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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자기를 알고자 하는 마음의 행려는 굽이가 많더라

비평쟁이 괴리 2015. 9. 5. 18:20

 

자기를 알고자 하는 마음의 행려는 굽이가 많더라

- 이상의 거울을 중심으로

 

지난 호에, 자아의 인식은 타자의 인식과 동시적이며, 자아와 타자 사이에는 자유의 충돌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일방적으로 전유되지도 않으며 타자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할 수도 없다. 타자의 근본적 특성은 낯설음이다. 이 낯설음을 잊을 때 이상한 착각과 환상에 빠지게 된다. 서정시를 세계의 자아화로 규정해 온 거의 반세기 동안의 관행도 그 착각과 환상에 해당한다. 이 문제를 차근차근히 살펴보자(지난 호에는 원문 그대로 인용했다가 조판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번부터는 현대표준어로 변형한 형태로 읽어 보겠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려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거울이다. 이 시가 중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 시는 언뜻 보아서는 시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적 특징으로 드는 건, 압축, 비유, 그리고 리듬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언뜻 보아 압축도 비유도 찾아낼 수 없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줄글이 리듬을 일으킬 것 같지도 않다. 그 대신 이 시는 한편의 글로서는 매우 매력적인 글이다. 왜냐하면 자기와 관련된 어떤 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 시를 두고 분열된 자아를 말하고 있다는 교과서의 설명은 문학이론서에 나오는 개념을 가져다가 억지로 적용한 감이 없지 않다. 차라리 이남호처럼 “[이 작품이]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체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착목하는 게 온당하다. 이남호는 이어서 이 시가 재미있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한 걸 화자가 말하는 데서 시적 재미”[1]가 생긴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도 시를 읽는 출발을 여는 화두로서 맞춤하다.

화자의 발견은 네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첫째, ‘거울 속 세상과 거울 속 나의 발견.’ 둘째, 실제의 와 거울 속 의 같고 다름. 셋째 거울 속 나의 독자적 삶, 넷째, ‘만남의 의미.

첫 번째 발견은 첫 세 연에 걸쳐져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거울 속에도 세상이 있는데 소리가 없다.

거울 속에도 가 있는데, ‘와 같고 다르다.

나와 같은 점은 귀가 두 개라는 것이다.(더 나아가 신체발부가 온전히 있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점은 왼손잡이라는 것이다

 

첫 연에 거울 속 세상이 먼저 나왔는데 실은 거울 속 나의 인지가 먼저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 속의 다른 물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화자 의 눈길은 우선 거울 속의 나에게로 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를 거울 밖의 만질 수없다는 사실 때문에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다고 판단했고, 이어서 그가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것은 그가 내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섬세한 독자는 알아차렸겠지만 이 장면은 의미층위가 인위적으로 교묘하게 분할되어 있다. 시의 문면만으로 읽으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까닭은 왼손잡이이기 때문이다. 오른손잡이가 내민 손에 호응해 왼손잡이가 손을 내밀면 손을 못 잡을 게 아니다. 다만 마주잡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악수마주잡음의 뜻임을 정확히 가리킨다. 그런데 마주잡는 손으로서의 악수는 실행이 안 되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화자는 내 악수를 받을 수 없는이라고 쓰지 않고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이라고 씀으로써, 행위의 사안을 지식의 사안으로 치환하였다. 왜 그랬을까? 다음 문장은 얼핏 되풀이 같다.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그럼으로써 모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강조는 왼손잡이라는 사실에도 주어진다. 그렇다는 것은 이 문장이 왼손잡이가 악수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기정사실화되어서 더 이상 악수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모른다잊었다이며, 또한 모른다거울 밖의 나거울 속의 나사이에 만남의 모든 연락체계가 어긋나게 되었다는 것을 함의한다. 어긋나서 거울 속의 나는 거울 밖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수 없다. 거울 밖의 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거울 속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연락체계의 근본적인 어긋남에 있다면 내 말을 못 알아 들을 것이다.

이것은 꽤 질기게 연결된 가상 시나리오다. 진술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뒤로 회귀한다. 그래서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라는 진술까지 와서야,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라는 첫 행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연락체계의 어긋남을 가리키는 진술체계는 아주 정교한 네트웍을 구성하고 있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기로 하자. 지금은 왜 이런 가상 시나리오가 필요했을까, 부터 물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만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참을 수 없는 표면적인 까닭은 마지막 행에 제시되어 있다.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관찰할 수 없어서 퍽 섭섭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근심과 관찰의 불가능성’이 진정한 까닭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여하튼 거울 속에서 가 특별히 중시되었다는 것은 이 시가 기본적으로 의 발견에 관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가 우선 타자로서 인지된다는 것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화자는 보았다고 이남호가 적시했다는 말을 방금 했는데, 바로 그가 본 새로운 사실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타자다라는 인식.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인식. 이 인식이 이 시의 심층에 놓인 문제 상황이다. 낯선 타자로서의 는 어떻게 왔을까? 이 상황은 거울을 보는 원초적인 경험과는 무관한 것이다. 거울 단계에 접한 어린 아이는 우선 거울 속의 타자를 감지하고 얼마 후 그 거울 속 존재가 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이때 비로소 아이는 를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 전에 부분으로만 인지되고 있었다. 엄마 젖꼭지와 연결된 내 입술. 엄마의 성기를 대신해 줄 내 분변을 뽑아내는 내 엉덩이, 기타 등등. 그런데 거울을 통해서 비로소 부모와는 별도로 떨어진 하나의 자족체로서의 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 보는 것은 그냥 타자이지 타자로서의 나가 아니다. 그 타자가 특정한 논리적 시간후에 자아가 되는 것이다. 반면 이 시에서 화자는 이미 거울 속의 존재가 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낯선 타자임에 속상해 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화자 는 여기서 이미 나를 알고 세계를 아는 성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의 나를 처음 발견한 듯이 표를 내고 있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서 이즈음부터 한국인이 를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라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리 나를 모르고 이웃을 모르고 세계를 몰랐겠는가? 그러나 소위 모더니티가 우리를 충격하지 전까지 나 자신으로서 의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천하’, ‘하늘’, ‘임금’, ‘공자님 말씀’, ‘삼강오륜등 바깥의 절대적 지표에 근거해 나를 측정하는 게 체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절대적 지표의 측정값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가아니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모더니티의 충격은 그러한 바깥의 지표와는 무관하게 본래의 나라는 게 있다고 누군가 속삭이기 시작했다는 데에서부터 일어난다. ‘오로지 나일뿐이라니?! “이런 느낌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 직후 나는 심각한 의혹에 사로잡힌다. ‘는 누구지? 왜냐하면 나를 규정할 수 있는 모든 지표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떠나면 나는 나에 대해 완벽히 무지한 상태에 빠지고야 만다. 나를 나는 알 수 없다. 빤히 보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 보이는 데 알 수 없다는 좌절감은 앎의 통로가 열리지 않는 한 계속 변이하며 되풀이된다. 나는 나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나는 나를 만질 수 없다. 혹은 거울 속의 나는 나를 들을 수 없다. 거울 속의 나는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거울 속의 나는 나를 잊었다. 다시 말해 본래의 나는 나를 잊었다. 나는 답답하고 섭섭하다. 그것이 시 거울의 근본 상황이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자신이 낯선 타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에 짜증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음 발견을 향하여 나아간다. ‘가 나도 모를 낯선 이로 나타났을 때 거울 밖의 가 거울 속에서 살고 있는 낯선 자신과 만나려고 노력하는 일은 신세를 한탄하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인 태도다. ‘실제의 나거울 속의 나의 만남의 모색이 3련 제 2행에서 4련까지에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건설적 태도 안에는 그런 태도가 자주 의기양양하게 내세우는 승리와 현시 욕망이 제거되어 있다. 건설 속에 퇴폐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미 보았듯 이 만남의 여부는 소통체계의 어긋남이라는 근본적인 불가능성의 원판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그러나, 모든 지혜는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타자의 인식은 업둥이로부터 사생아로의 변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했었다. 사생아는 그 말을 만든 마르트 로베르가 속깊은 뜻까지 헤아려 명명했기 때문에 험한 지칭을 가졌을 뿐, 실상 겉으로는 아주 얌전한 효자로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효자는 아버지를 수락함으로써 자신의 그것을 거세해 버린다. 그 아픔을 내면화함으로써 이 겉보기 효자는 사생아의 음모를 교묘히 일군다. 거울화자역시 소통체계의 어긋남이라는 장벽 안에 갇힌 채로 난관을 헤집고 나갈 지혜를 일군다. 그러다 보니, 드디어 무언가 보였다.

, 이 만남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만남이라는 목표 자체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만남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깨달음이 핵심이다. 거울이 두 존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만나게 해주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다. 바깥의 거울 때문에”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한다. 그러나 거울 덕분에바깥의 거울 속의 나를 감지했던 것이다. 거울이 아니었다면 를 낯선 타자로서, 즉 탐구해야 할 미지의 대상으로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살았을 것이다. 거울의 기능은 바로 자기의식을 점화했다는 것이다. 자의식이 깃드는 순간 나는 나를 영원히 의심하면서 살게 된다. 다시 말해 나를 항구적으로 알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나는 나를 느끼지만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이해의 불가능성은, 우리가 앞에서 추론했듯이 만짐악수로 표현되고 그 악수가 맞잡음이라는 뜻이라면, 설혹 거울 속의 나가 거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나를 만질 수 있다 하더라도 맞잡지 못할거라는 예감까지 포함한다. 다시 말해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영원히 어긋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의 가능성 역시 영구히 잔존한다. 4연은 그 가능성과 어긋남이라는 모순 상황의 항구성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다. 이 모순 상황은 화자를 괴롭게 하지만 동시에 화자를 절망 속에 빠뜨리지 않고 그의 기대지평horizon of expectations’[2]을 구축한다. 그것이 두 번째 발견의 핵심이다.

그리고 기대지평은 구축되자 곧바로 운동한다. 거울 속의 나를 가 모른다는 생각은 그가 내가 모를 무언가를 꾀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변화한다. 좌절은 희망으로 바뀐다. 두 번째 발견은 세 번째 발견을 낳는다(5연에 묘사된 상황이 세 번째 발견의 장소다.) 기대지평의 구축은 지평 너머 존재의 움직임을 가정케 한다. 그런데 인디아나 존스가 아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잃어버린 성궤가 아니다.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은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나치의 야망과 소비자를 장악하겠다는 스필버그의 야심이 중첩된 모험이다. 거울의 화자의 운동은 그런 정복과 장악의 모험을 할 수가 없다. 구조적으로 그러한데, ‘는 거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거울 속 세계의 자율성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거울 속의 는 제 나름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몫은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다. 내가 품는 기대는 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이 희망은 노골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 내가 그를 모르듯이 그도 나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모종의 기도는 외로된 사업이다. 따라서 이 세 번째 발견은 희망과 동시에 불안을 유발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의 불안이 아주 오래되었음을 안다. 이미 내가 거울 속 를 발견하자마자 그를 만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이미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때의 불안은 거울 속 를 모른다는 불안, 즉 내가 나를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그 불안이 이제는 거울 속 가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 즉 내가 나를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확신과 책임을 가질 수 없다는 불안으로 확대된다. 인식의 불안이 행동에 대한 불안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인식은 상황 앞에서 멈추지만 행동은 상황을 끌고 간다. 상황을 변화시킨다. 이 변화 가능성 앞에서 불안을 이고 사는 건 못할 짓이다. 그건 나의 행동마저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호한 내기가 필요하다. 신의 존재 쪽에 표를 던진 파스칼Pascal의 내기처럼, 거울 속 가 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쪽에 표를 던지는 내기가 절실한 것이다.

이 절실성에 뒷받침되어 마지막 발견의 장면이 떠오른다. 앞에서 만남의 의미라고 가리킨 것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죽 이어져 온 나의 생각의 움직임은 결국 거울 속 와의 온전한 만남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에 뒷받침되어 전개된 것이다. 그러한 의지의 연장선 상에서 거울 속 의 행동에 내기를 거는 것은 그 역시 거울 밖의 를 만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내기의 자장 안에서 나와 거울 속의 나반대요마는 / 또 꽤 닮았던 것이다. 만남의 가능성은 이러한 의지에 뒷받침되어서만 열린다. 만일 어떤 둔감한 독자가 그러나 그 둘의 서로에 대한 무지가 끝이 없고 또한 그래서 각자의 행동이 서로를 훼방하고 훼손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어찌하겠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파스칼을 본받아 이렇게 답해야 하리라. 그쪽으로 패를 던질 수도 있으나 그건 이겨도 지는 것이다. 거울 속 가 거울 밖 와 똑 닮아서 나를 만나려고 의지하고 그쪽으로 행동한다는 쪽으로 패를 던지면, 맞으면 장땡이고 안 맞아도 애초에 못 만나는 상황에서 출발했으니 더 나빠질 게 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아니, 밑져야 본전인 게 아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나와 거울 속 의 어긋남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고. 그래야 가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인식하려는 나의 노력은 실패 속에서만 달구어진다.

그것이 마지막 연의 핵심 전언이다. 마지막 행,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팩섭섭하오는 이 전언의 술부이다. 그것은 거울 속의 나도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할 것이다, 라는 진술을 안감처럼 대고 있다. 동시에 이 문장 속의 근심’, ‘진찰/거울 속의 나의 행동의 전부가 아니라 단지 두 개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한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진찰한다나는 거울 속의 나를 상상한다’ ‘거울 속의 나에게 들릴까 몰라 말을 건넨다’, ‘소리를 지른다’, ‘귀기울여 본다’, ‘망치로 거울을 깨고 들어가려다 멈춘다’ ..... 거울 속의 나가 나를 알아볼 수 있기 위해 가 할 수 있는 무수한 행동들로 연장된다. 이 연의 핵심은 따라서 마지막 행이 아니라 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라는 시구이다.

사르트르Sartre는 타자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타자를 향한 움직임의 일체를 호소appel’[3]라고 이름하였다. 이 호소가 바로 거울이 제시한 만남의 실제적인 주제이다. 만남은 달성과 실패로 규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끝없는 호소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의 결여에 근거해서 타자를 의욕하고, 타자의 결여에 근거해서 나를 의욕하는 것, 원천적 제약에 묶인 상호성에 기대어 항구적인 발견과 변신의 도정을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외로된 사업인 것이다.

거울에서 타자는 바로 자신이다. 그것은 모든 자기 인식은 타자로서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그대로 가리킨다. 타자가 될 때 비로소 자기가 된다. 타자를 인지할 때 비로소 자기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 자기-타자의 변환의 드라마는 무한하고 다채롭다. 근대인으로서의 한국인의 자기 인식은 이상을 통해서 가장 완미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네 가지 발견을 음미한 지금, 시로 돌아가 보자. 두 가지 말거리가 떠오른다. 우선 거울은 시인가? 앞에서 언뜻 보아 이 시에는 압축비유리듬도 없는 듯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시의 속 뜻과 그 전개 과정을 다 읽어 보았다. 이 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분명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의 정황은 근대인의 자기의식의 원초적 장면에 해당한다. 이 원초적 장면이 아주 복잡한 드라마를 안으로 접어 놓고 있는 사정을 우리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원초성에 위치할 때 드라마의 양은 더욱 많다. 시원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만이 모든 이야기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시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으로 기원에 위치함을 든 적이 있다[4]. 이 시가 원초적 장면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시는 시다. 더욱이 그럼으로써 엄청난 압축의 밀도를 갖게 되었다. 비유는 없는가? ‘거울 속의 나자체가 비유다. 그건 이기 때문이다. 리듬은 어떠한가? 여기에 네 개의 발견이 있다고 하였다. 이 네 개의 발견은 각자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관되면서 서로를 견인하고 추동하고 있다. 되풀이와 변형이 있는 모든 곳에 리듬이 있는 것이니, 이 발견의 역동성이야말로 진정 리드미컬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다음, 서정시에 대한 아주 특이한 한국적 규정, 나 자신마저도 때로 별다른 의식 없이 부지중에 되풀이할 정도로 관습화된 의식 중의 하나인 것, 다시 말해 서정시는 세계의 자아화라는 한국적 정의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 안에 어떻게 세계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배 큰 개구리의 자멸적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서정시에서 자아는 세계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다음 호에 그 얘기를 하고자 한다. [『현대시』 2015년 8월]

 

<주>

(1) 이남호,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서울: 현대문학, 2001, pp.20-21

(2) 기대지평이란 용어는 수용미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유명해진 용어이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 문학이론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문학사Literary History as a Challenge to Literary Theory(in Ralph COHEN (Ed), New Directions in Literary History, Baltimore, Maryland: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4) 참조.

(3) Jean-Paul SARTRE, 상황Situations 2, Paris: Gallimard, 1947;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역, 민음사, 1998 참조.

(4) 신생의 사건으로서의 시, 현대시, 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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