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님의 침묵을 다시 읽는다(2) 본문

시의 숲 속으로

님의 침묵을 다시 읽는다(2)

비평쟁이 괴리 2015. 6. 1. 00:25

님의 자기 증명

 

 

님의 침묵에 대해 이어 말한다. 지난 호에서 님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님이 조국이니, ‘부처, ‘연인이니를 두고 선택하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님을 밝혔다. 독자들이 주의깊게 읽어야 할 것은 님을 님이게 하는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 주목을 하자, 님이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요동하는 파동적 존재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한 극단에는 님바람난 기룬 이들, 즉 거짓 님의 모습에 홀려 방황하는 어린 양들이 있다. 다른 극단에 있는 이는 부재하는 님이다. 만해는 방황하는 어린 양을 진정한 님으로 만들려 하고 부재하는 님을 현존시키려 한다. 즉 두 극단 모두에서 님은 변모를 최종적 조건으로 갖는다. 어린 양도, 부재하는 님도 모두 변모해야 진정한 님이 된다. 이 변모가 어떻게 가능한가? 님의 침묵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를 근본적 문제틀로 안고서 출현했다면(, 저 진술은 결코 대답이 아니다), 그 문제의 해결이 어떻게 가능한가.

만해의 해결책은 기룬 이가 변모할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고 기대하고 그것을 언어 속에 보존하는 데 있었다. 그것을 수행하는 시행이 바로 제 2행이다. 시인은 첫 행에서 임의 떠남을 격정적으로 고지하고는 바로 님이 귀환할 통로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이 시행에서 차마에 대한 해석의 논란은 잘 알려져 있다. ‘차마의 원 표기는 참어로 알려져 있다. 전집판(신구문화사, 1973)에는 차마로 되어 있으나, 초판본(匯東書館, 1926) 과 재판본(漢城圖書, 1934)을 참조하여 원본의 확정을 시도한 송욱의 님의 침묵 전편해설(일조각, 1974)에는 참어로 명기되어 있다. 최근으로 올수록 차마라는 표기로 굳어진 듯한데, 그것은 이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차마 나를 떨치고 가지 못할 길[인데도] 나를 떨치고 갔습니다의 생략으로 읽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김현은 이러한 독법에 강한 의문을 표하고는 참고서로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1].

김현의 제안이 수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 문제를 면밀히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두 가지 해석을 모두 포용하는 의 태도를 주목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차마 나를 떨치고 가지 못할 텐데도 나를 떨치고 갔, ‘참고서 떨치고 갔든’, 떠난 님이 스스로 어떤 결단을 감행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이 결단이 왜 중요한가? 바로 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단은 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모종의 이유를 감추고 있다. 이 이유를 통상적으로는 상황으로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아니라 바로 가 이유라면?

물론 우리는 떠난 님의 심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시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는 의 심사를 표출하는 자리이다. 가 님의 심사를 어떻게 의 입장에서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님의 떠남은 의 부족함을 아프게 찌른다. 무슨 말이냐고? 12세기에 유럽 전역에 퍼졌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전설을 떠올려보자. 토마의 트리스탄 소설』[2]을 읽으면, 죽어가는 트리스탄을 구하기 위해 금발의 이졸데가 배를 타고 오지만 트리스탄의 아내 흰 손의 이졸데가 질투에 사로잡혀 이졸데의 승선 표식인 흰 돛이 아니라 검은 돛을 배가 달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 때문에 절망한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세 번 외쳐 부르고 죽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트리스탄의 죽음의 이유는 아내의 거짓말이다. 즉 트리스탄도 금발의 이졸데도 어쩔 수 없는 제 3의 작용에 의해 트리스탄은 절망에 빠져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읽어보자. ‘금발의 이졸데가 탄 배가 마침내 트리스탄이 살고 있던 땅에 도착한다. 이졸데는 상륙하자마자 트리스탄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달려가지만 이미 트리스탄은 시체로 변해 있다. 이졸데는 죽은 트리스탄을 부여잡고 통곡한다. 그녀는 흰 손의 이졸데가 거짓말한 데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녀의 입에서는 내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당신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설혹 내가 당신을 고칠 수 없었다 하더라도 같이 죽을 수는 있었을 텐데라는 회오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녀는 마침내 외친다. “당신은 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요. 그러니 진정 연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겁니다. 나는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겠어요.” 똑같은 방식이란 무엇인가? 그녀는 트리스탄과 나란히 누워 입술과 입술을, 가슴과 가슴을, 몸과 몸을 완전히 밀착하고 숨을 거둔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트리스탄은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던 이졸데를 향한 사랑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졸데는 그에 대한 연정 때문에 죽었다.”

이 마지막 자리에서 트리스탄의 아내였던 흰 손의 이졸데는 없다. 오직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금발의 이졸데가 트리스탄의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돌리고 트리스탄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스스로 뛰어넘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정황은 다르지만 님의 침묵과 구조적으로 맞물리는 데가 있지 않은가? 시의 문면에서 도 독자도 님이 떠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 채로 화자 에게 닥치는 것은 온전히 나의 체험이다. 다음 행들이 바로 그렇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인용문의 첫 행, 즉 시의 제 3행은, 떠나간 님을 비난하는 듯하다. 그것은 옛 맹세를 버린 사람을 떠난 이로 상정할 때 당연히 생기는 감정이다. 그러나 맹세는 원래 둘이 함께 한 약조이다. 맹세가 한숨의 미풍에 날아간사태를 두고 떠난 이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맹세의 날아감 그 자체에 주목한다면? 이어지는 행들은 이 세 번째 행을 바로 그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시의 제 4행의 내용을 분절하면 이렇다.

 

(1) 당신과 나의 날카로운 첫 키스는 나를 완벽히 사로잡았다.

(2) 때문에 나의 운명의 지침이 정반대로 돌아갔다.

(3) 그런데 당신은 사라졌다.

(4) 나는 완벽한 공허에 직면해 있다.

 

나는 이제 신생을 살게 되었는데 그러나 신생의 실타래를 꾸리고 새 삶의 실마리를 쥔 당신이 사라졌으니 이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는 문득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5행은 무기력의 사실 그 자체를 지시한다. 그러나 시구는 그 사실을 넘어서 간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님에게 취해 귀먹고” “눈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운명의 지침이 180도 돌아간 그 순간에 나는 완벽한 수동성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분위기를 만든 것도 가 아니고 입술을 먼저 댄 것도 가 아니다. 당신이 기습적으로 나의 입술을 눌렀고 나는 숨막혀 황홀해 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별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런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체험은 학습이 보상해주지 못한다(그러니까, 이 사건을 두고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고사성어로 정리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의 맛을 망치는 짓이다.) 준비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진. 왜 이 구절에 새롭다는 말이 들어갔을까? “날카로운 첫 키스를 예기치 못했듯이, 슬픔도 예기치 못했다는 뜻이다. 새롭다는 소리로는 신생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뜻으로는 되풀이된 수동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소리로 그 애기를 한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화자는 여기에서 탄식만을 해서는 안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 탄식만 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빠져 있었던 수동성의 함정에 계속 머무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어지는 행,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 사태의 원인에 나의 수동성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떠나 건 당신이지만 당신이 돌아오도록 하는 건 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두 행은 이때 완전히 새롭게 읽힌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시의 제 2행으로부터 촉발된 지금까지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위 두 행에 눈길이 갔다고 치자. 이미 앞에서 말했듯, 이 두 행의 내용은 동양인이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지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한국 독자는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때 독자는 시의 안개 틈새로 문득 익숙한 글자를 본 기분으로 인용구의 첫 행의 뜻을 헤아리며 경서의 숭고한 말씀을 잡스런 현장에 직접 대입할 때의 어색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의 의식의 전개 과정을 거친 독자에겐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형식을 띤 소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이 소망은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슬픔의 힘을” “들어붓는 행동을 지원하는 촉매로 기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행동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그런 한, 저 소망은 달성되어야만 하는데, 그 소망이 경서에 적혀 사람들의 오랜 교훈 중의 하나로 작용한다는 사실로, 그 지속적이고 집단적인 학습의 무게로 의 행동을 가속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용구의 두 번째 행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의 떠남이라는 결단이 나의 내심에 불붙인 의지의 반영이기 때문에 의지의 조바심과 현실의 결여 사이에는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돌게 된다. “제 곡조는 바로 나의 행동으로 달성될 님의 귀환에 대한 환의의 노래일 터인데, ‘는 이제 겨우 그 행동의 출발선상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님은 아직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의 목청은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목청은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의지로 활할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제 곡조를 못이기는 [......] 노래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이다. 님의 침묵은 진정 사랑의 노래다.

이렇게 해서 독자는 시편 님의 침묵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 처음에는 잠언 같았는데 나중에는 생체험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님이 두 극단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면서 변모라는 님의 조건이 떠나간 님으로 하여금 어린 양으로서의 님을 부추기도록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추김이 없었으면 의 변모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부추김이 개입하는 순간 나의 변모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동시에 나의 변모는 궁극적으로 떠나간 님의 복귀에 바쳐진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님의 모습은 님들은 서로를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세목을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님은 비참과 영광 사이를 왕복한다.

(2) 비참의 측면에서 님은 헤매는 자, 미성숙한 자로서 결여의 상태에 있다.

(3) 영광의 측면에서 님은 부재하는 자로서 결여의 상태에 있다.

(4) 님은 변모하는 자이다. 변모는 결여에서 충만으로 가는 길이다.

(5) 비참한 님은 비참에서 영광으로 변모한다.

(6) 영광스런 님은 부재에서 현존으로 변모한다.

(7) 비참한 님의 상승은 영광스런 님이 매개하여 가능해진다.

(8) 영광스런 님의 현존화는 비참한 님의 상승의 결과로 나타난다.

(9) 이 모든 과정에는 상대방으로 인해 발생한 위기를 자신에 대한 격려로서 받아들이는 변환 작업이 개재해 있다.

(10) 따라서 상대방의 암시를 자신이 실제로 만드는 게 들이 하는 일이다.

 

앞에서 님이 누구인가,라고 묻기보다 님은 어찌 사시는가라고 묻는 게 낫다고 말했다. 이제 누가 그걸 물으면 웃지만 말자. 위처럼 대답하자. 10개의 문장을 외우기가 어려우면 이렇게 줄여 대답하자.

 

(1) 님은 달라지는 이로서 산다.

(2) 님은 상대방을 통해 달라진다, 즉 님이 된다.

(3) 님은 다르게 만드는 이로서 산다.

(4) 님은 상대방을 다르게 만든다. 즉 그를 님으로 만든다

(5) 결국 님은 님이 되는/되게 하는 이로서 산다. 즉 님은 상대방의 님 됨을 증명함으로써 자기를 증명한다.

 

님아, 네가 잘 하세요...... 그래도 학생이 계속 님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학생에게, “학생아, 네가 님이다라고 대답하자. 이 말이 정녕 의심스러운 사람은 군말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현대시』, 2015년 5월호)

<주>

[1] 김현, 한용운에 관한 세 편의 글, 문학과 유토피아, 1992, in 김현문학전집 제 4, 문학과지성사, 2005, pp.80~83.

[2] Thomas, Le roman de Tristan, in Tristan et Iseut - Les poèmes français / La saga norroise, Libraire générale française, Le livre de poche, 1989

 

'시의 숲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시가 타자를 발견했을 때  (0) 2015.08.05
쉬는 시간의 잡념  (0) 2015.06.01
'님의 침묵'을 다시 읽는다(1)  (0) 2015.04.25
연재를 시작하며  (0) 2015.04.25
알림  (0) 2015.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