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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2020년 8월의 한국문학, 바람 서늘.

비평쟁이 괴리 2020. 9. 3. 02:37

이 글은 20208월 동인문학상 독회에 제출된 의견의 전반적 인상부분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구성에 약간의 변형이 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사적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소통이 없는 건 아니다. 작가들이 소통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진실한 소통을 원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제기하는 것은 어떤 소통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민주화와 정보화가 시작되면서 당시의 작가들, 성평등주의자들, 반차별주의자들이 공적 담론의 큰 이야기에 대항해 작은 이야기를 들고 나왔을 때에도 그 무의식적 의도는 사실상 같았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 의지는 상당히 변성되었다. 한편으로 사적 세계는 자족화되었다. 저만의 세계를 즐기는 것이다. 그런 경향이 지금의 한국 소설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작품 내용의 차원에서 독특한 소재주의로 주목을 끄는 데서부터, 책 제출 형식에서 손글씨 증정 서명을 면지(面紙)에 인쇄해서(혹은 손수 서명을 통해) 내놓는 데 이르기까지, 한국 소설의 자족화 경향은 미만한 증상을 이루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사적 세계가 공적인 힘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2004년 무렵 공적 세계의 기능 불량에 대한 반발로부터 피어났다. 그 반발은 2014년 즈음에 세상을 뒤집을 정도의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또한 사적 감정을 그대로 공적 기준으로 간주하게끔 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내로남불은 그런 현상의 편재성(遍在性)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용어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현실 자체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게 그 감정이다. 내가 때때로 자발적 집단주의라고 부르는 이 경향은 소통의 장치적 필연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말해 민주주의와 어긋난다.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가수였던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이 어떤 인터뷰에서 썼던 용어라고 기억이 나는데, “민주주의가 아니라 큰 덩어리 독점corporate monopoly’”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이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이다. 이런 경향이, 작품 내용으로부터 그 사회적 유통에 이르기까지, 21세기의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엄중한사실이다.

유럽이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면서 내세운 것이, 로마의 공적 세계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사적 세계, 라고 사생활의 역사 Histoire de la vie privée(sous la direction de Philippe Ariès et Georges Duby, 5 tomes, Seuil, 1985; 사생활의 역사, 주명철전수연 외 번역, 새물결, 2002)의 저자들은 말한 바 있다. 그때 중점은 로마식 삶의 원리와 유럽의 원리는 완전히 다르다는 데에 주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 표방된 작은 이야기의 세계는 그만의 고유한 내부구조와 운용원리를 갖추어서 다른 삶의 원리들과 경쟁할 것이었지, 자기 안에 갇혀 스스로를 향락하거나 다른 삶을 대신하면서 우쭐댈 것은 아니었다. 그 점에서 본다면 최근 젊은 작가들의 사적 경향의 심화는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조절적 움직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작품은 현실의 지배 세계로부터 따돌림당한 소수자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그 손절의 사태와 그로 인한 상처를 그대로 반영하는 한편, 동시에 그 소수자들만의 공간이 어떤 세상을 이룰 수 있을까를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드러내는 삶은 언뜻 자폐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강요된 자폐성을 뚫고서 내외의 소통 구조를 모색하는 힘겨운 노력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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