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인간의 상상 형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다
198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Czesław Miłosz)는 「다윈 부인 Mrs. Darwin[1]」이라는 짧은 우화에서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고 남편을 비난하는 다윈 부인에 맞서 “만물에게 공통된 이치”를 밝혀낸 다윈의 공적을 기린다. 다윈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차별 없이 적용되는 변화의 원리가 처음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물에게 공통된 이치는 만물 사이의 끝없는 변화이다. 산다는 것의 핵심에 ‘변화’를 심어 놓음으로써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의 삶에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정신의 기름을 주유(注油)하게 되었다. 변화가 진리라면 존재의 불완전성은 불행이라기보다 차라리 상승을 꿈꾸는 자가 가진 특권이 된다. 완전한 존재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반면, 불완전한 존재는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할 이유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열심히 움직이는 동안 그의 생은 얼마나 긴박하고 가슴 저리겠는가?
그래서 다윈은 “비비원숭이가 철학자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먼지 덩어리에서 아메바를 거쳐 영장류로 커지다가 마침내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 감히 불멸을 꿈꾸기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시각각의 삶은 온통 경이로운 변화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다윈의 자연과학은 문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문학인은 언제나 평범한 일상을 신비로 대하는 천진한 마음을 유지해 왔다. 그것은 그가 세계가 바뀌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은 별천지를 가져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곳의 무의미한 삶을 내일·저곳의 멋진 삶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비가 바로 이것이다.
이 변화의 축 위에서 진화론과 문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만난다. 하나는 ‘적자생존’이라는 명칭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측면이다. 삶의 무대가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이라는 건 살아 보면 누구나 다 깨닫는 일이다. 그런데 다윈의 통찰은 그 치열한 싸움의 장을 단순히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윈 스스로 “악마의 복음gospel of devil[2]”이라고 부른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권선징악의 무대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살아남기 위하여 온힘을 다해 치열하게 싸우는 무대이다. 문학은 이러한 통찰을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왜냐하면 우선은 그게 진실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것도 그만의 절절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선신(善神)에게도 이롭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일수록 주인공과 그의 적을 동등하게 대접하고 그 둘 사이의 치열한 대결을 핍진하게 그린다. 그것이 주인공에게도 편히 자신의 덕성에 안주하지 않고 책임과 능력을 다해 상황과 싸우게 하는 힘이다.
이 생존 경쟁의 무대에 선악 개념이 변질되어 우량의 문제로 전화하면 우생학이 탄생한다. 이 우생학의 우산 아래서,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과 온갖 인종 학살이 자행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우생학의 희생양이 되었다가 가까스로 생환한 프리모 레비 Primo Levi는 가혹한 환경하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일어나는 정신의 변화를 꼼꼼히 추적하여 “수용소의 다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우생학만큼 다윈에 어긋나는 것도 없다. 그것은 변화를 부인하며, 변화를 부인하는 것은 진화론이 아니다.
두 번째로, 진화론을 실제의 인간에게 적용해 실험하는 소설들이 나타났다. 다윈의 진화론을 잘 알고 있었던 19세기의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는 ‘유전’과 ‘환경’과 ‘시대’를 기본 요소로 해서 ‘루공’과 ‘마카르’라는 두 가문 사이의 교섭에 의한 인종의 변이과정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실험은 다소간 인위적이고 또한 다윈의 본의에도 어긋나 있었다. 진화의 기본 요소를 그렇게 제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실험의 시대인 19세기에 다윈은 ‘관찰’의 달인으로서 평가된다. 졸라적 실험의 인위성에 비추어 보면 다윈의 관찰 중시는 그가 세계의 진행에 대해 얼마나 신중하고 겸손하게 접근했는가를 잘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여하튼 졸라의 실험은 실제 현실과 맞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인류의 생존에 대한 무궁무진한 상상을 부추겼다. 『루공-마카르 총서 Les Rougons Macquarts』는 그의 의도와 달리 인간 욕망의 복잡다단하게 얽힌 덩굴의 미로도를 제공하였다. 진화론은 신화로 둔갑하였다. 유전과 환경과 시대의 조립판은 우리의 의사를 초월해 우리를 끊임없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고 가는 불가해한 힘의 용광로가 되었다. 졸라의 소설은, 과학에 대한 믿음과 공포가 양극단의 모순으로 팽팽히 긴장해 있던 시대에 나옴 직한 생각을 그대로 표출한다.
세 번째 측면은 다윈의 현대적 해석과 맞닿아 있다. 20세기 분자 생물학의 발달은 진화의 문제를 ‘적응’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연’과 ‘돌연변이’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진화의 핵심이 변화라면 그 변화는 질적 도약을 가리키는 게 옳다. 그 점에서 진화의 근본 사태는 돌연변이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 Gould가 훗날 말했던 것처럼, “진화의 결과는 그 원인 시점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진화 생물학의 대가들이자 노벨상 수상자들인 자크 모노 Jacques Monod와 프랑수아 자코브 François Jacob, 일리야 프리고진 Ilya Prigogine은 그러한 관점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 Le hasard et la nécessité』에서 생명 탄생과 진화가 우연들의 점진적인 구성체임을 주장하였으며, 프랑수아 자코브는 브리콜라주 bricolage라는 비유를 통해 지구상의 생명체가 목적과 계획을 지닌 지적 설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즉흥적인 수선tinkering과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산물임을 설명하였다.
우연과 돌연변이는 인간의 상상 형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의 서평지 『크리티크 Critique』 2006년 6-7월호(통권 709-710호)의 ‘변종’ 특집을 책임 편집한 티에리 오케 Thierry Hoquet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 “괴물들은 사라졌고 슈퍼맨은 피로하다. 하지만 변종들은 번창한다.” 예전에 변종은 기형으로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반대이다. 세계와 인류가 변화하는 한, “모두가 변종이다.” 게다가 2003년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됨으로써 인간은 말 그대로 분해와 변용의 수술대에 완전하게 노출되었다. 인간의 불변하는 육체적 속성들은 이제 없다. 인간의 몸에 낯선 장치가 부착됨으로써 인간은 점차로 미래의 인간으로 바뀌어 간다. 휴먼은 이미 포스트-휴먼이다.
포스트-휴먼의 등장은 두 가지 방향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하나는 인류의 육체적 변화에 대한 무한한 탐구이다. 프랑케슈타인으로부터 ‘사이버(cyber)’라는 단어를 발명한 윌리엄 깁슨 William Gibson의 『뉴로맨서 Newromancer』를 거쳐 사이보그의 비애를 서정적으로 묘사한 「공각기동대(伊攻殻機動隊伊)」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상상은 질주에 질주를 거듭해 왔다. 또 다른 방향은 첨단 과학의 기술을 통해 인류를 전면적으로 조작하고 관리하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가 ‘생명 관리 공학(biopolitique)’이라고 명명한, 지배 관리 체제에 대한 경고와 그런 체제를 방조한 인류의 태도에 대한 반성 및 해방의 과제를 탐구하는 문학이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The Brave New World 』가 그 모형을 제공했다면, 오늘의 문학은 그 지배 체제 자체가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다다른 상황을 즐겨 그린다. 2009년 장안의 지가를 성큼 끌어올린 주제 사라마구 José Saramogo의 『#눈먼 자들의 도시 Ensaio sobre a Cegueira』도 얼마간은 그런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문학적 상상은 진화론의 발달에 따라 더욱 천변만화(千變萬化)하며, 거꾸로 신다윈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다윈의 착상에 직접적인 영감을 불어넣어 준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인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이었다. 의사이자 동시에 시인이었던 그는 자연의 법칙을 일반 대중이 감각적으로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시작(詩作)을 활용하는 등 과학의 대중화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특히 그는 “세계는 아주 미미한 것으로부터 발생해 고유한 활동에 따라 점차적으로 성장하여 위대해진다”(『주노미아 혹은 유기적 생명의 법칙ZOONOMIA or The Laws of Organic Life』)는 진화론의 근본 원리를 굳게 믿었으며, 이 믿음은 손자의 지적 성장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손자가 정밀한 관찰자였다면, 그에 앞서 할아버지는 착상에 논리와 감각의 콘크리트를 부었다. 할아버지의 상상 세계를 손자는 관찰과 실험으로 입증한 것인데, 할아버지의 상상이 없었다면, 손자의 관찰은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 점에서 보자면, 진화론과 문학은 직계 가족을 이룸으로써 인류의 정신적 진화에 획기적인 도약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으니, 서로 다른 종류들의 만남이 얼마나소중한 것인지 새삼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20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