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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도의 기능 - 김광균의 「추일서정」, 기타. 본문

시의 숲 속으로

조감도의 기능 - 김광균의 「추일서정」, 기타.

비평쟁이 괴리 2016. 11. 17. 22:11

이제 「추일서정(秋日抒情)」을 읽어 보자.


落葉은 폴- 란드 亡命政府의 紙幣

砲火에 이즈러진

도룬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曰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시의 急行車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筋骨 사이로

工場의 지붕은 횐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一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風景의 帳幕 저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1)


지난 호들에서 1930년대에 행동과 관조의 분화가 일어났고 그 사이에서 순수한 미의식이 솟아났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과 그에 관련된 작가들을 몇 들었다. 김광균도 같은 집합에 속한다. 김광균의 시를 특별히 자세히 거론하게 된 건 그의 시가 저 ‘분화’의 결과보다는 분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의 사례로서 나는 앞선 호들에서 두 개 이미지의 동시적 출현 혹은 공존을 제시한 후, 이어서 시인이 감상성 자체를 미로 만들려 했다는 점을 언급2)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양상은 좀 더 설명을 필요로 했기에 그 감성성의 원천으로서 객관적 상관물의 결여를 지적하고, 그 결여 자체를 시적 존재론을 만들려고 했던 김광균의 ‘의도’를 풀이하였다. 또한 그것이 시인의 정치학을 이룬다는 점을 가리키고 그 정치학이 포함한 정직성의 의미를 추적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감상성 자체가 가진 수동성의 한계를 말하였다.

「추일서정」은 그러한 감상성의 미학으로부터 얼마간 벗어난 시이다. 여기서 ‘얼마간’이란 말은 꽤 미묘한 뜻을 품고 있다. 우선 감상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객관적 상관물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라고 했었다. 이 작품에서 그렇다면 시적 화자의 정서는 무엇이고 그 상관물은 무엇인가?

후자의 답은 비교적 분명하다. 그것은 기차가 달리는 가을 풍경이다. 그런데 정서에 대한 대답은 쉽지가 않다. 여기에서 정서란 시의 존재 이유에 해당한다. 왜 이 시를 썼을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왜 이 시를 써야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찾아내지지 못하면 이 시를 읽는다는 건 무의미하다. 시의 정서는 시의 절실성의 정도이다.

가장 일차적인 대답이 있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회화적인 묘사에 대한 시적 요구이다. 1930년대는 순수 무의식이 출현한 시대라고 했다. 당연히 순수한 미에 대한 요청이 마음속에 일어난 시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의식의 언어적 실물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이런 시를 지었다!? ...... 이 방향에서 이 시를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는 순수한 풍경 묘사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이 독서 마당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에 모종의 감정, 가령, ‘쓸쓸함’, ‘고독’이라는 감정이 비치지 않는 건 아니나, 시에 ‘관여적’인 건 아니다. 이 작품은 그냥 정경묘사로 감상하는 게 좋다.

정말 그럴까?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두 가지 결정적인 표지가 있다. 더욱이 하나는 뚜렷이 보이는 것이기도 한다. 바로 첫 세 행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넌지시 가리키는 암시이다. 그것을 통해 피식민자, 혹은 후발국민의 비애감이 스며난다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 혹은 독립에의 갈망을 바로 읽을 수는 없다. 피식민지인은 꼭 그렇게만 살지 않는다. 그렇게 살려면 아마 말 그대로 망명하는 게 나았으리라. 피식민지인은 한편으론 식민자들이 들여 온 문물과 생활 방식에 동화되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런 동화의 삶 자체가 비주체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지니면서 산다. 그것이 문학적으로는 자율성을 자각하는 순간에 자율적 대상을 확보하지 못하는 정황 속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정황을 수동적으로 반사하면 바로 그것이 ‘감상성’이 된다. 또 하나의 암시는 바로 지난 호에 얘기했던 ‘시의 불가피한 불완전성’에 관한 시인의 발언이다. 사회현실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저 완미한 시일 수는 없다는 진술이야말로, 이 시를 순수한 정경 묘사로 읽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 어떤 사회의식이 개재해 있는 것이다.

그 사회의식의 일단을 “도시의 현대문명이 주는 황폐감과 상실감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 유성호의 해석은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는 문명에 대한 강박관념이 시시각각으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꾸불꾸불하게 이어지는 길을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있다고 표현하고, “포플러 나무”에서 “[공장노동자의] 근골(筋骨)”을 보며, “공장의 [슬레이트] 지붕”에서 공격성을 느낀다(“흰 이빨”). 또한 구름을 “세로팡지”로 비유하였다. 요컨대 자연을 문명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경 앞에서 시의 화자는 “호올로 황량한 생각을 버릴 곳 없”다는 느낌에 붙잡힌다. 이 구절의 기본 감정은 ‘황량함’이다. 이 감정 앞에 붙은 부사어 ‘호올로’는 그 거칠고 쓸쓸한 생각이 화자의 가슴에 달라붙어 누구와 그걸 나눌 길이 없는 채로 그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버릴 곳 없”다는 진술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황량한 느낌을 버릴 곳이 없다는 생각은 시로 표현되었다. 즉 그 감정이 하나의 묘사를 획득한 것이다. 그것도 어떤 해석자들에게는 순수한 회화적 풍경만이 거기에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끔한 묘사이다. 그렇다는 것은 시인이 그런 감정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감상성의 극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시인은 정서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풍경’을 창출하였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실감과 황폐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이미지이자, 그 이미지를 조성하는 방식이다.

그 방식이 무엇인가? 독자가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게 있다면 이 이미지들이 모두 작게 장난감처럼 축소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길은 “구겨진 넥타이”로 작아진 후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진다. 독자의 눈에는 그 일광의 폭포가 한 눈에 보여야 할 것이니 그 폭포도 작게 축소되어 있다. 또한 급행열차는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들을 달린다.” 독자가 발견하는 것은 이 시가 도시의 풍경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차가 들을 달리고 있다면, 그 광경은 철로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시골 들판의 그것이다. 그 광경을 보는 눈은 시골만을 보지 않는다. 공장도 본다. 이 광경은 위에서 조감하거나 혹은 수평의 시각을 취할 경우 그 대상을 아주 작게 축소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여기에 오면 우리는 1930년대에 감정의 절제에 성공한 세 시인이 모두 같은 시점을 취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세계를 부감(俯瞰)하는 높이에 눈을 위치시켰다는 것. 우선 이상의 「오감도」 연작이 그러하다. 다음 정지용의 「바다 2」에서 바다의 호흡을 감각적으로 느끼기 위해 시인이 자신의 눈높이를 대기권 바깥으로 높이 올렸다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3). 「추일서정」이 또한 그러하다.

이 선회비행자의 위치가 1930년대 한반도의 문학인들이 객관적 상관물을 획득하기 위해 취할 수밖에 없었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정면으로 마주하기에는 근대라는 문물은 너무나 거대한 괴물이었으니까 말이다. 또한 괴물이긴 했으나 피식민자 저마다가 제 나름으로 소화해서 저의 양분으로 삼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존재태로 만들어야 했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대등한 크기로 재조정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재조정을 위해서 주체는 원근법을 활용하였다. 눈길을 멀리 떼어 놓으면 작게 보인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걸 알게 되었을까? 바로 그에게 괴물로 다가온 근대의 지식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근대는 마냥 무서운 괴물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근대에 매혹된 자는 서서히, 시시각각으로, 편편이, 그것의 껍질을 그리고 살점을 자르고 녹여 저의 단백질로 취하는 것이다.

근대인에게 있어서 원근법은 내 눈의 위치에서, 다시 말해 내 입장에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근대의 수용자인 피식민자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세계 전체를 본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근대 문물을 가져 온 ‘그’ 덕분에 ‘나’를 알게 되었지만 바로 ‘나’를 안 기술로 다시 ‘그’를 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을 물리적으로 훼손한 자를 가늠하고 운산하여 그에게 맞설 방책을 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시선의 상승은 그래서 나왔다. 심지어 「바다 2」에서처럼 대기권 너머로 올라갈 필요까지 있었다. 대기권 아래는 근대를 가져 온 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오면, 행동과 관조의 분화와 더불어, 관조의 형식에도 분화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분리의 첫 번째 표징으로 김영랑의 시를 보았었다. 영랑의 관조는 행동을 대신하는 것, 즉 행동이 아닌 관조에 해당하였다. 반면 김광균, 정지용, 이상의 관조는 오히려 ‘행동으로서의 관조’이다. 거기에 상승 운동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행동이 아닌 관조’는 근대 문명과는 별도의 이상향을 추구하게 되겠지만(서정주), ‘행동으로서의 관조’는 오히려 근대 문명 전체를 체화하겠다는 의지에 의해 부추겨진다.

따라서 행동으로서의 관조는 근대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추일서정」을 추동한 의지는 주체의 눈길을 불가피하게 근대의 상공 위로 뛰어 오르게 하였다. 똑같은 충동이 야기한 두 상반된 향방의 모순. 그로부터 솟구쳤던 시선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다만 시각의 기능성을 버릴 수 없기에 변조가 이루어진다. 문득 화자는 이 장난감으로 축소된 바깥 세계가 “자욱-한 풀벌레 소리”로 어지러워지는 걸 느낀다. 시각을 보존하려는 안간힘을 헤치며 청각이 시각을 흐려버리면서 감각수용기관 속으로 난입하는 것이다. 화자는 명료화의 의지가 좌절되는 걸 느끼면서 본능적인 방어 동작을 취한다. 한편으로 이 청각의 잡음을 서둘러 제거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그래서 “자욱-한 풀벌레 소리를 발길로 찬”다. 거꾸로 읽으면 지난 호에 언급했던 청각의 기능, 즉 시각을 요청하는 자발적 미완의 감각 운동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김광균의 애초의 출발점이었던 두 이미지의 동시적 출현은, 시각과 청각의 동시적 출현, 관조(행동으로서의)와 행동(지상적)의 동시적 출현으로 되풀이된다.

그러나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 이 순간 화자는 그가 시선 속에 가둔 바깥 세계가 실은 축소된 모형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내’가 포지한 근대는 겨우 ‘조약돌’ 하나로 작아져서 “기울어진 장막 저쪽에 /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시의 메지는 그렇게 났다. 시인이 바깥 세계와 대결하기 위해 바깥 세계를 원경화했을 때, 그 바깥 세계는 가상이 되어 버린다. 이건 모의로서의 근대일 뿐이다. 진짜 근대 세계와 싸우려면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리라.

정지용의 「바다 2」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지점이 여기이다. 「바다 2」에서 원경화는 종결부에 약간 돌발적으로 출현한다. 그 원경화는 시의 화자가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친 “앨쓴 해도”를 그린 덕택에 가능했다. 즉 그것은 지상적 행동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원경에 비친 풍경은 바깥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주제가 재구상한 바깥 세계’의 호흡이었던 것이다. 반면 「추일서정」의 원경화는 주체의 지상적 행동 이전에 미리 나왔다. 지상으로부터 탈출한 후, 그 다음 지상으로 귀환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귀환은 자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만의 고유한 행동을 개발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김광균식 회화주의가 이어서 맞닥뜨리게 되는 숙제이다. 김광균이 그 숙제까지 마저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현대시』, 2016.10)


1) 오영식·유성호 (엮음), 『김광균 문학전집』, 소명출판, 2014, p.65.

2) 「추일서정」에 대한 해설들을 검토하려고 뒤지던 중, 『김광균 전집』의 해제로서 유성호가 쓴 「김광균 시의 문학사적 의미」에 최재서가 이미 감상성(센티멘털리즘)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음(「센티멘탈론」[1937])을 소개하는 대목을 보았다(pp.614-15.) 설명의 기본적인 구도는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최재서 선생의 글을 먼저 참조했어야 마땅하다. 게으른 탓에 그걸 놓치고 말았으니, 평소에 서구 이론에 편향적으로 의존하는 한국 비평의 풍토를 개탄해 온 사람으로서 스스로 제 몸에 밧줄을 둘러맨 꼴이 되어 민망하기 짝이 없다.

3) 「서정적 자아의 존재 형상」, 『현대시』 201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