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의 생각하는 로뎅, 아니 로봇 - 임수현의 『퇴역로봇』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여덟 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을 로봇에게서 만나는 건 곤혹스런 느낌을 준다. 잘 알다시피 저 유명한 조각가의 ‘생각인’은 ‘지옥의 문’(단테) 앞에서 고뇌에 빠져 있다. 임수현의 『퇴역로봇』(문학수첩, 2024.06)이 전해주는 우리의 ‘생각봇’, ‘제로원’은 DMZ 안에 버려진 채 끊임없이 생각의 더듬이를 옮기는 일에 빠져 있다. 그는 본래 전투용으로 개발되었으나 전쟁이 기획상품이 되어버린 시대에 할 일을 잃고, 탐사로봇으로 살다가 마침내 퇴역당하고 만다.
우선 이 로봇이 가상적으로 AI의 미래를 그린다는 점을 가외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고도의 계산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은 마침내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의식을 가지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품으면서 ‘오류를 통해서 성장’할 지적 생명으로 진화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이 작품에선 소설을 위한 편의적 장치일 뿐이다. 그에 기대어 작가는 ‘생각하는 로봇’을 등장시켰다.
이 기계가 어쩌다가 생각이라는 이상한 짓을 하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전쟁무기로서의 자신의 존재이유의 실종 앞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는 DMZ에 투입되었으나 실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떠맡은 군인들과 당번병이 건성으로 관리하는 쓸모 없는 기계로 전락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은 채로 그는 자신의 이동 공간을 탐사하는 일에 골몰하고 더 나아가 그런 상황을 만든 세상일에까지 생각을 뻗치게 된다.
만일 독자가 이런 로봇의 곤란한 처지를 통해서 한국의 분단상황과 보이지 않는 세계기구의 전쟁을 포함한 갈등관리에 대한 비판을 읽고자 한다면, 이런 설정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들의 사건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포인트는 다른 데에 있다. 이 소설은 로봇의 기구한 운명을 한 갈래로 잡고, 화자의 ‘민통선 평화·통일 걷기’ 프로젝트와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고 사회적 진로가 좌절된 화자 삼촌의 후일담으로 이루어진 인간 이야기를 다른 갈래로 잡아, 그 둘을 대위법적으로 교대시키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로봇의 대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인간들은 무언가 세계에 대한 기획을 한다. 좋은 삶을 만들기 위한. 그런 기획과 실천에는 신심이 배어 들어 있다.
반면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DMZ공간을 부단히 탐사하는 일뿐이며, 그는 화성의 탐사차들이 폐기될 때까지 근 행성에서 했던 일을 그대로 수행한다. 화성의 탐사차를 상기해보자. 소저너로 시작해, 스피릿, 오퍼튜니티, 큐리오시티가 차례로 이어졌고 지금은 퍼서비어런스가 일하고 있다. 우리의 ‘제로원’은 최초의 탐사차(체류자)에서 최근의 퍼서비어런스(인내)가 품은 의미를 그대로 제 생의 철학이자 일상으로 삼아서 일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로봇에 의한 고유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광범위하고도 촘촘한 리얼리즘, 즉 보이는 사물들 모든 것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이다. 그는 DMZ 내의 풍광, 자연재해, 탈출소동, 밀렵꾼들, 연구원... 등을 일일이 관찰하고 더 나아가 전쟁 무기의 진화, 평화 이데올로기로 꿈틀대는 사람들의 동작 등을 모두 기억 속에 담는다. 로봇 관찰의 특성은 꼼꼼하고 모든 디테일들에 공평하여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양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DMZ를 둘러싼 인간의 행동과 로봇의 행동은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인간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관적 편향과 의미에 대한 환상 속에 숨겨진 허위의식(이데올로기)에 노출된다. 반면 로봇은 의미와 무관하게 완벽히 공평한 관찰을 한다. 로봇이기에 가능한 리얼리즘이다.
누군가 물을 것이다. 본래 리얼리즘이란 게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 소설가들의 사실주의가 바로 그런 객관적 관찰의 진수를 보여준 게 아닌가? 아니다. 인간이 내놓은 리얼리즘은 언제나 주관적 선택의 결과였다. 염상섭의 『삼대』를 생각해보라. 세 부자와 연관된 몇 사람의 인물들이 당대인의 전형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들만이 있었나? 가령 수전노에 가까운 부자 노인, 타락한 기독교인, 우유부단한 손자만이 있었나? 또한 엥겔스F. Engels가 격찬했던 발자크Balzac를 보시라.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승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찬가를 노래했다”는 그의 ‘의도에 반한 리얼리즘’은 그렇게 해석되는 한 귀족/부르주아의 대립이라는 특수한 사회사적 구성의 빵틀에 의해 찍혀 나온 ‘팜플렛’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런 해석적 편견을 버린다 하더라도, 발자크의 사회사에서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연소의 원리를 정확히 규명한 화학자 라브와지에Lavoisier는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발자크와 함께 수학했던 그는 오로지 발자크에게 과학적 영감을 줄 뿐이다. 또한 발자크가 경모했던 앙드레 셰니에André Chénier의 시는 그의 『환멸Illusions perdues』(흔히 『사라진 환상』으로 번역된다)에서 ‘뤼시엥’과 ‘다비드’로 분해되어 버린다. 거기에 객관적인 셰니에가 있는가?
인간 행위의 형식이 그런 것이다. 인간은 먼저 의도하고 계획하고 선택하고 구성하며 결과를 측정하고 다시 의도를 재구성하고 계획과 선택을 다시 짠다. 그러면서 판을 점점 넓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행위의 주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 점을 이해하고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들이 미래의 가정된 객관성에 근거한 다른 주관성들의 참조, 즉 간주관성의 성질을 강화함으로써 좀 더 진진된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반면 임수현에 의해서 창안된 로봇은 아직 그런 계획을 도모할 정도의 지적 생명이 아니다. 현재의 수준에서 로봇은 우선 정보를 무차별하게 모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정보들의 무의미성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게 로봇의 정신상태이다.
하지만 바로 ‘생각하는 로봇’의 고뇌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의미를 흭득한다. ‘이게 뭐지?’라는 의문은 버려진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혹 때문에 그 반사작용으로 생겨난 새로운 의식 현상인데, 그 의문 덕분에 그는 인간들의 이념적 의도 바깥에서 사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물들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단 채로, 사물들 사이의 관련을 탐색하며 그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다. 거기에서 인간들이 평화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둘러보지 못한 새로운 ‘풍경’이 태어난다. 아직은 그 의미를 온전히 획득하지 못하고 단지 곧 소멸된 운명에 대한 비애를 안고 무언가 의미를 이루고자 안간힘을 쓰는 정열들의 관계망, 그런 풍경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풍경paysage’이라는 단어가 처음 발명되던 르네쌍스기(알렝 레이, 『프랑스어 문화사전』)에 실제 그 풍경이 태어나던 광경과 흡사하다. 인류학자 필립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는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뢸란트 사베리Roelandt Savery의 경우를 들어 풍경의 객관적 성질이 이 시기에(좀 더 정확히는 그보다 1세기 전에 발효하여) 인지되었다고 풀이한다. 즉 프라하 궁정의 공식 ‘풍경화가’로서 알프스와 보헤미아의 주목할만한 명소들을 그려 궁정에 보고하는 임무를 띠었는데, 그 자연들을 실제로 묘사하는 과정 속에서, 그 당시 화풍의 이념적 원칙, 즉 궁정 세계의 신성한 의미를 표상하는 ‘내면의 창’과 격절되어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세속적인 바깥의 풍경”을 발견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Philippe Descola ,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Par-delà nature et culture 』, , Paris: Gallimard, 2005, p. 115.)
르네쌍스기 ‘풍경’의 발견이 종교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혁명의 한 코를 이루었다면, 『퇴역로봇』의 ‘제로원’이 탐사한 ‘풍경’은 삶의 인간적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대장정(大長征)의 단초로서 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침묵의 강물처럼 하염없이 구르는 관찰들을 그런 시각 하에서 다시 읽으면 그 밑바닥에 일렁이는 열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득 한 노래가 흥얼거리고 싶어진다.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 온 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노고지리, 「찻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