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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한국소설의 문제

비평쟁이 괴리 2011. 9. 10. 07:26

소설은 결국 이야기를 끌고 가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오늘의 한국소설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그것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이래, 이렇게 많은 아이디어가 백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치 짧은 꼬리 혜성들 같은 게 태반이다. 첫 장의 이야기와 문장이 신기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반의 반도 가지 못해 벌써 이야기가 꼬이고 인물들이 뜬금없이 사라지곤 한다. 억지로 아귀를 맞추지만 중간 중간에 벌건 흙이 흉하게 드러난 소출 적은 부실한 농토 꼴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텅 빈 자리를 메꾸려고 본래 이야기와 아무 연관도 없는 잡담용 삽화들을 집어넣기도 한다. 발자크Balzac인간희극이 삽화épisodes들의 총체이고, 차라리 삽화들의 연관관계가 그이의 소설의 특징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미셀 뷔토르Michel Butor였던가? 그러나 그건 삽화들과 본래 이야기 사이에 그리고 삽화들 사이에 긴밀한 유대가 있다는 데에 근거해서 한 말이었다. 시시한 삽화들을 아무렇게나 끼워 넣는 건, 시간이 남았는데 준비해 간 강의 내용이 다 떨어진 연사들이 하는 짓이지, 소설가가 할 일은 아니다.

한국 소설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주제의 빈약함이다. 아이디어가 백출한다고 했지만, 그것들은 어쩌면 쓸 거리가 없는 상태에서 쥐어 짜낸 한 방울의 피 같은 것이 아닐까? 결국은 그에게서 생명을 앗아갈. 아니면 밤의 압구정동에 출몰한 선남선녀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바르고 두른 화장, 옷장식, 구두들 같은 것이거나. 장편소설을 써야 한다는 요구가 거의 지상명령이 되어, 장편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게 벌써 10여년이 되었는데, 상당수의 작품들이 청소년 성장기, 가족 이야기, 친구 이야기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험한 게 없기 때문이고 그 체험에 대해 생각해 본 건 더욱 없기 때문이리라. 결국 이야기를 끌고 가는 능력과 체험의 깊이는 하나로 통한다. (201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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