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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문학일반

현대시와 동아시아의 문화전통

비평쟁이 괴리 2015. 5. 17. 07:53

※ 아래 글은   지난 5월9일 중국 태창(太倉)시에서 열린 '한중시인회의'에서 발제 형식으로 발표한 글이다. 이 회의의 주제는 '현대시와 동아시아의 문화전통'이었다.

 

우리는 전통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삶이 과거의 연장인 한, 당연히 전통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오늘까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렇다. 전통은 끈질기고 지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다. 왜냐하면 모더니티라고 명명되는 서양적 문물의 세계적 확산 이래 서양 바깥의 문화 역시 서양적인 방식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언어문화역시 서양의 문학을 통해 새롭게 개편되어 그 형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라 부르는 것들은 과거의 시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시의 형식은 정형적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유시이며, 그 주제는 현실과의 근본적 단절, 절대적 자아에 대한 강박(强迫), 부재하는 이상을 향한 은유적 환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옛시의 일반적 형식인 정형율격, 동양의 전통시가 함축하고 있는 입신(立身)의 도구로서의 시작(詩作), 단독자로서의 자아의 부재, 자연과의 동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기법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내부와 외부의 자연스런 이어짐 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서양의 동진 이래 우리는 완전히 다른 언어문화의 성좌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시의 표현이 현대시에 등장하는 것을 빈번히 확인할 수 있으며, 옛날의 감정이 현대시인의 절박한 심사로 재탄생하는 경우를 자주 보고 있다. 가령 어제 홍정선 교수가 상기시켰던 것처럼, 조지훈이라는 현대시인의 시, 완화삼 의 마지막 연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의 첫 행은 고려조 이조년의 시조에서 표현된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의 완벽한 복제이다. 또한 발라드 형식으로 씌어진 서양 중세 15세기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çois Villon지난날의 눈은 지금 어디 있는가Ô̂ù sont les neiges d’antan?”라는 시구는 오늘날 소외와 고독에 처한 현대인의 마음을 그대로 전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는 것은 전통문화의 형식들, 표현들, 그리고 정서들이 오늘날의 문화 안으로 스며들어 현대 문화의 진화에 영향을 주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 습합(習合)’의 양태는 무엇이고 그 효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 전통의 계승과 극복이라는 명제로 흔히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들은 대체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용어들을 통해 항용 전개되는 추상적 일반론 혹은 당위론의 수준에 머무르는 게 태반이었다. 당위론으로부터 구체적 실증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하는 경우조차 전통적인 것의 존속을 증명하고자 애쓰는 데서 그치고 말아, 그것의 현대적 의의 및 존재양식에 대해서 탐색한 경우를 찾기란 어려웠다. 가령 한국시가연구에서 1960년대 이후 50여년 지배적 이론으로 군림해 온 음보율(音譜律)의 논자들은 한국시의 전통율격이 3음보와 4음보로 이루어졌다는 가정 하에 현대시에서도 이러한 전통율격이 보존되고 확장되었다고 주장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논의들에서 현대시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자 형식인 자유’(개인의 자유와 자유시형)는 완벽히 배제되어 있었다.

  실제로 전통적인 문화의 요소들은 그렇게 지속과 확산의 양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학적 태도가 그것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것이 완전히 부정되지 않고 존속한다면 그 양태는 아주 특이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시로 일컬어지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예로 들어 간단히 설명해보고자 한다[1].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연인에 대해 단호한 의절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고 흔히 평가되어 온 이 시는 또한 한국 민요시의 전통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구체적인 실증은 없었으나 아마도 그러한 해석의 근저에는 님과의 이별이라는 아주 흔한 주제를 이 시가 다루고 있었고, 그 이별의 상황에 대한 뛰어난 표현들을 재래의 시가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고려 속요인 가시리나 근대 초엽의 민요인 경기아리랑이 그런 뛰어난 문학적 표현들이다. 그런데 진달래꽃화자의 태도와 두 속요의 화자들의 태도는 아주 다르다. 가시리의 화자는 떠나는 임을 두고 선하면[=화나면] 아니 올세라 / 설운 님 보내 옵나니 가시는 듯 도소[=도로] 오소셔라고 끝을 맺고 있으며, 경기아리랑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고 약한 저주를 퍼붓고 있다. 반면 진달래꽃의 화자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우리다라는 말로 이별의 사건을 결연히 수용하고 있다. 가시리의 화자는 재회를 당연시하고 있으며, 경기아리랑의 화자는 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단절이라는 현대적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이는 진달래꽃의 화자이다. 김소월은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를 가져왔으되, 그것을 아주 현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진달래꽃의 화자는 떠나는 님 앞에서 진달래꽃을 뿌리며 가시는 걸음걸음 놓은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고 노래하였다. “즈려밟고는 어감상 매우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나 그 뜻은 지근지근 짓밟고이다. 이 표현 속에 교묘한 전략이 들어 있다. ‘진달래꽃이 두 사람의 사랑의 징표라면 만일 떠나는 님이 그걸 짓밟고 떠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과거의 삶을 잔혹하게 부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진달래꽃의 화자는 바로 그 점에 근거해 떠나는 연인에게 내기를 거는 것이다. 한 번 밟고 떠나보라고 말이다. 그러면 당신의 삶도 망가질 텐데 그걸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우리는 진달래꽃현실과의 단절이라는 현대적 감정 속에서 만남에 대한 믿음이라는 전통적 감정을 만남을 위한 모색이라는 전략적 태도로 변용하여 현대의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 데서 거둔 멋진 미적 승리를 본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통은 계승되고 확산되기보다는 수용되어 변형됨으로써 존재한다.

  전통적 문화 요소들은 아마도 그렇게 수용되어 변형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정신적 자원들의 진화의 일반 법칙이라고. 우리는 이러한 문화진화의 제 양상들을 현대시의 모든 부면에서, 즉 시적 생산과 그 텍스트들과 독자들에 의한 수용의 전 방위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내 짐작으로 그 영역은 거의 미답의 황야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또한 우리는 이 전통 문화의 경계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시켜 그 지평과 맥락을 운산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의 현대시인 정지용의 절창, 향수중에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표현이 있다. 남경대학의 윤해연 교수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 표현이 구양수가추풍부에서 밤바람 소리를 가리켜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라고 말한 것의 변용임을 밝혔다. 이렇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문화권에서 중한일의 언어문화는 비균질적이긴 하겠지만 하나의 차원으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 현대시의 운명을 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1] 이에 대해서는 졸고, 「「진달래꽃이 민요시가 아니라 근대시인 까닭(문학관, 한국현대문학관 54-55, 2012년 가을, 겨울)에서 상세히 풀이한 바 있다.