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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의 『환한 숨』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조해진의 『환한 숨』

비평쟁이 괴리 2021. 5. 31. 19:14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독회의 5월 선정작에 대한 심사평의 원본이다. 원본이라 함은 종이 신문에서 지면의 제약으로 줄여야만 했던 얘기들을 원문 그대로 싣고 있다는 뜻이다. 요약문은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질문 하나! ‘멧새가 운다라고 말하는 것과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박두진, 묘지송)이라고 묘사하는 것, 둘 중에 어떤 게 더 느낌이 강렬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2. 청록파 시인의 시구가 주는 전율은, 마치 우는 새를 눈앞에서 본 듯, 언어로서 그 형상과 움직임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언어의 생생함에 맛을 들이면 독자는 형상이 사실을 배반해도 묘사에 취한다. 이육사의 청포도, 오규원의 물푸레 나무 한 잎 같[] 여자”(한 잎의 여자)같은 표현은 대표적이다.

이런 느낌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을 우리는 통상 작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작가 중에도 묘사의 섬세함이 유다른 분들이 또한 있다. 당장 머리 속에는, 황순원, 김승옥, 조세희, 한수산, 오정희, 김지원, 김채원, 윤후명, 강석경, 이인성, 윤대녕 등 한국어로 비단 직물을 짜는 데 탁발한 솜씨를 보여준 작가들이 떠오른다. 조해진이 써 온 일련의 작품들은 그가 바로 이 언어세공사의 계보에 속한다는 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한 대목을 반추해보기로 하자.

 

인적없는 버스 정류장에 눈은 펑펑 내리고 거기 벤치에 한 사람이 잠든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정거장 옆 미루나무 위로 환한 달이 둥그렇게 뜨고 있다.

 

저 환한 달이 다른 세상을 향해 크게 열린 통로라는 것을 독자는 금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버스가 오지 않는 대신 달이 그를 이끌어주었다. 누군가는 가슴도 저릴 것이다. 벤치에서 죽은 사람이 좋은 곳으로 가리라는 믿음에 뭉클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섬세한 감수성은 읽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최근 누가 남의 살(쇠고기 스테이크)을 먹고 고맙다고 썼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남의 살을 글자로 보기만 해도 살맛 나게끔 해주는 것이, 바로 뛰어난 작가들의 묘사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작가의 솜씨는 대상들 하나하나가 가진 고유한 상태를 살필 수 있는 감식안을 또한 가리킨다. 가령 생각해보자. 진맥이 신의 경지에 오른 의사가 있어서, 코로나 예방 접종을 받으러 온 환자들에게 네 종의 백신 중 가장 적절한 것을 처방해 줄 수 있다면, 예약 기피나 노쇼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소설환한 숨은 바로 그런 개개인의 고유한 고통을 살피는 데 집중한다. 작가의 관찰에 의하면 어떤 고통도 일반적인 병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만의 징후, 통증, 냄새, 기억, 예후 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치유도 그것들 모두를 해결해야 하는 만큼 아주 세심한 배려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인 것 심층에 숨어 있는(사회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들의 의미를 캐묻고 그럼으로써 각각의 존재들이 그 특유의 속성들에 의해 존재의 이유가 부여되고 품위가 회복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삶에서 당장은 지난하겠지만, 인류의 미래에 해결되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인간 지성의 발달과 지구상 생명의 진화는 개인의 소중함과 각 생명들의 낱낱의 개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들끓고 있다. 대의민주주의가 사회성을 담당한다면, 직접민주주의는 개별성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구도에서 보면 그 둘이 갈등을 일으키기보다 서로를 북돋는 방식으로 상생하도록 도모하는 것이 오늘날 인류의 가장 큰 과제이다. 조해진의 소설은 그 환한 미래로 가도록 우리 눈을 간지럽히고 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5월 개인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조해진의 환한 숨 주목을 하는 이유는 작가가 고통과 슬픔의 저마다의 개별성이라는 아주 까다롭고도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상 세상의 모순, 그 모순이 야기하는 부당한 관계들, 그 부당함의 작동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거론하면서 우리는 일관된 논리로 설명을 하거나 특정한 해석틀로 그것들을 묶는다. 그래야만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또한 그래야만 힘있는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현실 비판의 목소리들은 그렇게 일반성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니, 1990년대 작은 이야기담론과 함께, 개인들의 개별성에 대한 주장이 분출했을 때조차 그랬다. 거기에서의 개별성은 권리와 향락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통들의 개별성의 문제는 꺼내기가 조심스럽지만(이런 문제제기에는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반론이 빈번히 개입한다.) 그러나 엄연히 살펴야 하는 실존적 사실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아무리 철저히 한다 해도 결코 해소되지 않는 피해자만의 고유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직면하게 한다. 이 고유한 부분에 근거한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 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

 

는 생각으로 타인의 고통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을 정당화하는 태도나,

 

“전체와 영원의 시선으로 본다면 한 사람의 염원이란 퀼트의 한 조각처럼 평균적인 일부이자 보편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는 생각으로 욕망의 비움이라는 처방을 내리는 것은, 기껏해야 일시적 봉합술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작가의 관심은 저마다 상이한 고통들을 어떻게 모두 껴안을 수 있을까, 라는 데에서 벗어나, 저마다 다른 교통들이 어떻게 허심탄회하게, 책 제목을 빌리자면 환하게소통함으로써, 저마다 스스로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를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장의 현실에서는 지난하기만 하여, 거의 불가능한 추구이다.

작가가 비유의 차원으로 건너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즉 비유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상상적으로 강하게 열망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어느 금요일 저녁,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나는 하나의 숨을 생각했다. 그때 지하철은 당산철교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한강 위를 비행하는 갈매기 한 마리가 스스럼없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바다가 아닌 강에 나타난 갈매기는 꿈과 현실 사이의 통로에서 길을 잃은 천사의 은유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갈매기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같은 구절에서 갈매기는 의식불명의 상태에 처한 하나의 꿈을 서로가 나누어야 할 으로 느끼게끔 하는 감각적인 매개물이다. 이러한 비유적 처리는 불가능한 꿈을 계속 끌고 나가게 하는, 그리하여,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어느 미래에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시키고 확대하는 장치이다.

이 문제를 곰곰이 살피는 독자라면, 비유가 단지 장식적인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말한 맞춤한 비유의 힘을 우리는, 역사 속의 예언자들과 메시아가 비유의 달인이었다는 사례들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의 소설 마당에서 일제강점기 하의 이상(李箱)으로부터 시작해, 1960년대의 김승옥, 1970년대의 조세희, 오정희, 1980년대의 이인성, 1990년대의 윤대녕 같은 뛰어난 은유객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거니와, 조해진을 그 목록 안에 기꺼이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때때로 현실에 대한 불안이 비유의 충동을 지나치게 압박하여 쇄말적 취향으로 번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