 태학사, 2005, p.24.

3) 김선태, 「김현구 시 연구를 위한 초석」, 『김현구 시 전집』, 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