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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세계의 자아화라는 허구

비평쟁이 괴리 2016. 1. 6. 04:50

'세계의 자아화'라는 허구 혹은 ‘보편적 자아의 끈질김

 

 

서정시의 주체는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 지난 호에서 나는 서정시의 존재 형식을 세계의 자아화로 이해하는 일반적 관행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 정의는 한 고전문학 연구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였다. 왜 저 이상한 규정(이미 말했듯이 세계를 자아의 뱃구레에 다 집어넣을 수 있다는 환상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을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일까? 학자의 권위? 천고의 의문을 풀었다는 과장된 자찬에 내재해 있었던 민족주의적 자긍심?

꼼꼼히 살펴보면 서정시에 대한 한국적 이해에 무언가 색다른 요소가 끼어들어 있다는 짐작이 더 정확한 듯하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탐구된 서정적 자아의 존재 양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현실과의 불화

(2) 절대적 자아의 형성과 고립

(3) 회억이라는 사유 형식

 

눈 밝은 사람은 금세 눈치챘겠지만 이 세 항목 중 하나는 한국 서정시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통상적으로 누락되고 있다. 대신 다른 하나의 항목이 추가된다. 배제되는 것은 현실과의 불화이고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규정은 자연과의 동화이다. 언뜻 보아 이 둘 사이에는 논리적인 연결선이 있다. 현실이란 통상 인간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고 인간 현실로부터의 소외 혹은 그에 대한 환멸이 자연과의 친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한국시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고 서양의 서정시에도 익숙한 것이다. 가령 코울리지와 워즈워드가 서정담시집Lyrical Ballads을 기획했을 때 그들이 그 당시의 박학 중심의 신고전주의적 스타일에 대항일상어로 된 운문으로 작성된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쓰기로 하면서 고대 문헌들의 관념세계보다는 자연세계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1]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서정시의 모형을 제공한 서양의 문학에서도 자연은 다른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것은 한국시에서 자연과의 동화는 말 그대로 자연에 대한 귀의, 자연 안으로의 자아의 완전한 침닉을 가정한다는 것이다(가정한다는 것은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태를 갈망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

 

마른 산에 봄비 나리니

금시에 청산 되는 것을,

 

청산이 따로 있던가

비마저 숨[]살면 청산되는 것을

 

우리도 언제

저 청산같이 프르청청 하여보나(김동환, 봄비[2]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3])

 

에서 보이는 태도가 뚜렷이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구들에서 자연은 다른 무엇의 비유나 촉매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실체이고 그 자체로서 목적이다. 이 시구들에서의 자연 안으로 침잠하고자 하는 의지는 훗날 서정주의 신라초에 와서 절대이념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거기까지 가려면 꽤 꾸불꾸불한 굴곡을 거쳐야 할 것이다. 우선 독자가 확인하는 것은 이러한 태도가 상당부분 전통시가의 잔류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런 태도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나 혹은

 

타관살이 꿈길이 고향산을 맴돌다가

비바람치는 낡은 집에 처자 함께 왔습니다.

 

벼슬 일찍 버린 것 애석할 것 없어요.

내 재주 원래가 모자란 건데

한 세상 건너기가 어려운 줄 알았어요

내 본성 원래가 옹졸한 탓에

 

마을에 벌인 잔치 백안(白眼)이 없고

고깃배에 술 취하여 모두가 붉은 얼굴

 

선인들 남긴 글 차례로 읽어가며

남은 생애 이 속에 의탁하려오(정약용, 고향에 돌아와, [1800][4])

 

와 같은 시가 그대로 보여주듯, 세속의 분규에서 밀려난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 자연에 의지하고자 하는 태도(“고향산이라는 표현은 옛 친지들로 둘러싸인 고향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이 자연이라는 것을 함의한다)와 깊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자아가 있는가?

당연히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귀향의 시가들과 더불어, 아니 논리적인 시간에 근거해 정확히 말하자면, 귀향에 이어, 장진주사어부사시사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익숙히 보아 왔다. 그렇다는 것은 자연에의 귀의는 자연 그 자체가 되는 게 아니라 자연을 잘 즐긴다는 뜻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는 이는 바로 자아’, 즉 주체의 자기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러니 여기에 자아가 떡두꺼비처럼 들어앉은 게 틀림없다. 신명난 자아가 자연 속을 유영하는 것이다. 환한 미소와 함께. 아마도 다음 시구는 그 광경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술통에 술이 가득 차 있네.

술병과 술잔을 끌어당겨 혼자서 술 따라 마시고

뜰의 나무 바라보며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짓는다.

남쪽 창에 기대어 거리낌없이 마음을 푸니

좁은 방이지만 참으로 편안함을 느끼겠네. (도연명, 돌아가자 歸去來兮辭[5]

 

이 시에 빠진 게 있다면 술통을 끌어 안고라는 표현이리라. 고향에 돌아가 혼자서 술 따라 마시고”, 즉 자족하며, “뜰의 나무 바라보며 얼굴에 기쁜 표정지으며, 다시 말해 자연을 동무 삼아, “남쪽 창에 기대어”, 곧 자연은 나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어, “거리낌없이 마음을 풀참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이 자아는 자연과 소위 혼연일체된 자아다. 그가 처한 좁은 방은 실은 꽉 찬 방이다. 자아는 세계와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아는 자신의 유일무이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자아, 다시 말해 보편적 자아다. 가령 이런 자아는 황동규의 시구를 빌어 어느 하나 옆놈 모습 닮으려 애쓴 흔적 보이지 않는”(제비꽃[6])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단독성을 생래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자아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자아가 근대, 즉 모더니티 이후에 출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모더니티란, 개인을 핵자로 하는 인간이 신을 물리치고 세계의 주도권을 쥔 시대, 아니 차라리 그런 존재 양식을 근본적인 삶의 원리로 갖고 있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선 저 귀거래혜사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보편적 자아란 없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운용 원칙은 자유이고, 자유란 모든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자아에게는 이런 자유의 흔적이, 하물며 주름은 더욱 더 없다. 안분지족을 자유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현실을 자연으로 대체하고 현실에 합류하는 대신 자연에 의탁하는 일에 만족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현실을 대신하는자연은 현실의 의미세계로부터 완벽히 배제된 그런 순수한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현실을 대신하는 것, 즉 대리 현실에 불과하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자연에의 귀의는 결코 자연주의가 아니다. 자연 예찬의 의미에서의 자연주의도, 자연 그대로, 즉 있는 그대로 현실을 묘사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연주의도 아니다. 내가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분별하는 데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7], 그것은 아주 완강한 인간주의이다. 다만 그 인간은 섭리의 수탁자로서의 인간, 즉 보편적 인간이다. 그 인간에게 자유는 없다. 대신 인간=세계의 선험적 합치, 훗날 무너졌더라도 곧 회복되리라는 믿음에 의해서 영원히 보존되는 합치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고전 시가, 혹은 한국적 서정시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자연에의 귀의를 세계의 자아화와 등치시키게 된다면 우리는 세계의 자아화는 결국 자아의 세계화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세계와 자아의 근본적인 단절에 대한 감각이나 이해가 없는 채로, 둘 사이의 일시적 불일치의 상태를 어느 한 쪽으로의 수렴을 통해서 해소하는 같은 방정식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은 세계와 자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현재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되 그걸 빌미로 다른 세계의 에이전트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다른 세계는 사실, 돌아가 다시 만날 본래의 현재 세계, 즉 자신에게 토라지지 않은 현재 세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철 가사가 선명하게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런 보편성 놀음에서 자아는 단지 매개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 사이의 분리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자아냐, 세계냐 라는 분별의 의식은 언제나 정신의 지구 곳곳에서 스멀거리고 있는 몽롱한 안개 구역을 헤맬 뿐이다. 그런 혼동 때문에 세계의 자아화라는 엉뚱한 관념이 태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시라고 지칭하는 것은 바로 세계와의 근본적인 단절에서 출발한다. 그 단절을 통해서만이 단독자로서의 자기가 태어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세계 창조, 즉 다른 세계의 창발을 항구적인 운동으로 만드는 길이 열린다. 한국의 언어문화에서 그러한 운동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단순히 서양 문물에 매혹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지난 호에 이미 말했듯, 김소월에 와서 근본적인 단절의 감각 체화된 이후에도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출현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또한 그런 개인에 대한 발견 이후에도 여전히 자아와 세계의 혼동은 아주 두꺼운 생각의 지류를 형성하였다. 황석우의 다음과 같은 기이한 시구는 그런 혼동의 산물이다.

 

태양은

혼의 덩어리이다

생물의 혼의 덩어리다

안이 씨뻘겋게 타는 노동자의 혼의 덩어리다”(태양[8])

 

이 시에는 세계내 존재의 육체성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 있다. 그런데 이 감각은 태양 안으로 흡수된다. “지구는 / 태양이 끄는 유모차 / 생물들은 태양의 애기들”(지구, 생물)에 불과한 것이다. 생물의 존재 이유는 간극의 봉합일 뿐이다:

 

대지가 끊임없이

생물을 낳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큰 허공을 메꾸려는 장원한 계획이랍니다.(허공을 메꾸는 계획)

 

그러니까 세계와의 근본적인 단절 위에서 개인의 상상세계의 창조의 모험이 개시되기 위해서는 아주 의식적인 자각이 필요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자각 위에서 펼쳐지는 자아의 모험의 실상을 보고자 한다.

 

막간의 잡념

 

나는 지금 정지용의 바다 2에 대한 분석을 앞두고 종종거리고 있다. 핑계를 대자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 닥쳐 집중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펑크를 내는 일이 잦아졌고, 간신히 쓴 글이, 지난 번 글 막바지 쯤의 어느 시간대를 미로처럼 헤매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정지용의 그 시에 대해 분명한 얘깃거리를 가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계속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쓰다가 보니, 오늘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심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고를 결석시키고 뛰어들 시의 담수 앞에서 계속 머뭇거리는 것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글을 기다리고 있는 독자들께 점직한 마음이 자못 깊음을 전하며, 최소한의 분량으로서나마 단절을 막겠다는 다짐을 두기로 한다. (『현대시』 2015년 11월)

 

__ 주 _______

1) Samuel Taylor Coleridge, Complete Works, Delphi Classics, Kindle edition, 2013 중 편자 해설, 서정담시집 그리고 다른 시들

2) 3인 시가집, 삼천리사, 1929, p.135

3) 이숭원, 영랑을 만나다-김영랑 시 전편 해설, 태학사, 2009, p.20.

4) 다산시선, 송재소 역주, 창작과비평사, 개정판, 2013, p.238.

5) 도연명, 도연명 전집, 이치수 역주, 대산세계문학총서 제 38, 문학과지성사, 2005, p.298.

6) 황동규, 외계인, 문학과지성사, 1997, p.11.

7) 자유의 모험으로서의 현대시조, 윤금초·박시교·이우걸·유재영, 네 사람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12

8) 황석우, 자연송, 조선시단사, 1929,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