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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글

전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전해라

비평쟁이 괴리 2016. 3. 9. 09:45

 

전해라가 화제다. 가수 이애란이 부른 백세 인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사가 유행의 도화선이 된 듯하다. 내용은 단순하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소망의 형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 1년만 더 살고 싶어요!” 이런 애걸은 통하지 않는 시대다. 노래는 거꾸로 나갔다. 죽지 않는 걸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그래서 저승사자가 오면 죽을 생각이 없다고 염라대왕에게 전해라, 라고 대거리한다. 이 말본새가 멋있었나 보다. 들은 사람들은 곧바로 흉내 내서 저마다의 문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면 별의별 전해라들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왁자지껄 흘러가고 있다. “못 간다고 전해라”, “어디어디 주가는 아직 싸다고 전해라”, “자꾸 그러면 한 대 맞는다고 전해라”, “보고 싶다 전해라”, “전해라는 전해질과 다른 사람이라고 전해라…… 이 무차별적인 감염현상을 두고 미디어는 중독성이 강하다는 규정을 내렸다.

그리고 앞 다투어 이 유행의 원인과 효과에 대해 분석의 혀를 날름대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대답은 이 전해라가 오늘날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의 설움과 항변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닥치는 것이다. 거기에 저항할 길은 없다. 거기에서 필연성은 제하고 강제성만 뽑아내면 죽음은 의 부당한 강압을 은유할 수 있다. 은유하면서 갑질의 강제성의 정도를 극단적으로 과장하는 효과도 얻는다.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제가 이렇게 악랄하다니! 갑질은 악이 되고 갑은 사탄이 된다. 그래서 저항의 정당성이 확보될 뿐만 아니라 무적의 상대방을 간단히 무시하는 태도로 오연한 의기도 보여줄 수 있다. 타당하고 온당하고 지당한 것이라!

아마 여기에 몇 마디 더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된 게 사실로 ‘100까지 산다는 건 거의 당연한 것이 되었으니, 그것이 말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게다가 이 노래가 아리랑가락을 은밀히 차용하고 있어서 따라 하기 쉽다. 그리고 이른바 꺾기라고 하는 한국음악 특유의 기교가 을의 항거라는 역전(逆轉)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여기엔 과학과 미학이 있는 것이다. 이 가락은 신명을 타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학이 생활의 활력으로 활용되는 희귀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왜 희귀하냐고? 대개의 미학은 일상에 반하는 자리에서 돌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리씨는 무언가가 불편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활도 누리고 아름다움도 누리는 건 만족이 지나친 게 아닌가? 라는 의심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건 선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타기할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저 이상적 만족의 향유자가 취하는 태도가 걸렸다. “전해라”? 이 명령법은 말하는 자가 스스로 이 되고 있다는 걸 가리키는 표지 아닌가? 을의 항거가 평등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불평등의 전도(轉倒)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경계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러나 이런 태도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의지가 분출할 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과잉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비 콕스(H. Cox)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중세의 바보제에서는 가장 천한 신분의 사람이 왕관을 쓰는 것으로 기성 질서를 풍자하곤 했었다.

그렇다면 무엇? 문득 앞머리를 때리며 도망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이 얘기는 논리상 전령을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노래 안에서야 산 자가 저승사자에게 하는 말이겠지만 노래 바깥에서는 모두가 을의 상황을 앓고 있는 살아 있는 군중인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전해라라고 외치면 그 말을 누가 전하나? 이 튕기는 말은 결국 독백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긴 바보제는 민중의식을 고양하는 의식이었나? 중세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나? (창조문예2016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