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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중독된 이의 고통 - 정해종의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비평쟁이 괴리 2024. 6. 16. 11:24

비극인가 하면 풍자로 읽힌다. 세상 버림의 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의 찬가도 아니다. 정해종의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고려원, 1996)는 그렇게 어정쩡하다. 시로 말할 것 같으면 정리되지 않은 초고들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기묘한 전율이 있다. 그의 우울은 사탕을 씹는 듯이 살똥스럽고, 그의 냉소는 흑염소만큼 쓰다. “LP시대는 물 건너갔다/Liberty, Peace…… 이 케케묵은/먼 훗날 인사동 골목에서나 들어 볼/자유니 평화니 하는 것들, 깨지기 쉬운 것들” 같은 시구는 그런 고통과 독함이 없으면 씌어지기 어려운 시구다.
이 고통과 독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삶의 어느 순간엔 미치도록/죽음의 언저리를 방황하고 싶은 때가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거니와, 희망이 덧없음을 알면서도 희망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시인은 희망의 공범자라서, 이 뜻없는 인생 저 너머를, 다시 말해 죽음의 언저리를 자꾸만 방황하면서, “죽어라고 살만한 시절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 그냥 희망에 중독되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중독되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스런 자기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는 사회사업가처럼 “내가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내 모가지를 잡아/흔든”다고 말하는 것이며, 예쁜 시의 기술자들처럼 그냥 귀뚜라미 소리를 녹취하는 대신에, 원고지 “칸칸마다 숨어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귀뚜라미의 그 추한 육체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알리라. 청음의 뒷무대엔 더러운 몸이 있고, “사랑의 뒤통수는 고통”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니, 알겠다. 그의 시가 어긋지고 풀어지는 까닭은 시에 대한 중독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시의 거울엔 언제나 “피가 배이도록 문질러도 모자랄 [시인의] 찌그러진 얼굴”이 비치는 것을 짐짓 모른 체 할 수 없어서라는 것을. 그래서 그의 시에는 틈새마다 먼지들이 피어올라서, 시인은 소주와 삼겹살에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중독자 시인이 말한다. “내가 마신 술들을 한 순간 토해낸다면 집 앞에 작은 또랑 하나를 이루리라”. 헌데, 이 정직성이야말로 시의 핵심으로 뚫고 들어가는 유일한 문인 것이다. 독한, 격렬한, 또랑만이 깊은 소용돌이의 구멍을 파놓는 법이다.(한국일보 1996.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