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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추천사」를 읽는 시간

비평쟁이 괴리 2017. 1. 1. 07:04

교육대학원생들과 미당의 「추천사(鞦韆詞)」를 읽었다. 먼저 대학원생들의 발표가 있었는데, 현재의 교과서 및 참고 도서들의 해석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추천사」는 『서정주시선』(1956)에 수록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다룬 시들에 비해 상당히 늦게 발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이 시를 읽어 보기로 한다1). 학생들―실제 직업은 대부분이 선생님들인―의 열정어린 독해가 준 감동을 좀 더 느껴보기 위해서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 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2).


‘춘향의 말 1’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춘향의 말’은 이어서 두 편이 더 쓰인다. 「다시 밝은 날에」와 「춘향유문(春香遺文)」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시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읽어야 이 첫 시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를 단독으로 읽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어 왔다.

발표자들은 고등학교 교과서들에 이 시가 지속적으로 실려 왔다는 정보와 더불어, 교과서와 참고서들의 풀이에 의존해 이 시를 해독하였는데, 그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를 거의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로 이남호의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현대문학, 2001)가 적절한 길잡이를 해주었다는 것을 들었다. 해석의 표본이 존재한다는 것의 효용을 확실히 알려주는 보기라 할 것이다.

이 시의 일차적인 독해를 위한 포인트는 우선 두 가지다. 첫째, 춘향은 그네를 밀어 “하늘로” 올라 가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실의 기쁨을 갈구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게 괴로워서라는 것이다. 그 사연을 요약하면 이렇다: 춘향은 몽룡과 사랑을 나눴다. 그 사랑은 황홀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 춘향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원망보다는 몽룡과 나눈 사랑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 그 자취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 /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이 가리키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특히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가 그 심사를 울퉁불퉁거리게 하는데, 우선 벼갯모라는 어사가 사랑의 현장을 직접 가리키는 데다가, 그보다 더욱, 베개에 수놓인 풀꽃데미는 바로 사랑의 실제적인 열락을 진하게 환기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시구는 미당에게 “풀꽃데미”의 이미지가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城 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어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낙화가 안씨러워 주워 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놓았습니다.

쉬임없이 그 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나의 시」3))


춘향이 지금 괴로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어도 옛사랑을 상기시키는 자잘한 자취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녀에게 옛사랑의 열락을 생생히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 상황의 재림을 갈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옛 사랑의 대상인 몽룡은 지금 부재하니 갈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괴로움은 연인의 떠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연인과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억압의 사건이 아니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사태에 빠져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억압의 완벽한 이행의 실패와 그로 인해 향락의 ‘잔여물’이 해소되지 않은 사태이다. 이것은 간단한 차이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적확한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만 시적 화자의 궁극적인 지향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단 제 3연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만일 ‘춘향’의 심사를 임이 떠나 부재한 사건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으로 읽으면 이 연에서 ‘하늘’은 현실 바깥의 비유가 되고 따라서 춘향의 지향은 현실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의미를 띤다. 이런 슬픈 일을 있게 한 세상이 싫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호도 섬도 없는 하늘”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산호는 그 색깔의 화려함으로 인해 현실에서의 열락을, 섬은 그 고립성으로 인해 연인이 떠난 상태를 비유한다고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읽을 수 없다. 이미 말했듯,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은 현실에서 그가 누렸던 기쁨을 파편적인 양태로나마 너무나 뚜렷이 상기시키고 있다. 더욱이 ‘산호’가 여전히 향락의 황홀함을 암시하고 있지 아니한가? 때문에 춘향의 심사를 조금 전의 인도에 따라 현실의 열락을 못잊어 생겨난 괴로움으로 읽는 게 타당할 것이니, 그렇게 읽으면 ‘하늘’은 현실 바깥의 세계가 아니라 다른 현실의 비유가 되며, 춘향의 지향은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현실의 회복으로 읽혀져야 한다. 지금의 망가진 현실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 다른 현실로 가겠다는 것이다.

실로 그렇게 읽을 때만이 우리는 춘향이 나를 올려 달라고 하면서 “채색한 구름같이 밀어 올려다오 /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라고 부탁하는 심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냥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채색한 구름을 밀어 올리듯 할 게 아니라 채색한 구름을 흩어버리면서 밀어 올려달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춘향은 채색한 구름이 가리키듯이 자신의 우울한 심사를 옛 추억이 퍼트려준 유채색으로 물들인 상태로 올라가고 싶은 것이다. 또한 그러니 울렁이는 가슴을 덜어버릴 수 있도록 올라가고 싶은 게 아니라, 가슴이 울렁이는 그대로 올라가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여기까지 와서도 첫 번째 해석, 즉 ‘현실로부터의 해탈’에 점수를 주고 싶어 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으리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음 연이 암시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즉,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


지금까지 제출된 상당수의 해석들은 이 대목을 통해 춘향의 지향이 ‘서방정토’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현실과 서방정토를 이렇게 분리시켜서,


현실 = 육체적 사랑의 장소, 화려함, 요란함.

서방정토 = 정신적 해탈의 장소, 담백함, 적요함


춘향의 지향이 현실로부터 서방정토로 가는 것이라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제 3연에 대한 이 글의 해석에 귀를 닫아놓는 꼴이 된다. 게다가 이 시 자체에서는 그런 불교적 해석을 받쳐줄 어떤 근거도 없다. 물론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특히 ‘춘향의 말’ 연작의 세 번째 시, 「춘향유문」에서의 ‘도솔천’은 미당의 불교적 심성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도대체 미당의 불교란 무엇인가, 라는 걸 물어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춘향의 말 2’, 「다시 밝은 날에」에서 춘향이 부르는 당신은 ‘신령님’이다. 미당의 불교는 도교와 두루뭉수리하게 뒤섞인 썩 한국적인 종교가 아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미당의 불교를 ‘서방정토’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 그대로 ‘정신적 해탈’을 제공하는 원천으로서 간주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아마도 별도의 긴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나는 그런 해석을 용인해도 이 시는 ‘현실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것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문면이 그대로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춘향의 이 말이 단순히 체념의 뜻이라면 그 다음 연은 결코 씌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점을 유념한다면 춘향의 저 말은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갈 수가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가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른 방식으로 가니, 춘향이 가 닿을 자리가 ‘정신적 해탈’의 장소일지 아닐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문면 그대로 읽을 때 이 연이 알려주는 것은 춘향이 가 닿을 장소가 아니라 춘향이 가는 ‘방식’이다. 즉 ‘서으로 가는 달같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로 더 복잡하다.

우선 이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하기로 하자. 이것은 “서으로 가는 달같이”를 매우 비약적으로 해석해 ‘서방정토로 가듯이’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 읽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이는 ‘자연스럽게’라는 뜻의 비유적 표현인 것이다. 달이 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갈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지향의 장소가 아니라 지향의 태도와 방법론이다. 왜 그것이 중요한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의 해석적 선회가 필요해진다.

지금까지 춘향의 지향이 현실로부터 벗어남이 아니라, 현실의 회복이라는 점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춘향이 사랑의 열락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억압된 것의 귀환4)’이라고 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에 대입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개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덧붙였다. 왜냐하면 몽룡과의 사랑의 흔적들은 억압되었다기보다 억압되지 않은 잔여물들이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차세계대전후의 가장 중요한 정신분석저작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니콜라 아브라함Nicolas Abraham과 마리아 토록Maria Torok의 『늑대인간의 납골어Le Verbier de l’Homme aux loups』에 대한 ‘주석’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유령fantô̂me’은 “자아의 내면에 거주하는” 게 아니라 “타자의 무의식에 거주한다”는 점을 특정한 다음, 그들을 “불러내는 말, 르브낭스 revenance는 억압된 것을 귀환시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적시한다. 그리고 여기에 저자의 중요한 독창성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억압된 것의 회귀’는 ‘전이’가 가능하지만 유령을 불러내는 말은 ‘전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한다5). 즉 억압된 것의 회귀의 경우, 「그라디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르베르트 하놀드Norbert Hanold의 마음 속에 억압된 여인 조에 베르트강Zoe Bertgang은 아름다운 조형물로 전이되어 귀환하고, 그 귀환을 통해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전이체들과의 연속적인 만남이라는 드라마를 이끌어낸다. 반면 유령을 불러내는 주문6)은 어떤 대상으로도 전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 해독되지 못한 채로 비밀로서 혹은 괴물로서 존재한다. 데리다의 이러한 설명은 「추천사」에 썩 유용한 참조사항이다.

지금까지 읽어 온 바에 의하면 「추천사」에서 춘향은 사랑의 열락을 못 잊어 한다. 그 열락을 상기시켜주는 사물들은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이다. 그런데 독자는 금세 이 환기물들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따라서 얼마간의 조롱과 무시를 받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이 잔여물들이 몽룡과의 사랑의 열락을 추억케 하되, 그것들 자체는 온전히 그 사랑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사랑의 은유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에 미치지 못하는 환유체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억압된 사랑이 귀환한 것이 아니라 몽룡과 함께 떠나지 못한 것들이 남아서 사랑의 실패, 사랑의 결정적인 상실을 동시에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내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튼튼하게 받쳐줄 수 있는 지지대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서으로 가는 달같이”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 없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렇다면 춘향은 올라가는 걸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부족한 환유체들은 여전히 몽룡과의 사랑을 부단히 환기시킨다. 그것들은 상실감과 회감을 동시에 추동한다. 그렇다면 춘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최종적인 답안이 마지막 연에 있다.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갈 수가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가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과서와 평문들에서 이 대목은 거의 해독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보자면 번개의 속도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향단’이 밀어 올릴 이는 ‘춘향’이다. 향단이 ‘바람’이라면, 그렇다면 춘향은 ‘파도’이다. 파도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바람의 힘을 빌어서 저 스스로가 제방 위를 넘실대는 게 파도이다. 현실 속의 춘향 자신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파도’가 환기하는 것은 춘향의 몸이 아니다. 바로 사랑의 열락을 못 잊어 끓어오르는 춘향의 욕망을 그 자체로서 하늘로 솟구치도록 하는 것, 그것이다.

여기에서 춘향의 지향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앞에서 그 지향에 대한 두 개의 버전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버전은 ‘현실로부터의 해탈’이다. 두 번째 버전은 ‘현실을 다른 현실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두 번째 버전이 첫 번째 버전보다 더 타당함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이 복구될 현실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춘향의 욕망 자체가 파도가 되어서 현실 위로 솟구치는 게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로써 지향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두 개의 버전에서 지향의 대상은 어떤 상태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춘향 스스로의 운동, 즉 자신의 욕망을 통째로 현실 초월의 행위로 투입하는 운동이 된다. 상태에서 운동으로의 변환, 주체를 무엇을 갈망하는 자로부터 무엇을 이루어내는 자로 바꾸는 사건, 그것이 일어난 것이다. 「추천사」의 화자, ‘춘향’의 지향의 궁극적인 버전은 자신의 소망을 온전히 복원해내는 일에 스스로 투신하는 것이다. 그가 가고자 한 하늘은 ‘다른 현실’이 아니라, 변혁된 현실이다. 덧붙이자면 이 소망의 피력을 통해서 춘향은 ‘화자’에서 ‘인물’로 변신한다. 완전히 변신하지는 않고 변신 직전으로 돌입한다.

마지막으로 ‘향단’에 대해 언급하기로 하자. 왜 꼭 ‘향단’이 밀어주어야 하는가? 향단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밀어주면 안 되나? 아니, 기왕 스스로 자신의 소망을 그대로 끌고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밝힌 마당에, 조금 어려겠지만 저 홀로 그네를 끌어올릴 수는 없나?

실로 향단이 등장한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하나는 시에 내재적인 것이고, 둘은 미당 류의 시적 실천에 관한 것이다. 우선 향단도 춘향의 사랑 사건의 잔여물이라는 점에 착안하여야 한다. 앞에서 이 잔여물들의 모자람에 대해 충분히 말했다. 이것들은 몽룡과의 사랑을 온전히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잔여물들의 잔존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없으면 사랑의 자취가 아예 사라져 버린다. 그들만이 몽룡과의 사랑을 연결시켜주는 끈이다. 춘향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면, 이 잔여물들 중 가능한 한 덜 훼손된 것을 찾으려 할 것이다. 훼손도가 덜 된 것일수록 사랑의 기억을 더 잘 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덜 훼손된 것은 좀 더 순수한 것이라는 치환이 가능하다. 그리고 더 순수한 것은 최초에 놓인 것이라는 치환 역시 가능해진다. 그렇다. ‘향단’은 바로 몽룡과의 최초의 만남의 매개자 아니었던가? 이 점을 결정적으로 지원해주는 사물이 또 있다. 바로 ‘그네’다. 몽룡과 춘향이 처음 만난 바로 단오절에 춘향이 그네를 탈 때였던 것이다. 향단과 그네야말로 사랑의 최초의 표지, 따라서 사랑의 가장 순수한 잔여물인 것이다. 그러니까 춘향이 떠나간 몽룡을 잊지 못해 그걸 회복하려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행위가 ‘그네 타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향단’이 이 시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이다. 그의 존재는 당위적이다.

또 다른 까닭이 있다. 이는 문화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춘향의 지향을 설명하기 위해 좀 복잡한 단계들을 거쳤다.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중간 단계를 제시한 다음, 이어서 ‘억압되지 못한 잔여물’로 해석의 표지를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추천사」의 명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내가 뛰겠다’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명제에 도달하기 전에 그 안에 오랫동안 ‘그이가 온다’라는 명제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내 가설이다.

「추천사」는 아주 쉬운 말들로 이루어졌어도 실은 아주 정교하게 구축된 시다. 지금까지의 분석이 그 정교함을 증거한다. 그것은 미당만이 발휘할 수 있는 솜씨이다. 그런데 미당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 한국시는 ‘그이가 온다’라는 명제에서 생의 동력을 발견했던 듯하다. 그 명제를 처음 세운 건 김영랑이다.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최종적 선언은 “기둘리고 있을 테요”라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이가 오실 걸 알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다. 그이가 오실 걸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이렇게 말해보자. 어떻게 해서 일제 강점기의 조선 사람의 뇌리에 그이가 오신다는 생각이 심어지게 되었을까? 그 전에는 떠나가는 이를 ‘보내거나’(김소월), ‘보내지 아니하거나’(한용운) 했을 뿐인데 말이다. 실로 1930년대의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그이가 오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난 호들에서 얘기했던 시인들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영랑 이후의 일군의 시인들은 그 믿음을 통해서 피식민지인의 고통을, 독립과 자주를 살지 못하는 자의 고난을 견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다음 호에 그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나는 영랑의 연장선상에 미당을 놓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미당에 와서 ‘오시는 그이’는 ‘옆에 상주하는 보조자’로 변형된 것 같다. 그게 ‘향단’의 또 다른 존재 이유다. (『현대시』, 2016.12)


1) 이 글의 제목은 최시한의 소설, 「허생전을 읽는 시간」을 시늉한 것이다. 그 소설이 교육과 관련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2) 『미당 서정주 전집 1. 시』. 은행나무, 2015, 131~31쪽.

3) 같은 시집, 같은 책, 135쪽.

4) 잘 아시다시피, ‘억압된 것의 귀환Retour du refoulé’는 옌센Wilhelm Jensen의 「그라디바Gradiva」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을 통해서 무의식의 중요한 ‘행위’로 등록되었다. cf. Sigmund Freud, Le délire et les rêves dans la Gradiva de W. Jensen[(1907), translated by Paule Arhex, Paris: Gallimard, 1986

5) Jacques Derrida, “Fors. Les mots anglés de Nicolas Abraham et Maria Torok”, in Abraham & Torok, Le Verbier de l'homme aux lopus , Paris: Flammarion, 1976, p. 42.

6) 유령을 불러내는 주문 revenance는 ‘주술학’에서 저승으로 돌아가지 못해 죽지 못한 귀신들을 불러오는 행위이다(cf. http://forgottenrealms.wikia.com/wiki/Revenance). 이는 「추천사」에서의 춘향의 말과 구조적으로 동격이다. 왜냐하면 춘향이 집착하는 것은 몽룡과의 사랑의 잔여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