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성의 파종꾼이 남기신 바람소리 - 김치수 선생님 회고
나는 1979년 여름에 처음으로 문학과지성사를 방문하였다. 신춘문예에 입선할 걸 계기로 지면을 하나 얻었던 것이다. 원고를 들고 청진동 문학과지성사로 들어서니 김현 선생님이 기품 있어 보이는 아담한 분과 바둑을 두고 계셨고 그 옆에서 농투성이 아저씨 같은 분이 열심히 원고지를 메꾸고 계셨다. 나는 김병익 선생님은 단숨에 알아챘는데 저 촌 양반이 김치수 선생님인 줄은 몰랐다. 막 프랑스에서 돌아와 ‘문학사회학’을 한국에 소개하고 그 시각에서 한국문학을 해석하는 데 여념이 없는 김치수 선생님과의 첫 조우는 그렇게 상상과 외양 사이의 부조화에 대한 야릇한 느낌을 내 가슴에 한 줄 새기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와는 종류가 다른 기분 하나가 또한 내 눈을 따끔거리게 하였는데, 옆에서 친구들이 도락을 즐기고 있고 사람들이 쉼없이 들락거리는 번잡한 장소에서도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광경을 마침내 보았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서재 안에 갇히지 않으면 글을 쓰기가 어려운 불출인데 젊었을 때에는 그 주뼛거리는 태도가 훨씬 극심하였다. 그런 내게 주변의 정황에 아랑곳하지 않는 선생님의 시원한 태도는 감탄과 부러움을 동시에 자아내었다. 하지만 이 태도가 선생님의 평소의 생활 태도로서 일종의 생철학을 이룬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그날 인사드린 이후 대학원에서 마침 서울대에 강의를 나오신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분석비평’에 관한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르네 샤르의 시 한 편에 대한 분석을 보고서로 제출했었다. 그리고 1984년 여름에 군에서 제대를 하고 무크 『우리 세대의 문학』(1982년 창간, 곧 『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개칭)의 편집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한편 문학과지성사의 출판물에 조언을 하는 걸 계기로 문학과지성사와의 인연을,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실존적으로’ 맺으면서 김치수 선생님을 주기적으로 뵙게 되었다.
문학과지성 바깥에서도 선생님과 만날 일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1996-1997년에 불어불문학회장을 하실 때 나는 학술 이사로서 총무 이사인 이수미 교수(이화여대), 재무 이사인 김연권 교수(경기대)와 실무진에 가담하게 되었으니, 아마 그때가 가장 자주 이마를 맞대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른 다섯해 동안이나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술자리에 어울리고 노래방을 가고 함께 등산도 했던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느낌은 그 긴 세월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 화강암처럼 단단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형성과정이 내용에도 그대로 투사된 듯 깊은 믿음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김현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불문학 쪽에 마음을 나눌 분들과 단절된 상태였다. 물론 정명환 선생님과 홍승오 선생님이 계셨지만 워낙 연령상 차이가 지는 데다 불문학의 초석을 다지신 만인의 스승에 달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이 분들과의 대화는 학문과 세상이라는 일반적인 주제를 크게 넘어설 수가 없었다. 속내 이야기를 할 분으로는 김치수 선생님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 격인 분에게 마음속에 눌러둔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떠들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어쩌지 못해 터져 나오는 말들이 있다. 내가 내 정신을 가끔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격발된 말들의 수신자는 고스란히 김치수 선생님뿐이었다.
김치수 선생님이 훌륭한 청취자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이와 친교를 맺은 이들은 대부분 여름날 속곳만 걸치고 원두막에 퍼질러 앉아 시원한 수박을 들이키면서 막담(莫談)을 나누는 듯한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경험을 가졌을 것이다. 제자로서 그런 저층까지 내려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런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만한 데까지는 가보았다 할 수 있다. 그런 친교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선생님 비평의 성격은 내게 아주 소중한 선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주는 이가 주는 줄도 모르면서도 성심성의껏 전수한 것을 손으로 덥석 받아 내용물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을 때조차 내 몸 안에 옮겨 놓기가 어려운 그런 난해한 비결이었다.
내가 선생님의 자발적 선물을 간취했으나 섭취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도 그것이 김치수 선생님의 삶의 철학 그 자체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두에 잠시 암시했지만 그것은 삶의 모든 부문의 격자(格子)에 동일한 매질이 흘러서 환히 트인 상태로 넘나듦이 자유로운 그런 정신적 환경을 선생님이 내내 유지해 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이의 생활감정과 지적 이해가 상통하고 한국의 뽕짝에 대한 감수성이 프랑스 와인에 대한 섬세한 분별로 이어지며, 테니스와 등산에 대한 열정적인 취향이 한국문학의 현장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동일한 열정에 의해 달아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텍스트 상으로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이고 또한 미셀 뷔토르 선생의 시 등에서 표현된 것처럼 희소하게 남아 있는 감정의 표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선생님의 비평 텍스트에서도 이렇게 내외가 없고 모든 다름이 자유롭게 유통하는 정신적 움직임의 실제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그이의 문장이 잠시 길어진다 싶으면 그것은 어김없이 일상대화어법의 형태를 띠고 개진된다는 것은 김치수 비평의 아주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의 특징적인 어법을 보여준다.
“사람의 삶에 있어서 변화라는 것이 극히 미묘한 것이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엄청난 것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공감의 비평을 위하여』 , 문학과지성사, 1991, p.47.)
이 문장을 이렇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삶에 있어서 변화라는 것이 극히 미묘한 것이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안으로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으며 또한 더 나아가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로는 엄청난 규모의 변화일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뒷 문장에 근거해 선생님의 문장을 분석해 보자. “안으로 일어나고 있을” 대신 “없는 것이 아닐”이 쓰였다. 다시 말해 그이의 문장은 앞의 진술과 대립적인 진술을 구성할 때 반대말이 될 용어들을 쓰지 않고 원 말을 부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마치 말의 흐름 자체를 돌이키는 걸 불편해하는 것처럼. 다음 “~수도 있으며 […] 또한 더 나아가”로 풀어 쓰는 게 의미의 파악을 위해선 더 자연스럽겠지만 “아닐 뿐만 아니라”는 말로 두 개의 진술을 하나로 압축한 구문을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규모의 변화일 수도 있음” 대신 “엄청난 것일 수 있음”이 쓰였다. 여기에서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변화’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쓰기의 교범이 가리키듯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변화’라는 분명한 개념 대신 ‘것’이라는 막연한 지시대명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엄청난 변화’일 수도 있는 것을 더 명료하게 느끼게 하지 않고 모호한 상태 속에 두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이는 실제로 변화의 모호성을 가리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흐름의 가닥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의 결과로 이해하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어법에서 ‘그거’, ‘거시기’라는 말을 흔히 쓰는 심리적 이유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어법은 김치수 비평의 자장 안에서 대상(작품이거나 작가거나) 가까이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훼손하지 않고 보듬으려는 무의식적 의지의 끈질긴 작용으로 드러난다. 이 의지의 작용 속에서 생산되는 것은 무한히 확산되는 친숙성이다. 그 친숙성의 미립자들이 뿌려지는 자리엔 모든 경계들이 허물어진다. 실로 이 마법은 선생님이 가 닿으시는 어디에서나 무차별적인 효력을 발휘하였다. 사람 관계에서나 글읽기-쓰기에서나 공적 업무에서나......
아마도 이제 더는 선생님 같은 분을 뵙기가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 나이가 이제 ‘뵙다’가 아니라 ‘되다’라는 동사를 내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지 못한 열등한 제자로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선생님의 부재는 내게 더없는 아쉬움이고 부끄러움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보면 지난 30여 년 동안 내가 무척 많이 변했던 것도 사실이다. 20대에 신경질적이고 오만불손하기만 했던 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타인의 입장을 추론하고 유익한 거짓말도 제법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사는 게 희극이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변화해 온 데에 김치수 선생님의 영향이 없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이의 삶의 태도를 내가 항상 부러워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내가 지난 8월에 1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접고 귀국했을 때 선생님은 중환자실에 계셨다. 나는 문병을 갈 생각을 포기했다. 자칫 선생님과 가족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는 걸 25년 전 김현 선생님이 암투병하실 때에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 뵈어야 한다고 내심의 한 목소리가 나를 윽박질렀지만 나는 그게 기껏해야 나만을 위로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영정을 통해 선생님을 다시 뵈었을 때 나는 그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셨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미처 알아듣지 못한 내 귀 안으로 어떤 소리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을밤의 시끄러운 풀벌레 소리들 사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 소리였던 것 같다. 무척 은은하였다. (2015.08.17; 『이야기들의 감동 - 김치수 추모문집』, 문학과지성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