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히 농담하는 현실 속에 빠진 새 - 이우디의 「농담」
[작품]
농담
이우디*
우는 얼굴이 웃으며 지나간다
입이 막힌 영상을 보다가
봄이 죽은 소식을 읽는다
너머에서는 총알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는 소식이 자막으로 흐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가게가 붐빈다
급발진한 말들이 꽃보다 붉다 개나리가 만발한 들판에서 잠시 죽어도 될까 귀를 세우고 죽은 봄을 기다린다 오지 않는 얼굴을 미리 읽는다
웃으며 지나가는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농담을 끝내고 싶은데 화약 냄새가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얼룩진 군복의 탈주병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나를 겨냥한 말들이 앞발을 세운다 눈을 가린 나는 바람에 올라탄다
나의 무게를 견디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대답이 없다
자연처럼 무안하지 않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베일을 벗은 오늘을 아름답다 해야 할까 외출하지 않는 날이란다 언제부터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었는지 나만 모르는 날이 웃으며 지나가는 걸 본다 혼잣말이 빅스비를 호출한다
"우크라이나를 틀어줘"
"헤네시 파라다이스 불러줘"
이스라엘이 지나간다 냉담한 전쟁이 지나간다
농담이 지나간다
※ 시 전문의 수록에 동의해 준 시인에게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함께 투고된 다른 시들을 보면 이 시인은 말하기 힘든 절박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우승작으로 선정한 「농담」은 그런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감쪽같이 감추고 오늘의 세계를 냉담한 시선으로 부조하고 있다.
그러나 냉담은 화자의 눈길이라기보다는 대상의 표정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지나간다 냉담한 전쟁이 지나간다
와 같은 시구에 그대로 지시되어 있기도 한데, 그것을 ‘냉담’하다고 정의한 데에는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이 끔찍한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무감각을 가리키고자 하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
이 끔찍함을 무감각한 채로 SNS상에 무심코 즐기는 풍조가 일반화될 때 시인에게는 ‘농담’을 남발하는 듯이 여겨진다. 그런 심사를 단적으로 표현한 게 첫 행이다.
우는 얼굴이 웃으며 지나간다
웃으며 지나가는 우는 얼굴은 조커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는 세상을 파탄내고 싶은 욕망이 은밀히 흐른다. 그래서 눈의 안테나는 비극이 자극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골라 좇는다. “총알이 현관문을 열고 나간” 사건, “얼룩진 군복의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광경. 그리고 그런 사건들 앞에서 보는 자는 “입이 막”힌다.
입이 막힌다는 것은 너무 끔찍해서 경악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경악한 표정으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토를 단다. “급발진한 말들이 꽃보다 붉다.” 이 요란한 반응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말하는(자기를 표출하는) 열락 속에 빠지면서 그것을 더욱 뜨겁게 느낄 수 있도록 “귀를 세우고 죽은 봄을 기다린다.” 그 모양은 이 아수라의 현장에서 자신만은 빠져 있으면서 현장을 내려다보는 자의 모습과도 같다. 그 ‘빠짐’의 욕망은 사건의 격렬성을 ‘탈주’로 여기게 한다. 그래서 “얼룩진 군복의 탈주병들”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화자의 외로움은 이 이상하게 들끓는 냉담한 현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거기에는 시인 자신의 옛 경험도 배경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사연은 이 시에서는 감추어져 있다. 그 대신 독자가 주목하는 것은 화자가 외로움을 얼핏 노출하면 곧바로 “나를 겨냥한 말들이 앞발을 세운다”는 것이다. “눈을 가린 나는 바람에 올라탄다”는 화자의 결정을 실감할 수 있다.
그게 화자의 ‘냉담’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바람에 올라타서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다른 시에서 바람에 올라탄 존재는 ‘새’라고 지시되어 있다. 날아가고 싶은 게다. 그러나 어디로? 세상은 화자가 모르는 새에 세상의 형식들을 만들면서 “웃으며 지나”가지만 ‘나’는 갈 데가 없다. 나는 무심코 “빅스비를 호출한다”. “우크라이나를 틀”어달라고 하다가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세계의 냉담한 마음에 스스로 감염되어 버렸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게 마음의 갈팡질팡을 낳은 것일까? 꼬냑에 취하고 싶은 마음이 주어와 동사의 문법적 관계를 부수면서 불쑥 솟는다.
세상의 냉담-농담이 화자의 눈 안에 들어와서 눈동자에 반사되어 화자의 표정으로 나타난다. 끔찍한 세상의 도살적 풍경보다 그것을 은밀히 즐기는 마음이 더 끔찍한 것이며, 그걸 역겨워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 흐름 속에 가담하는 건 더더욱 끔찍한 일이다.
이 끔찍함은 매우 혼란스런 표현들을 통해 어지럽게 방사된다. 이런 상황은 깨끗하게 묘사될 수가 없다. 그래서 주의깊게 읽지 않으면 이 시는 혼잡한 진술이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꼼꼼히 읽으면 이 혼잡이 일정하게 지탱되면서 독자에게 세상의 혼란 전체를 눈여겨보도록 촉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혼잡을 지탱하는 힘은 현실 속에 끼어든 나에 대한 줄기찬 물음이다. 나의 꼴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굳게 견디면서 그 질문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 의지가 시의 하복부에 위치하고 있다.
나의 무게를 견디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대답이 없다
자연처럼 무안하지 않다
(『현대시학』 620호 2024년 7-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