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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국문학 포럼 참관기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3:12

  스웨덴 한국문학 포럼은 2010611일부터 18일에 걸쳐, 수도 스톡홀름에서 있었다. 번역원의 윤부한 전략기획팀장, 이유미 요원 그리고 소설가 김영하씨는 바로 직전에 핀란드에서 한국문학 낭독행사를 치르고 스웨덴으로 이동하였고, 뒤늦게 합류한 소설가 이문열 선생과 나는 13일 아침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는 핀란드를 경유하고 있었다. 갈아타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이문열 선생과 나는 맥주로 공백을 채우며 한국의 사회와 문학에 대해 걱정스런 대화를 나누었다. 환승대기장소에는 우리와 동승할 승객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두꺼운 문고본 형식의 책을 읽거나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어느 분의 설명에 의하면 길쭉하게 늘어난 밤 또는 낮의 길이로 인한 무료함을 달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부러운 풍속이었다. 유사한 느낌의 시간을 술로 죽이는 종족도 있으니 말이다.

떠나 오기 전의 내 막연한 느낌으로, 핀란드는 땅끝(fin-land)’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을 경유해 다다를 스웨덴은 세상의 경계 너머의 신비한 왕국 같은 예감이 있었다. 과연 공항에 착지한 후, 마중 나온 윤부한, 이유미 두 분의 안내로 나라 안으로 진입하면서 제일 먼저 들은 소식은 평민 사내와 여왕 자리가 예약된 공주 사이의 결혼으로 전국민이 자글대고 있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축제가 벌어지고 기획상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 만화에서나 보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곳이로구나. 처음 만나는 키큰 이국인들은 한결같이 친절하면서도 미소로 말을 대신하는 데 익숙한 듯하였다. 마치 온화한 표정을 하고 신성한 말만을 사용하는 네르발적 산중 마을 사람들 같았는데, 이들에게 뿔달린 투구를 씌우면 곧바로 파도가 몰아치는 대양에 용머리를 한 크나르(Knarr)가 출몰해 폭풍우 속의 무도회를 즉흥극으로 열 것만 같기도 하였다.

시골 여인숙 같은 분위기의 사성(四星)급 호텔에 여장을 푸니 통역자 최선경씨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스웨덴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준비 중인, 수려한 용모의 만학도였다. 최선생과 내 발표문의 축약을 비롯해 앞으로의 일정을 상의한 후 방으로 돌아 와 잠을 청했는데, 몇 번을 도중에 깼는지 몰랐다. 시차 때문이라기보다는 창밖의 뿌연 빛 때문이었다.

이틑날 오전엔 왕궁 주변을 구경하러 갔다가 스웨덴 대사관에서 준비한 6.25참전용사들을 위한 기념 파티에 초대되어서 바비큐로 요기를 채우며 대사관 임직원들, 스웨덴 교민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이제부터 사흘 모두 저녁에 열린 포럼의 형식은 비교적 단순했다. 하나. 약속된 장소에 모인다. . 한국작가와 스웨덴 작가가 서로의 문학을 교환한다. 물론 교환의 방식은 날마다 조금씩 변화하였다. 첫날엔 각 두 사람의 한국작가와 스웨덴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 번역된 상대방의 작품의 일부를 발췌해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면 사회자가 작가의 문학세계, 낭독된 작품의 의미 등에 대해 다양하게 질문하고, 이에 작가들이 대답하였다. 한국 쪽에서는 이문열 선생과 소설가 김영하씨가 고정 멤버로 출전하였고, 스웨덴에서는 영화기획자이자 소설가인 니클라스 로드스트룀(Niklas Rdström)씨와 한국에 장편 덕 시티(민음사)가 번역되어 있는, 매우 도발적인 젊은 작가로 알려진 레나 안데르손(Lena Andersson)씨였다. 사회는 아스트리드 트로찌히(Astrid Trotzig)라는 분이 맡았는데, 한국에서 입양되어 훌륭하게 성장한 촉망받는 소설가였다. 많은 한국 교민들이 포럼을 관람하러 오셨다. 이문열 선생의 인기는 압도적이어서 많은 팬들이 인사를 나누려고 몰려 들었다. 이문열 선생과 나는 신춘문예 동기인데, 30년 사이에 사람의 운명이 이토록 달라져 있었다.

포럼 둘째 날엔 조희용 스웨덴 대사님의 초청으로 관저에 방문하여 오찬을 하였다. 화려하지 않아도 공들인 표시가 뚜렷한 음식들이었다. 식사 후 북구 특유의 가옥 양식을 감상하였다. 이 날의 포럼은 매우 공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조대사님과 잠시 귀국한 라르스 바르괴(Lars Vargö̈) 주한 스웨댄 대사가 차례로 인사말을 한 후, 스웨덴의 출판사 대표 몇 분이 스웨덴의 문학출판에 대해 발표를 하였다. 모두 한국문학작품을 출판했거나 출판을 진행 중인 분들이었다. 앞으로 한국문학출판을 적극적으로 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또 갈수록 열악해지는 출판 환경과 문화 단체 및 기관들의 지원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고참 성우의 목청을 가진 한 문인이 한국의 두 소설가의 스웨덴 번역본을 연기를 곁들여 낭랑하게 읊조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유럽은 아직 리듬이 살아 있는 언어를 쓰고 있다. 한국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리듬을 잃어버렸다. 그것을 언제 다시 되살려낼 건가? 나의 발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 번역의 중요성과 현재의 번역 수준 및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나는 한국문학과 스웨덴문학을 서로 비교하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질 않았다. 첫 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신 늦은 저녁 식사는 교민이 운영하는 한국-스웨덴의 퓨전 요리집의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첫날부터 포럼에 출석했던 스웨덴 대사관의 임진홍 일등서기관 겸 문화홍보관이 그곳까지 따라와 세심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날엔 스웨덴 문인들과 원탁의 회의장에서 난상토론을 벌였다. 토론이라기보다 서로의 문학생활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스웨덴 문인 사회의 독특한 현상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하나는 시인들이 많았다는 것. 산업사회가 발달하면 시가 쇠퇴하는 건 경험적으로 입증된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직 시인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을 알고 보니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시는 이제 거의 읽히지 않는 듯했다. 대신 국가기구 및 문인단체가 이 시인들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시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급 과잉의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인구가 적다 보니 우리보다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내가 문학성을 인정받은 한국의 시집이 때로는 몇 만부의 판매를 기록한다는 애기를 하자, 스웨덴 동무들은 무척 부러운 모양이었다. 작가회의 의장이라는 시인은 자신의 시집이 비교적 독자를 얻었다고 소개하고는 300부가 팔렸다고 토로했다. 옆에 있던 한 시인이 올해 낸 자신의 시집이 100부 팔렸다고 거들었다. 하긴 현대시의 아버지 샤를르 보들레르도 초판 600부를 다 팔지 못했었다. 시인과 가난은 운명적인 짝궁이다. 또 하나의 특기할 현상은, 스웨덴 작가회의는 순수하게 문인의 생활을 지원하는 단체라는 것이다. 한국문학 작가회의의 사무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글씨가 있다.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민족이 없었다. 북구인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인, 멕시칸, 중국인들이 모두 자기 언어로 글을 쓰면서 스웨덴 문인이라는 칭호로 어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문학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두서없이 들려주었다. 북쪽 사람들은 전 시대 한국문학에 대한 정치적 간섭과 오늘의 대중적 간섭에 대해 큰 호기심을 보였다. 귀를 쫑긋거리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그 결말에 대해 안타까이 물었다. 우리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해 주었다.

이러구러 포럼의 일정은 끝났다. 돌아오는 데는 이틀이 걸렸다. 시차 때문이었다. 헬싱키의 환승구역을 지나다가 한국축구가 아르헨티나에게 패배하는 광경을 잠시 지켜보았다. 스웨덴과 우리의 문학시합은 승부가 없어 좋았다. 대신 우리 사이에는 왕래를 자유롭게 할 교량이 아직 없었다. 한국문학과 스웨덴문학은 지금보다 더 친밀하고 심오하게 말과 글과 생각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두 나라 문인 사이에도 판매부수 이상의 대화가 언젠가는 열리리라. (쓴 날: 2010.7.16.; 발표: _list Book from Korea, KLTI, Autumn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