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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편견과 사적 폭력 사이에 끼인 개인들의 생존법 -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공공의 편견과 사적 폭력 사이에 끼인 개인들의 생존법 -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

비평쟁이 괴리 2023. 2. 15. 20:50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문학동네, 2022.08)는 여성동성애자들을 주 인물들로 등장시키고 있으나, 제재가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형상으로서보다는 좀 더 범위를 넓혀 비사회인의 범주 안에 인물들을 넣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견은 김멜라의 인물들이 필자가 최근의 한 글(정선형, 이건 애도가 아니라 곡성이구려, 문학과사회2022년 겨울)에서 정의했던 욕구형 인간에 가깝다는 판단에서 기인한다. ‘욕구형 인간욕망형 인간과 대비되는 인간형으로서, 욕망형 인간들이 사회의 일반 구성원에 해당한다면 욕구형 인간은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욕구형 인간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본능에 충실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 경향은

 

희래가 날 싫어하면 어쩌지, 걱정되면서도 왠지 희래가 나의 이런 고백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용기를 냈다. 더 바보가 되는 용기. 희래라면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았다.(p.148)

 

같은 구절에서 보이듯 막연한 충동에 이끌리는 양태로 시작해서, 대체로 집착의 형태로까지 격화되기 일쑤여서, 결국 최초 지점의 막연한 충동은 사회적 생산의 이데올로기 및 그 제도에 거스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욕망형 인간이 사회의 대체적인 인구를 이루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충동을 사회생산적이자 자아출세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니,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간다는 건 부적응과 실패를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성향의 인물들을 적잖이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김멜라의 주인물들도 그런 자발적 실패자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런 부적응으로 인한 좌절을 운명으로 안게 되는 욕구형 인간들이 쉬지 않고 출몰하는 이유는 왜인가? 거기에는 상황적이고도 상황타개적인 두 종류의 까닭이 있는데, 김멜라의 소설은 상황적 요인을 이루는 덩굴의 굽이를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다.

차후에 소설 전반의 구성을 파악한 후에 독자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상황적 요인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그 둘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 읽기의 초입에서 두드러지는 하나는, “중학교 때 겪은 학교폭력과 군대에서 당한 억울한 따돌림, 콤플렉스로 가득한 내 속마음에서 표현된 주변의 동류들에 의해 주인물들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그 끔찍한 정도에서는 차등이 없는, 사적 폭력들이다. 상냥한 책상 짝꿍이 자기 패를 끌고 와 소음(消音)의 장막을 치고 벌이는 집단 린치거나, 아니면 모호한 눈초리로 에워싸는 무관심을 가장한 멸시의 분위기거나, 그것들은 일종의 반사회적 동아리의 조직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사적 폭력 집단의 형성의 원인에는 공적 차원에서 군림하는 율법적 고정관념, 사회적 관습, 제도적 규칙들이 만들어내는 억압이 있다. 가령 고루한 인습주의와 성적제일주의의 학교 분위기가 비밀을 공유하는 동아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비밀 동아리는 공적 세계로부터의 피억압의 심정을 공유하는 자들이 하나로 뭉쳐 만들어낸 나름의 공동체로서, 이는 공적 사회의 행동 양식에 반하는 양태로 그 행동의 구조를 모방한다는, 역설적 양상들을 축적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 행동의 구조가 모방적이라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유무형의 폭력을 통해 약한 자들을 따로 떼어내면서 그들을 상대적 하위 층위로 밀어내는 형식으로 그들의 행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 비밀 동아리에는 규모에서 아주 큰 편차의 스펙트럼이 있으며, 그 편차에 의해서 폭력의 정도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구조적으로 폭력을 잠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이렇게 현대사회는 공적 편견을 만들고 군림하는 지배적 세계와 사적 조직을 만들어 공적 세계를 흉내내면서 반항하는 대응적 세계들이 한없이 꼬리를 물고 돌고 돌면서, 상호추동적으로 폭력의 범위와 강도를 증폭시키는 형상으로 전개되어 나가는데, 김멜라의 주 인물들은 공공의 편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사적 폭력에 의해서도 희생당하는 존재들, 즉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원환에서 튕겨져 나간 버림받은 자’, ‘이탈자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여기가 김멜라의 인물들을 동성애자들로서가 아니라 비사회인으로 이해해야 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실제 작품 속에서 동성애자들은 일률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이중 일부는 크건 작건 사적 조직을 형성하거나 그에 가담하게 되고, 그러지 않은 아주 작은 일부만이 이탈자가 되고, 이 이탈자에는 스트레이트들도 섞여 들어간다. 요컨대 소설 인물 구성의 표면 지도와 이면 지도가 다르다는 말이며, 표면 지도에서 공적 세계에 대한 이탈자들의 군락으로 보이는 게, 이면 지도에서는 공적 세계와 사적 조직 사이의 기묘한 공모의 중앙부와 그들에 의해 참혹한 형벌을 받게 되는 소수의 이탈자들이 흩어져 떠도는 주변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중적 분열을 통해서 작가가(혹은 작가의 무의식이)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렇게 폭력이 원심력을 이루는 지배 세계와 반항 세계의 공모적 구성(비의도적이라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현상하는)의 문제를 인지케 하면서도 더 나아가 나락으로 내몰리는 이탈자들이 여전히 생에 대한 욕구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싱싱한 신생의 몸짓을 작동시킨다는 광경을 전달한다는 데에 있다고 파악된다.

바로 여기에서 김멜라적 인물들은 상황적 요인의 희생자를 넘어 상황타개적 인자로 재형성되는데, 그 진척 수준은 겨우 초입에 있을 뿐이다. 즉 결심과 의지의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이탈자들의 확실한 존재 이유를 작품 바깥에서 끌어올 수 있다. 조금만 눈을 감았다 다시 뜬다”(이건 김수영식 표현이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류세는 언제나 욕망형 인간들이 지배해 왔지만, 역사적 진화가 일어나는 특이점을 창출해내는 일을 한 이들은 욕망형 인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17세기의 위대한 희곡작가 몰리에르Molière는 법관이 되길 바란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을 뿌리치고 연극단을 만들어 지방을 떠돌았으며, 심리학의 창조적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윌리엄 제임스Wlliam James는 의사가 되려고 하버드 의대에 들어갔다가 결국 적응을 하지 못하고 중퇴하고 여행을 떠나 세상 구경을 하고 낯선 이들을 만나는 도락을 즐기다가 심리학에 입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두루 평론가 김현이 “써먹을 수 없다고 규정했던 삶의 형식, 즉 비효용적이라서 비억압적인 일에 뛰어든 사람들이었으니, 훗날 먼 미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역사의 이른바 진보는 이런 탈 진보주의자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김멜라의 소설이 이 상황타개적 인자로서 아직 희미하다는 것은, 사회라는 욕망의 세계를 넘어서는 이가 욕구형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욕구형 인간은 지금까지의 많은 문헌들이 여실히 증언하듯이, 욕망형 인간들의 노예로 전락하기 일쑤였고, 그 본능적 충동에 무언가 플러스 알파가 개입되어서 별도의 다른 인간으로 변모해야만 실질적으로 사회구성적인 기능을 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짐작으로 그 플러스 알파의 범위는 무한하다. 다만 그걸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자가 주밀한 세공을 통해서 그 자신의 신체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교한 몸-무기로 탁마하고 그것을 잘 쓰는 몸기술을 스스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새 삶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라고 우리는 종종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꾸고자 의욕하고 실행하는 존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