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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적막을 깨는 박쥐의 시학- 전대호, 『가끔 중세를 꿈꾼다』

비평쟁이 괴리 2024. 6. 21. 13:54

아무래도 90년대는 시의 시대가 아니다. 민주화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80년대가 시의 시대였다면 그것은 시가 무엇보다도 삶의 본질에 육박하려는 의욕 속에 꽃피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좁은 가슴 속에는 우주가 충만해 있어서, 그의 한마디는 그대로 삶의 비밀을 꿰뚫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에는 시인의 가슴은 있으나, 우주는 간 곳이 없다. 중심이 사라진 시대, 모든 것들이 “허무의 블랙홀”(진이정)로 빨려들어가버리고, “팽팽히 긴장해도 겨냥할 과녁이 없”(김중식)다고 시인들은 말한다. 시인들의 모든 의욕은 이제 헛심일 뿐이고 “대개의 문자들은/실은 무늬일 뿐이다.”
전대호의 『가끔 중세를 꿈꾼다』(민음사, 1995)는 90년대 시의 적막 중에 태어난 귀중한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그의 특이성은 시대와 더불어 시 그 자체도 시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데서 나온다. 그도 이 시대의 적막과 혼돈을 민감하게 느낀다. “안간힘을 써서 나를 놀래려 하지만/지겨운 공중 열차”처럼 “낯설고 지루한 것 뿐인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적의는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다”는 도저한 부정어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그로부터 더 뻗어나가, 이 거짓의 시대에 “시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가 보기에 전시대의 시적 방법론인 외침과 반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80년대 시의 “공기를 찢는 속도가 쏟아 놓는 소리/불타 오르는 몸뚱이가 내뿜는 빛”은 결국 상업 문화의 더미 속에 합류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고, 모든 반성의 언어는 홀연 대상을 상실하고 반성의 악순환에 빠져들 뿐이다. 그는 이 외침과 반성의 말들을 다시 근본성 속으로 되돌려 놓으려 애쓴다. “땅끝에서” 들려오는 소리, 삶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나올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심이 사라진 시대에 더 이상 땅끝은 보이지 않고 삶의 밑바닥은 아주 컴컴한 어둠일 뿐이다.
전대호의 특이한 방법론은 여기에서 태어난다. 박쥐의 시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그것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결정은 모두 핵을 줌심으로 자라나는데,/그 핵은 대개 불순물이다”는 시구에 제시된 대로 이 더러운 세상을 그 자체로 삶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쥐의 비막이 그러하듯, 우리를 가두고 있는 어둠의 그물을 그 자체로서 날개의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다. 박쥐는 어둠 속의 삶을 “삼켜선 안되고 삼킬 수도 없는/돌뗑이처럼 버”티어 내며, 그의 활공은 “지나치게 직선적이고 살기등등”하게 허공을 날아다니며 이 세상에 대해 “다함께 환멸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게해서 또한, 이 세상을 박차고 나갈, 저 사라진 의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누가 시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그가 우리의 평온한 일상에 “무례하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활개치는 모습이 여전히 눈 앞에 살아 있는 것을( 『한국일보』1996.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