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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차원 이동’이 뜻하는 것.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26

 지난 월요일(2009.01.12) 이성복 시인이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내가 쓴 시, 내가 쓸 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창작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시적 창조는 "중간이나 종합이 아니라 위", "변증법이 아니라 '차원의 이동'"임을 강조하였다. "중간이나 종합이 아니라 위"라는 말은 2차원 평면에서 보면 중간과 종합, 중용과 변증법만이 보이지만, 3차원에서 보면 극단과 중용과 종합이 모두 위의 다른 차원에서 보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그는 그러한 새로운 차원이 가시적인 차원 아래에 말려 있다고도 하였다. 헬리콥터에서 보면 지상의 호스는 하나의 선에 지나지 않지만 그 호스 위를 기어가는 개미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면이라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위나 아래 즉, 어떤 방향이나 위치에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차원의 이동' 혹은 내 식으로 해석하면 '상위 차원의 열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따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는 최근 과학의 논리적 성과인 평행우주나 그 근거인 막 이론에 대한 서적들을 읽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론으로부터의 유추를 통해 새로운 시 개념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동시에 괴델에 의해 '논증'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해독하기 어려워 곤란한 표정을 띠었었는데, 그의 시에 실제로 적용해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덕분에 그동안 잘 이해되지 않았던 그의 시의 어떤 측면이 요해를 얻을 수도 있는 것 같다. 가령, 이 블로그의 '시 한 편 읽기'에서도 언급된 그의 파리를 보자.

 

(1) 파리의 교미에서 어떤 시적 이미지도 못 느끼거나 파리를 순전히 더러움과 천함의 비유로 이해하는 건, 2차원 평면에서 특정한 한 위치를 선택하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2) 파리의 교미에서 그 비천한 것의 숭고함, 더 나아가 성스러움을 읽으려 하는 것은, 2차원 평면에서 두 대립개념들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하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3) 두 번째 생각은 그러나 파리에서 파리의 무표정이 특별히 강조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상위 차원에서 보면, 파리의 교미가 사람의 눈으로는 성과 속의 문제로 보이겠지만 파리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종족 번식의 행위일 뿐이라는 사실이 동시에 보인다. 이 관찰을 통해서 시가 환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삶을 성과 속의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의 부정성이다. 즉 인간은 생존의 문제를 성속의 문제로 치한시킴으로써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삶을 좋은 가치(라고 일컬어지는 것)'예속'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차원의 이동'이 가져온 이러한 일차적 깨달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인식이 잇달아 나타날 수 있다: 즉 시적 인식은,

 

(a) 그러한 좋은 가치의 일방적 지배의 억압성을 깨닫게 하고,

(b) 삶에는 성속의 의미 차원으로도 종족 번식의 본능의 차원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그런 다른 영역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며

(c) 그 다른 영역은 집요하게 의미를 주려고 하는 의식적 운동의 영역과 본능적으로 충족되고자 하는 존재적 운동 사이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의미집중의 영역도 순수 존재의 영역도 아니라, 그 스스로 의미를 만들고 있으나 해독되지 않는 영역, 아마도 의미생산(significance of meaning)의 영역이라고 명명하는 게 좋을 그런 영역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덧붙이자면,

(d) 이러한 시적 인식은 인식의 개방이라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개방은 무엇보다도 주관성으로부터의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파리의 교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걸 바라보는 인간이 아니라, 파리 그 자신들이라는 것,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행위자 파리와 보는 자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것(왜냐하면 파리 그 자신은 의미 부여를 행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는 인간은 오직 그러한 파리들의 의미생산의 행위를 정신적으로 함께 겪는 방식으로만, 그 행위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의 일상적 미의식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계없이, 대체로 (1)의 수준에 완강히 들러붙어 있다. 그러니 이성복의 시가 간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가? (200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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