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사이' 현상 본문

구름의 글

'사이' 현상

비평쟁이 괴리 2013. 5. 7. 01:18

이 글은 연세춘추1705(201356)에 발표된 글의 원본이다. 원본과 발표본 사이에는 대략 2:1 정도의 분량의 차이가 있다.

 

얼마 전 사이의 새 음악과 뮤직 비디오가 발표 되었다. 강남스타일에 미쳤던 세계인들은 이제 새로운 자극을 하나 더 얹게 되었다. 젠틀맨의 선물시세를 바짝 올리며 미리 흥분하는 반응들이 곳곳에서 이미 터진 바 있다. 이 열광은 그런데 원인이 알쏭달쏭한 것이다. 앞은 제껴지고 뒤는 꼬인 기묘한 음색의 도입부가 말머리처럼 생겼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게 말춤의 모든 비밀을 설명해주는 못한다.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저 몸으로 감탄사를 발하고 있을 뿐이다. 가수는 알까? 왜 자신이 떴는지? 도널드 덕처럼 은전더미 속에서 헤엄할 제작자인들 알 수 있을까?

사이의 알파벳 표기가 ‘PSY’라고 하니, 그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정신 나간 녀석’ , ‘돌아이쯤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전세계인이 영문도 모른 채 돌아, 돌아, 돌아’, 혹은 좋아, 좋아, 좋아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꼭 이해해야만 하는가?

궁금해 하던 차에 나는 그에 대한 흥미로운 단서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지난 주 미국의 럿거스Rutgers 대학에서 한국문학과 번역이라는 주제로 한국과 미국의 한국학자들이 여럿 모여서 심포지엄을 가졌는데, 에릭 흥Eric Hung이라는 분이 강남스타일이 미국 주류 미디어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주제로 발표를 하였다. 나는 그 안에 소개된 미국 내 반응이 신기했다. 한 중국 문화 전문가가 TV에 나와 이런 음악은 통제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사이의 음악은 상류사회 혹은 기성사회에 대한 풍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이의 음악은 불온한 정신을 용납할 만한 민주적인 토대가 갖추어진 공간에서 현실비판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게 해주기 때문에 강력한 매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한국에 돌아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으니까 마침 들른 시인 정한아가 그건 사이가 자주 표명하는 태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의심스러워요라고 말한다. 과연 가수가 각종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이 반사회적 일탈이라는 것을 밝히는 게 종종 보였다. 이번 노래만 해도 시건방춤이라는 이름을 하고 노골적인 커밍아웃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건방진 모든 게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회 내부의 스텍타클이 되어 사회로부터 이윤을 잔뜩 뽑아내는 탈사회의 가면무는, 시인의 말마따나, 어딘가 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런 풍자적 제스처는 기껏해야 풍자하는 자신의 모습을 즐기는 것이지 풍자 받는 대상을 욕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나는 저 노래와 춤을 풍자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집단 무의식이 사회 내부에 형성이 된 게 아닌가, 라는 쪽으로 머리가 돌아갔다. 요컨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흉보고 발길질하고 싶은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서 그럴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는 참에 미국 대중 코믹스의 맹한 악당처럼 분장한 아시아인이 알 듯 말 듯 하지만 엇비슷한 물건을 내놓으니까 그걸 자신들이 찾던 먹이로 유권해석해서 덥석 물어버린 건 아닌가 말이다. 시인은 단지 달밤을 묘사하는데 독자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저리고, 가수는 단지 바다를 노래했는데 청중은 이별의 아픔에 창자가 끊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과연 2008년 미국의 모기지론 사태와 유럽 국가들의 재정적 위기는 전 세계를 만성적 경기침체 상태 속에 빠뜨리면서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지독한 가뭄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시방 전 세계가 1930년대의 세계 공황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게 유럽 언론들의 공통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터졌는가 하면, 얼마 전 작고한 노시인의 분노하라는 명령은 세계적으로 뜨거운 호응을 일으켰었다.

그런데 저 유권해석에는 분노의 마당을 열어주시오라는 독한 부르짖음만이 있는 건 아닌 듯이 보인다. 아마도 말춤의 묘미는 의미란 아랑곳 않고 폴싹거리는 저 동작의 몰입성에 있는 게 아닐까? 즉 사회의 강력한 풍자인 듯싶다가도 뭔가 문제가 있으면 이건 풍자도 비애도 뭣도 아니고 그냥 춤이다, 라고 능청을 떠는 게 저 말춤의 은밀한 흡인력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문제는 저것이 풍자냐 아니냐가 아니라, 풍자의 자동 순환성, 즉 공격과 아니면 말고를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끊임없이 대상을 바꾸어 나가는 사태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최근 프랑스에서 동성결혼을 허가하는 법이 입안되었을 때 젊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반대 대모를 벌인 희한한 보수적 물결도 그런 대사회적 집단무의식의 자동순환성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사이의 성공 앞에서 덩달이춤을 추기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들어 말머리는 관두고 방울뱀처럼 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어떤 상황에서든 노래로써 해야 할 일과 방법은 무수히 많겠지만 문제는 그 윤리성에 있을 것이다. 인류와 지구공동체의 바람직한 변화에 실질적인 밀알이 될 수 있는가를 측량하는 일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는 것 말이다. 또한 가수는 가수대로 자신의 시건방을 헛발차기로 날리지 않기 위해 시껍하는데까지 몰고 가 봐야 하는 게 아닌가? CNN과 인터뷰할 때 보니 착한 사람 같던데, 뜬금없이 짐 모리슨이, 박현준이 생각나는 건 뭔가가 아쉬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