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선생님 생각
황지우의 『나는 너다』 복간본에 대한 해설을 쓰느라 두 달을 다 써버렸다.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나는 그가 1980년대 말에 무슨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 고민이 그가 당연히 맞닥뜨려야 할 정당한 고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와 고민을 공유한 사람이 당시에 극히 희귀했었다는 건 80년대의 한계를 그대로 지시한다. 어쩌면 나조차도. 나는 1988년의 「민중문학론의 인식구조」에서 그와 동일한 화두를 띄웠으나 그 이후 정반대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하튼 황지우의 시에 대한 얘기는 해설에서 지겨울 정도로 썼으니 그걸로 그치련다. 그 해설을 쓰면서 나를 내내 사로잡았던 다른 생각은 우리 세대가 김현 선생의 영향을 얼마나 깊이 받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성 문화물의 해체·재구성으로 이루어진 황지우의 형태 실험은 ‘형태 파괴’에 대한 김현 선생님의 정의가 없었다면 아마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이는 황지우 시에 내재된 생래적인 서정성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계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해 거의 무지한 채로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왜 김현 선생님의 황지우 론이 왜 그렇게 쓰여졌는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김현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해의 연세를 한참 넘겨 버린 나이에 들어서도 여전히 그이에게 배우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허용된 목숨의 길이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
오늘의 황지우를, 오늘의 나를, 또는 우리 세대의 다른 누구누구를 만드는데 김현 선생님이 질료이자 형상이며 촉매로서 전방위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나는 1976년 계열에서 과로 진입 하면서 백승룡과 경쟁적으로 불문과를 선택했던 그 엄청난 행운에 다시 한 번 지복의 기분에 젖는다. 언젠가는 그이에게 진 빚을 돌려드릴 수도 있어야 하리라. (2013년 1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