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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의 『개그맨』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성중의 『개그맨』

비평쟁이 괴리 2011. 10. 3. 12:07

김성중은 첫 창작집 개그맨으로 자신의 문학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우선, 아이디어를 가공하는 능력이 있다. 글로써 온갖 것이 말해진 시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내가 얼마 전 오늘의 한국 소설에 아이디어가 백출하고 있다고 쓴 것은, 그것이 이른바 현실적 구속력(소위 개연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뻗어나가고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이지, 그 아이디어가 실은 다른 문화들 심지어 기존의 소설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라는 점을, 심지어, 그 참조된 텍스트의 아이디어조차도 또 다른 복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개그맨의 텍스트들도 그 복제의 흐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령, 첫 두 소설은 주제 사라마구José de Sousa Saramago나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가 이미 보여준 재앙소설, 그리고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페터 슐레밀의 놀라운 이야기 혹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부터 착상을 빌려온 게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아이디어를 제 식으로 묘하게 변형할 줄을 안다. 재앙으로 인한 몰락의 이야기를 허공으로 떠오르는 이야기로 만들고, 그림자 파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그림자가 마구잡이로 옮겨 붙는 집단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시중에 떠도는 상당수의 소설들이 기왕의 아이디어를 직접 옮기거나 겨우 확장하는 데 그치고 있는 데 비하면, 김성중의 변용은 그가 성실하면서도 동시에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변용은 단순히 독창성에 대한 의욕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에 대한 그 나름의 진지한 판단에 근거해 있다. 오늘 우리의 삶은 한없는 존재 상승의 환각에 휘말린 채로 추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현대인들은 사회 속에 소속되기 위해서 자신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욕망들을 이미 자발적으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사정에 대한 인식이 김성중의 착상에 유효하게 개입되어 있다는 건 그의 현실비판적 안목을 신뢰하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능성을 그의 표현적 언어가 갖는 섬세함과 문맥상의 적절성 그리고 품격이다. 가령, 이런 구절들,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어느 날 가장 높은 곳에 돋은 나뭇잎을 갉아 먹듯 그가 내게 속삭였다. 나는 홍학처럼 붉어졌다.

 

혹은,

 

<버드 케이지>의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1권을 들추지 않는다. 만약 그녀가 이런 관행을 깨고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어항에서 왔어요. 투명하고 편안한 곳이었지만 진짜 물길은 아니었지요.

 

이런 섬세한 감수성에 뒷받침되어 그는 자신의 소설에 복합적인 시선들에 조명된 입체성을 부여하면서, 쉽게 만들 수 없는 드라마의 굴곡을 이루어 나간다. 표제작인 개그맨은 그 중에서도 아주 밀도 높은 작품이다. 그가 호흡을 더 길게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2011.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