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추천사 등

1999년 제 1회 '박용래 문학상'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7:58

심사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박용래 문학상이 오직 그만의 것으로 가져야 할 성격에 대해 조율하였다. 박용래 시인은 전통적 서정을 특유의 절제되고 압축된 물질적 이미지로 빚어 반짝이는 언어의 주렴을 드리우는 데 누구도 모방하지 못할 경지를 이룬 분이었다. 또한 박용래 시인은 문단의 잡음에 초연한 채로 오직 자연에 대한 사랑과 시에 대한 열정만을 염결히 품었던 분이었다. 심사자들은 박용래 시인 특유의 시적 성향과 시에 대한 소년같은 열정이 수상작 선정에 핵심적인 기준으로 놓여야 한다는 데 함께 동의하였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 90여권의 시집을 검토한 결과, 풀잎 속 작은 길(나태주), 들꽃 세상(송수권), 산시(이성선),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허만하), 반쪽의 슬픔(홍희표) 다섯 권이 최종 토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나태주, 송수권, 이성선, 홍희표 네 분 시인의 시집들은 저마다 전통적 서정의 독보적인 경지에 다달아 있다고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자연에 대한 다정한 시선과 만물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공유하면서, 나태주 시인은 그것을 생명의 싱싱한 관능적인 움직임으로 동력화시키고 있으며, 송수권 시인은 전래 동화에서와 같은 가장 일상적인 친숙한 풍경으로 펼쳐 보이고, 이성선 시인은 감로주의 빛깔처럼 맑은 깨달음으로 독자를 이끌고 가며, 홍희표 시인은 능청스런 해학의 정서 속에 그것을 녹이고 있었다. 네 분이 모두 독특한 개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중 어느 한 분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반면 허만하 시인의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박용래 시인의 시적 정향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새벽 우물물을 세 번 뒤집어 쓴 듯 세번이나 놀라고 말았다. 우선, 시에 대한 열정이 육체적 노쇠를 완벽히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랐고, 다음, 50년대에 등단한 시인의 이번 시집이 겨우 두번째 시집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원로 시인의 시에 대한 순정한 열정과 삶에 대한 깊은 형이상학적 인식이 어떤 젊은 시인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청춘스런 패기에 뒷받침되어 쨍쨍한 울음을 울고 있는 걸 보고 아예 경악하였다. 선자들은 깊이 감동하였고 엄숙히 경의를 표해야 할 의무감이 마음 깊은 바닥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 잠깐의 시간 후에 우리는 당연한 수순으로 그이의 이름과 시집 제목을 박용래 문학상 운영위원회에 넘겼다. 문학의 가장 깊은 유대는 어법보다 정신에 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는 법, 허만하 시인의 시에 대한 순결한 정열은 박용래 시인이 생시에 삶 그 자체로서 보여주었던 열정과 그대로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뭇 다르면서도 깊은 정신의 혈맥으로 통하는 두 시인이 문학상이라는 축제의 형식으로 만나게 된 것은 시인의 행운이기에 앞서 만남을 주선한 선자들의 행복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