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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문학일반

한중작가회의 발제문-문학시장의 변화와 작가의 정체성

비평쟁이 괴리 2015. 5. 31. 12:59

아래 글은 2015525-26일 사이에 있었던 9회 한중작가회의’(중국 성도 파금문학관)에서 발제 형식으로 발표된 글이다.

 

문학시장의 변화와 작가의 정체성

 

20세기 후반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장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민족 단위(혹은 언어공동체 단위)로 운행되던 문학이 세계문학의 장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세계화 바람과 더불어서 진행된 이 변화는 그러나 세계화의 일반적 흐름에 그대로 부응한 움직임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우선 세계화의 진행과정 중에서 세계화의 불가피성이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세계화 과정 초기에 격렬하게 일어났던 반-세계화 운동들은 거의 모두가 대안-세계화 운동으로 변모하였다. 이는 현재 정치·경제·문화 등 인류 활동의 거의 전 분야에서 생산량과 유통량이 세계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자각에 근거한다. 이러한 자각은 문학 분야에도 의미심장하게 적용되었다. 예전에 자신의 작품의 세계적 유통을 기도한 작가들은 대체로 자국의 문학시장이 아주 열악하다는 사정에 쫒기고 있었다. 가령 유럽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의 작가들은 자국의 공용어가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지배했던 나라들의 언어, 즉 영어나 불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30%이상의 문맹율과 더불어 빈한한 경제 사정으로 인하여 그들의 작품을 사는 자국민들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유럽의 독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흔적이 배어 있는 작품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자국의 문학시장이 비교적 탄탄하게 구축된 나라의 작가들도 세계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꾀하기 시작하였다. 가령 한국문학의 경우 문맹율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고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룬 덕분에 문화상품의 유통도 꽤 활발한 데 힘입어, 자국어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순조로운 생장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세계의 독자들에 의해 읽히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 욕망은 1990년대부터 한국문학작품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독서시장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현상은 국영과 사립 양쪽에서 한국문학의 세계진출을 지원하는 기구를 설립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었다. 문화의 세계적 유통의 경향이 점점 일반화되고 일상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문학 역시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세는 작가들의 존재 방식에 중요한 변화를 자극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언어에 관련되어 있다.

즉 자신의 생활어와 작품의 유통어 사이에 불균형이 발생하여 정체성의 요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잘 아시다시피 언어는 의미 전달의 도구 이상이다.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이 새겨져 있어 언어공동체 구성원의 몸의 일부를 이룬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언어의 움직임에는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세계를 인지하고 느끼고 기획하는 특유의 방식이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건너가는 일은 세계에 대한 관점 및 작가가 세계와 만나는 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포함하게 된다.

그런데 생활어와 유통어 사이의 불균형은 제 3세계국의 작가들에게 더욱 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유통어가 세계문학의 장에서 통용되는 언어라면, 그것은 세계 언어권을 과점하고 있는 세계어가 그 유통어들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세계어는 모국어인구의 숫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그 동안 전개된 세계사의 결과로 정치·경제·문화적 차원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통용되는 언어를 가리킨다. 그 언어들은 현재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독일어 정도이다. 참고로 덧붙이자지면 중국어는 세계어로 부상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어이다. 생활어는 세계어의 위상에 관계없이 하나의 언어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지역어를 가리킨다. 그런데 제 1세계에서는 세계어와 지역어 사이가 일치하거나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정도가 강한 데 비해, 3세계에서는 그 둘 사이의 격절이 심해진다. 한국문학의 경우, 그 매체인 한국어는 철저하게 지역어이다. 다시 말해 한국어는 한반도 내에서만 공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만주 및 몇몇 고려인 거주지역들에서 다소간 상용화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순수한 지역어로 씌어진 한국문학이 그 자체로서 세계문학의 장에서 유통될 수는 없다. 한국문학작품들이 읽히기 위해선 한국작가가 세계어로 작품을 쓰거나 혹은 전문 매개자에 의해서 세계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작품은 전부 후자의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전자의 방법, 즉 직접 세계어로 작품을 써서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는 작가들이 출현하리라 예상된다. 물론 한국어의 자국어 체계가 워낙 완강하여 그 때가 빨리 오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반면 번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작품의 변모 및 세계 독자들에 의해서 자신이 작품이 읽혀지는 상황의 실제 양상과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곤란함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번역된 작품을 거의 읽을 수 없고, 별도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작품이 유통되는 데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 작가들이 세계문학의 장 내에서 존재할 수 있는 폭을 대폭 축소시킨다. 그의 작품이 세계 시장 내에서의 유통에 얼마간의 성공을 거둘 경우, 그가 세계 문학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의 세계문학에 대한 지식 및 이해의 정도와 자신의 작품이 번역된 언어권의 문학 생산과 수용에 대한 이해의 정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번역된 상황에 대한 주변인들의 정보 제공을 종합하여 자신의 작품이 세계문학의 장 내에서 존재하는 양상을 추정함으로써 측정될 것이다. 생활어와 유통어가 일치하지 않는 작가는 후자의 두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아주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거나 아니면 이 문제들을 사실상 포기하고 직접적으로 제공되는 물리적인 성과(가령 판매량)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형편은 그가 목표로 하는 문학과 세계가 그에 대해 기대하는 문학 사이의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2006년 한불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문인협회회관에서 한국작가들 네 명과 프랑스 소설가 및 출판사 편집자들 네 명이 대화의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2년 후 노벨문학상을 타게 될 르 클레지오씨가 한 한국작가를 거론하면서 한국문학이 프랑스 문학에 앙가쥬망engagement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주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네 명의 작가 중 두 사람은 앙가쥬망에 대해 거부감을 표명하였고 그러한 반응은 곧바로 한 사람과 두 사람 사이의 설전으로 번졌다. 그리고 프랑스 대형 출판사의 편집장이 두 작가의 입장에 공감하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프랑스라는 중요한 세계문학시장의 한 구석에서 한국문학을 둘러싸고 두 나라의 문인들이 각각 분열되어 논쟁을 벌이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당시 세계문학의 조류에서 앙가쥬망은 퇴조하고 개인화의 경향이 극단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한편 프랑스라는 세계시장에서 세계 독자의 눈길을 끈 한국문학은 그런 개인화의 방향에 놓인 작품들이 아니라 냉전 체제 하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휘말려 들었던 사건을 다룬 황석영의 손님혹은 서양문학이 거의 잊고 있었던 성과 속의 관계를 다룬 이승우의 작품들이었다(이러한 사정은 오늘날 프랑스 독자들이 북한문학에 유별난 관심을 갖는 현상과도 연결된다. 그들에게는 핵을 가진 폐쇄된 국가에서 창작되는 문학이 신기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앙가쥬망에 반대한 두 한국작가의 작품들은 번역은 되었으나 프랑스 독자들의 반응을 거의 얻지 못했다. 그들은 세계문학의 흐름에 민감히 부응하고 있었지만 정작 세계문학시장이 한국문학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채로 있었다.

나는 한국문학이 세계시장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적인 차원에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장에 진입한다는 것은 한국문학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 의해서 세계문학의 진화를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문학을 혁신할 수 있는 문학적 질료들을 한국문학이 충전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문학의 추세를 따라가는 것도, 세계 시장이 한국문학에만 기대하는 특수성에 의존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다만 이 두 사안은 중요한 참조사항이 될 뿐이다. 세계문학의 추세는 그것의 결여와 욕구를 분별하게 해주며, 세계시장의 기대 역시 세계 시장의 갈증과 편견을 분별하게 해줄 것이다.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혁신이라는 요구demand와 세계문학의 욕구와 세계 시장의 욕망 사이의 차이를 살핌으로써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세계문학의 혁신 쪽으로 정향orientate시키는 과정을 통해 한국문학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이 아일랜드의 문학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에서 실현되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두 문학은 세계문학과 언어를 공유한다는 이점에 기대고 있었다.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그 점을 기대할 수가 없다. 때문에 한국문학의 현재의 세계문학적 위상은 아주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반면 중국문학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유럽과의 교류는 1577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광둥성 방문을 비롯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은 이미 중국을 거대한 문화대국으로 인지하고 중국학 연구에 공을 들여, ‘국립동양문명·언어연구원인 이날코Inalco(Institut national des langues et civilisations orientales) 등을 통해 수많은 연구자를 배출하였다. 현역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만 보아도 프랑수아 쥘리엥François Jullien, -뤽 도메나크Jean-Luc Domenach, 자크 펭파노Jacques Pimpaneau, 안느 챙Anne Cheng(程艾兰) 등의 쟁쟁한 중국학 연구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예술 및 문학에 대해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인 프랑수아 챙François Cheng,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오싱젠과 그의 번역자인 노엘 뒤트레Noël Dutrait 등이 중국문학의 고유한 미학을 알리는 일을 부지런히 해내고 있다. 이들에 의해서 중국의 사상과 문학은 거의 실시간으로 세계문학시장에 출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중국의 사유는 서양의 변증법적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른 음양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중국의 문학은 도가적 신비주의를 비롯한 고유한 집단무의식의 저장고로부터 깊은 은유의 세계를 꺼내 펼쳐 보인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현지의 문학인들이 이런 세계문학시장에서의 중국문학 유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때문에 중국 현지의 문학인들 역시 한국의 문인들이 겪고 있는 소통의 어려움과 정체성의 혼동을 비슷이 겪고 있다고 짐작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마다 자기 사정이 있는 법. 중국 작가들의 어려움과 혼동의 문제를 상세히 짚어보는 데 필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 이 시간이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 작가분들 역시 나의 발제에 대해 저마다 의견이 계실 줄로 믿는다. 고견을 기대하는 바이다.[쓴날: 201555; 발표일: 2015525, 사천 파금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