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의 자유와 위험— 손진은, 『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 놓다』
이제는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인가? 그렇다고 한 시인이 말한다. 『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문학동네, 1996)를 출판한 손진은이 그 시인이다. 하긴 매일 절망을 짓이기는 것으로 시를 채울 수는 없다. “사물들은 가끔 운율들을 내장하는 법”, 역사가 무너졌거나 세상이 온통 지옥이라도, 또는, “구더기들처럼 바글거리는 요리사들”이 “칭칭 우리를 감고 있”다 하더라도, “허우적거리는 고깃덩어리 속”에서도, “따뜻한 상상이 데워지는 화음이/파릇하게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징주의자의 태도는 어쩌면 오늘의 시에 긴요한 처방일 수 있다. 이제는 단호히 반환점을 돌아야 할 때.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이제는 창조의 대공(大空) 속으로 날아오를 때, 반성의 순환로를 돌기보다는 이제는 개입이 필요할 때. 시의 아름다움으로 둑을 쌓아 거짓 아름다움들의 범람을 막아야 할 때. 정말 그때가 온 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는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그때는 시간이 아니라 의지이다. 그때는 시인이 부를 때만 오지, 부르지 않으면 영원히 오지 않으며, 게다가 제대로 불러야만 와준다. 그것을 제대로 부르려면 자유와 긴장의 틈새를 잘 가늠해야 한다. “햇살에 불붙은 몸으로 재잘되는/노래도 알고 보면 자유와 긴장/그 틈새에서 터져나온다”는 금언에 시인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부른다는 것은 정말 가능한가? 바르트가 지적했듯이 미(美)의 비유는 오직 동어반복을 낳을 뿐이다. 양귀비는 서시만큼 아름답고 마릴린 몬로의 몸매는 완벽한 팔등신이다. 다시 말해, 미인은 미인만큼 아름답고 미인은 미인답게 아름답다. 이 동어반복을 벗어나고자 한다고 해서,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지방의 함유량과 색의 분배와 턱의 각도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라치면 미인은 추한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리고 만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려는 시인들은 이 비유의 불가능성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이 없으면, 동어반복과 수다의 늪 속으로 빠져버린다. 수다는 영원히 정의되지 않는 것을 정의하려는 욕망의 조바심이 구겨던지는 파지(破紙)들이다. 파지가 시가 될 수는 없다. 말라르메는 이 수다의 위험과 싸우다 언어의 살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랭보는 신비에 취한 배의 결코 끝나지 못할 표류에 몸을 실었다.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고픈 눈먼 새도 이 위험 앞에 직면해 있다. 그가 어떻게 화이트 홀을 빠져나갈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나는 경계 경보를 울릴 뿐이다. [한국일보, 1996.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