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적 활기 - 지정애의 「깃털을 싣고 달리는 기차」
[작품]
깃털을 싣고 달리는 기차
지정애
기차가 기차로 출발할 때
비의 밧줄에서 풀려난 커다란 동물은
사바나인 듯
휙휙
기차에서 솟아나는 아침으로
비는
아이들의 입과 눈을 커다랗게 만든다
푸르고 눈부시게 섞이는
비의 허리와 아이들의 다리
실로폰이 되고 뛰는 나무가 된다
기차의 엔진은 지평선을 뚫고
밤의 내장에 갇혀 있던 욕망
차창 밖으로 날아간다
한 아름 드라이플라워로
기차가 기차의 좌석이 되는 동안
구름으로 구름의 입모양을 만든다
고양이의 잠처럼 고요하고
낮은 침묵의 의자
공중의 울대에서 우렁찬 노래 흐를 때
금요일의 맥주 거품은 내일의 태양
어제의 입술이 되고
거리를 배회하는 영혼은
해안선에 젖으며 꿈을 더듬는다
기차가 기차의 끝에 이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은
다른 이름을 갖게 된다
한 계절의 혀에서 사라지는
글라디올러스
※ 시 전문의 수록에 동의해 준 시인에게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깃털을 싣고 달리는 기차」는 바로크적 활기가 두드러지는 시이다. 원래 ‘못난 진주’라는 뜻이었던 ‘바로크Baroque’는 일군의 철학자‧미학자들을 거쳐 르네쌍스 고전주의와 동시대에 출현해, 그것과 맞선 특정한 미학적 경향으로 재해석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본래 부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던 바로크는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그 후 전위적 예술적 시도들에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가령 니체가 바로크를 “변증법적 전개가 안되고 표현이 불충분하다는 감정이 마구 쏟아지는 형태의 과잉과 맞물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단장 144) 양식이라고 폄하하고,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가 바로크적 예술가들의 정신 세계를 “좌절된 에로티시즘”으로 규정했다면, 20세기에 들어서 평가는 반전하여 과거에 ‘불충분과 결핍’의 용어로 규정되었던 것들이 자유로운 일탈과 규정되지 않은 세계를 향한 개방성의 표식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바로크에 대한 이런 재평가의 배경에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의식의 점증하는 경향이 깔려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즉 고전주의가 전체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부분들을 합리적 조화에 봉사하는 부속물들로 간주했다면, 바로크는 부분들의 생동성을 통해서 ‘강제된’ 전체를 파괴하고 보다 포괄적인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고자 하는 충동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의 말을 빌면, “고전주의는 본성상 미적 신체에서 자유의 결핍, 불완전성, 충만한 느낌의 깨짐 같은 걸 사유할 수가 없다. 그건 오로지 바로크 알레고리가 미친듯한 화려함 밑에 유례없는 힘을 가지고 현시하는 것이다.”(「알레고리 해석학의 대립항들」)
지나가는 김에 덧붙이자면, 김현의 「바로크 개념의 의미변환에 대하여」(『제강의 꿈 – 제네바 학파 연구』, 김현문학전집 9, 『행복의 시학/제강의 꿈』, 1991)는, ‘바로크’에 관한, 한국어로 된 가장 자세하고 정확한 논문이므로 관심있는 독자는 참고하시길 바란다.
「깃털을 싣고 달리는 기차」는 제목부터가 엉뚱하다. ‘기차’가 ‘깃털’을 싣고 달린다는 건, 코끼리 아내와 개미 남편이 사랑을 나누는 꼴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내용의 동요를 들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엉뚱함을 즐기는 건 인간의 생래적인 본능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애초에 나무 위에서 생존을 연명하던 쓰레기 청소 동물이던 인간이 오늘날 지구를 점령하고 우주까지 넘보는 지적 생명으로 진화해 온 역사에는 인간이 본래 ‘호기심 천국’이라는 사실도 엄연한 동인으로 작용해 왔다. 그게 아니라면 ‘사혈(瀉血)’이 거의 유일한 의료적 치료술이었던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감히 인간의 신체를 해부할 엄두를 냈겠는가?
물론 동요와 시는 다르다. 동요는 엉뚱함을 그 자체로서 즐기는 한편, 시는 그 엉뚱함들을 가지고 모종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한다. 그 점에서 보면 니체가 ‘바로크적 예술가’를 두고 “변증법적 전개가 안된다는 감정(le sentiment d’un défaut de dialectique)”에 조갈이 난 사람이라는 지적이 언뜻 읽기보다 의미심장하다. 변증법이 헤겔 이후 우리에게 알려진 거의 교범화된 통일 기술이라면, 바로크는 ‘변증법’과는 다른 방식의 통일을 기도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로 변증법의 자원을 이루는 ‘정’과 ‘반’의 한계는 그 둘이 언제나 동일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별 대 만남’, ‘복수 대 용서’, ‘자본가 대 노동자’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대 거자필반(去者必反)’과 같은 대립항을 안으로 품은 복합적 대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로크는 동일 범주를 무시한다. ‘이별 대 여행’, ‘기차 대 비’, ‘거품 대 태양’이 서로 겨루게 된다. 게다가 동일 범주를 넘어서면 대립항은 이항(二項)에 그치지 않게 된다. 이질적인 것들이 사방에서 출몰하면서 대립과 화응을 뒤섞은 이른바 자유로운 ‘대대관계(對待關係)’로 움직이게 된다.
이질적인 것들의 자율적 팽창과 자유로운 변용으로 이루어진 바로크적 광경들로 가득 찬 이 시는, 묵중하게 멈춰 있던 기차가 ‘비’의 채찍을 맞고 김을 내뿜으며 달리는 광경에서 시작하여, 그가 주파하며 지나가는 주변의 물상들을 부추겨 그들 스스로 저마다의 양태와 힘으로 약동하게끔 한다. “푸르게 눈부시게 섞이는 / 비의 허리와 아이들의 다리 / 실로폰이 되고 뛰는 나무가 된다” 같은 구절에서 바로 영상을 떠올려 보면 괴이한 혼종성의 약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시행들도 마찬가지니 그 실상은 독자들이 직접 음미하시기 바란다. 다만 한가지 중요한 차원이동이 방금 개시되었다는 건 지적하는 게 좋으리라.
기차가 기차의 좌석이 되는 동안
구름으로 구름의 입모양을 만든다
기차는 달리면서 기차의 좌석이 된다. 말은 달리면서 안장이 된다. 무슨 얘긴가. 무언가가 움직이면 그 안에 내장된 무언가가 또 다른 신생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구름으로 구름의 입모양을 만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름이 스스로를 불어 구름을 증폭시킨다. 여기까지 오면 제목의 비밀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 ‘깃털’은 날개의 가장 작은 원소이고 씨앗이자, 기미이다. 기차는 달리면서 깃털을 키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기차는 날개를 달려고 한다. 그래서 이미 앞에서 “기차에서 아침”이 “솟아난다”고 운을 띄웠던 것이다.
‘기차는 달리면서 기차의 신생이 된다’는 것. 그것이 이 시의 의지가 노리는 새로움이고, 제목을 엉뚱함으로부터 모험으로 바꾸는 계기이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시구는 그런 신생의 ‘현실적’ 불가능성을 벽처럼 대어, 기차의 약동을 꿈으로 돌린다. 시방 화자는 “고양이의 잠처럼 고요하고 / 낮은 침묵의 의자”에 앉아서 실없는 몽상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제 4연의 전후 2행들은 완벽한 반전의 대칭면이다. 전면에 약동이 있었다면 뒷면엔 “가장 깊은 곳”에까지 이르러 만나는 “슬픔”이 있다.
그러나 이 뒷면에도 억눌린 약동이 실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한 계절의 혀에서 사라지는
글라디올러스
는 억눌린 의지가 어떤 꽃을 피우는지를 보여준다. 향이 없어서 더욱 징그러운 꽃들의 넝쿨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시방 하늘의 위로 솟구치는지, 아니면 죽음의 늪 밑으로 가라앉는지를. 그러나 그 방향이 어디든 그 모습은 펄떡이는 물고기 같다는 것도. (『현대시학』619호, 2024년 5-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